이유 있는 서양권 e스포츠 팀의 기량 상승... 한국은?
2019.08.29 17:49 게임메카 이재오 기자
한국 e스포츠 위기설은 선수들이 국제 무대에서 흔들릴 때마다 항상 제기돼 왔던 문제다. 당연히 1등이어야만 할 것 같은 우리나라 선수가 패배했다는 이야기만 나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이 위기론을 들고 일어섰다. 다행히도 국내 선수들은 그때마다 최종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내놓으면서 이 불안한 이미지를 종식시켜 왔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한국을 제외한 해외 팀들이 점차 여러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강호로 지목되던 중국이나 대만 같은 국가가 아닌 유럽과 북미 등의 서구권 팀과 선수들이 예전과 다른 기량으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작년 말부터 굴러온 서양 팀의 스노우 볼
서구권 e스포츠 팀들의 강해진 기량을 볼 수 있었던 단적인 사례로는 이번 전반기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 세계대회인 '2019 미드 시즌 인비테이셔널(이하 MSI)'을 꼽을 수 있다. 절정의 기량을 자랑하던 한국의 SKT T1과 작년 롤드컵 우승팀인 중국의 IG가 나란 유럽팀 G2 e스포츠와 북미 팀 리퀴드에게 패배해 4강에서 탈락하는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이 당시 팀 리퀴드는 작년 롤드컵 우승팀이자 조별 예선에서 9승 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자랑하던 IG를 상대로 세트 스코어 3대 1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차지했다. G2 e스포츠 역시 공격적인 라인전 전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탑 파이크 기용이라는 변칙적인 전략을 통해 롤 e스포츠 판에 대격변을 일궈냈다.
이 같은 이변은 최근 개최된 '플레이어언노운스 배틀그라운드(이해 배틀그라운드)' 국가 대항전인 '2019 펍지 네이션스 컵'에서도 일어났다. 1, 2일차에서 압도적인 포인트로 1위를 유지하던 한국팀이 마지막 날, 러시아팀의 추격을 떨쳐내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3일차에 순위와 킬 경쟁의 압박에도 주눅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교전을 벌이며 킬포인트에서 한국을 앞서 나갔고,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막판에 보여준 러시아 팀의 과감함에 한국이 압도당한 형세였다.
3년 연속 월드컵 우승이란 금자탑을 쌓아 올리고 있는 '오버워치'에서도 서구권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정규시즌 3라운드까지만 해도 한국 선수들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던 '오버워치 리그'가 222 역할 군 고정이 도입되자 마자 서양권 선수들의 활약으로 도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로스터 전반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팀이 매번 상위권에 위치했으나, 룰이 변경되면서 서양권 선수 위주의 팀이 상위권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10명의 선수 중 7명이 비 한국인 선수인 애틀랜타 레인과 주전 6명 중 4명이 서양 선수인 샌프란시스코 쇼크의 압도적인 성적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워싱턴 저스티스 소속 미국인 선수 '코리'는 남다른 에임과 센스로 게임을 터뜨리고 다닐 정도다.
이 밖에도 지난 15일, '스타크래프트 2(이하 스타2)'의 진정한 세계대회라고 볼 수 있는 'GSL vs the World 2019'에서는 한국에서 개최되는 '스타2'대회 최초로 한국인이 아닌 서양 선수들 간의 결승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e스포츠가 진행된 거의 모든 글로벌 인기 종목에서 서구권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적극적인 자본 활용, 메타 적응
도대체 작년과 올해에 걸쳐 어떤 변화가 있었길래 서양 팀들과 선수들이 남다른 기량을 갖게 된 것일까? 일단 '롤'을 필두로 북미 및 유럽 지역 e스포츠에 프랜차이즈를 앞세운 자본이 투입된 것이 이 같은 변화를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서양쪽에는 스폰서를 마련한 팀도 많지 않았고 그만큼 경쟁 구도도 활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계 각층의 투자자들이 e스포츠에 뛰어들면서 자본이 유입, 내부 경쟁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부 경쟁을 통해 서구권 e스포츠는 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루었다. 좀 더 체계화된 리그들이 다수 생겨나고 선수 대우도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서 투자자를 모집한 '오버워치 리그'가 그 대표적인 예다. 당시 '오버워치 리그'는 출범 전부터 선수 계약에 대한 표준적인 기준을 만들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었다. 덕분에 그 동안 음지에서만 활동하던 플레이어들이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며,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북미나 유럽지역 특성상 효율적으로 선수를 선발하고 관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두 번째로는 자본을 이용해 경험이 많은 국내 선수들과 코치를 적극적으로 영입한 것이 성적에 영향을 줬다. 충분한 자본이 생기자 각 e스포츠 팀들은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앞다투어 선수와 코칭 스태프를 영입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 선수 출신 코칭 스태프가 다수 외국으로 이적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유튜버들도 테스트를 통해 코치로 영입했다. 분명 서양 선수 위주의 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지도자 및 영어를 활용할 수 있는 한국 선수들을 팀에 섞어서 전력을 끌어올린 팀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구권 팀이 게임 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메타 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는 점이다. 항상 메타를 주도했던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서구권 팀들은 기존 메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전략을 계속 분석할 수 밖에 없었다. 개인 기량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이미 최상위권에 군림한 한국과 중국팀을 이겨낼 수 없었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전략, 허를 찌르는 픽을 구상해왔고, 위에서 언급한 자본과 인력 도입으로 인해 그 성과가 마침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롤의 경우 한국 팀들은 하나같이 안정을 추구하며 운영에 집중했던 반면 북미 팀들은 창의적인 밴픽을 위시한 공격적인 라인전, 한타 위주의 조합에 집중했다. 이 같은 경향은 지난 MSI에서 북미와 유럽이 선보인 이후 아예 주류가 되어서 현 LCK에서도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략이다.
'배틀그라운드'도 마찬가지다. 매 경기마다 외곽을 깎아나가는 전략을 사용하던 한국과 달리 러시아는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과감한 돌파와 여러 번에 걸쳐 승부수를 걸치며 많은 포인트를 따갔다. '오버워치' 또한 초반부터 로스터를 3탱 3힐 위주로만 구성했던 한국 위주 팀과는 달리 강력한 딜러 및 여러 영웅 폭을 소화 가능한 탱힐 진을 구성했던 서양팀이 시즌 막판에 강세를 보이고 있다. 서양팀과 선수들이 한국보다 현재 메타에 어울리는 효율적인 전략을 예견하고 대비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 도전자로서 변화 추구해야 할 시기
e스포츠 전반에 걸쳐 보면 이 같은 서구권 팀들의 강세는 환영할 만하다. 각 권역별 경쟁이 심화될 수록 e스포츠 판은 더욱 커지고 단단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 e스포츠는 근대 스포츠의 권위를 빌리지 않아도 많은 투자자들이 모이고 있으며, 점차 커지는 자본을 통해 매년 더 나은 성과를 내고 있다.
물론 이런 서구권의 강세 속에서 우리나라가 종주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수반돼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변화다. 서구 팀의 강세 속에서 축적해온 패배를 경험치 삼아 한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지금까지 갖춰놓았던 시스템과 실력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아닌 만큼 좀 더 거시적 차원에서 한국 e스포츠의 전반적인 질적 상승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