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는 훌륭했으나 구현에서 완벽하지 않은(피파 2004)
2003.11.08 10:00게임메카 원병우
1994년 ‘피파 인터내셔널 사커’가 출시된 이후 PC용 축구게임에서의 'EA 피파'의 위치는 거의 독보적이다. 10년 가까이 여러 축구게임이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대부분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갔고 피파 혼자 남아서 독야청청하고 있다. 그러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 ‘최고의 퀄리티를 보장한다’는 말이 될 수 없듯이 그동안 피파는 끝없이 게임성 논란에 휘둘려 왔으며 특히 위닝매니아들에게는 거의 조롱에 가까운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사실 위닝이 더 사실적이네, 피파가 더 사실적이네 하는 논쟁은 발더스가 더 실생활적이네, 디아블로가 더 실생활적이네 하는 말처럼 아무런 부질없는 짓이다. 까놓고 이야기 하자면 위닝과 피파 둘 다 그다지 사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축구게임이라면 그에 합당한 게임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닝팬들 뿐 아니라 피파를 사랑하는 피파게이머들도 마찬가지였다. 1년에 한번씩 꼬박꼬박 게임을 출시하면서 “이번만큼은 다르다”라고 공수표를 남발해왔던(-_-;) EA스포츠는 자존심을 버리고 대놓고 “위닝을 벤치마킹하겠다”고 나섰고 ‘패스&러쉬’, ‘킥&런’, ‘런&슛’으로 대변되는 전형적인 아케이드 패턴을 과감하게 탈피하겠다고 공언했다. 과연 피파 2004에서 그 약속은 지켜졌는가?
▶ 피파 2004에도 '얼굴 뜯어붙이기 신공'이 발출돼 그래픽적으로는 나무랄데가 없는 게임이다 |
▶ 프리메라리가, 세리에A, 프리미어리그, 분데스리가 등 세계 유명 축구리그의 축구팀을 플레이해볼 수 있다 |
피파의 게임성을 심각하게 경멸하는 사람들조차도 피파의 그래픽이 나날이 환상적으로 발전하는 것에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는다. 피파 96에서 처음 3D를 시도하고 98부터 본격적인 3D를 선보였던 피파시리즈는 ‘피파 2000’ 같은 사생아(그래픽적인 면에서)를 낳기도 했지만 하드웨어와 개발툴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고 EA 특유의 페이스 오프(Face-off: 얼굴을 뜯어다가 게임에 붙인듯한)가 합쳐져 그래픽적으로는 별로 나무랄 데가 없는 게임이 되었다. 1280*1024*32 해상도에서의 경기장면은 한정된 해상도를 가지고 있는 TV에서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최상의 그래픽이다. 또 수퍼스타의 얼굴을 제외하고는 ‘그놈이 그놈’인 단점이 있지만 선수들의 얼굴묘사도 뛰어난 편이고 챔피언스 리그에 나갈만큼 지명도가 있는 팀의 선수들은 대부분 얼굴이 제대로 묘사되어 있어 현실감을 높이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모션캡처 역시 마찬가지다. 향상된 모션캡처 기법을(혹은 장비를) 썼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이전 시리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어깨 높이로 날아가는 볼을 발로 키핑한다거나 수비수를 등지고 몸싸움을 하는 장면, 코너킥 시 골 에어리어에서 수비수들과 거친 몸싸움을 하는 장면 등 새로운 볼거리가 상당히 늘어났다. 동료선수가 골을 성공시켰을 때 주먹을 불끈 쥔다든가 하는 것도 전편에서는 없던 모습이다.
포메이션 측면에서 피파 2004는 전작에 비해 칭찬을 받을 소지가 아주 많이 있는 게임이다. 공격시 상대편 수비수들의 배치를 유심히 보자. 예전처럼 어정쩡한 4백이나 3백을 쓰다가 킬 패스 한 번에 골키퍼와 1:1 단독찬스를 주는 모습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공격수가 패널티 박스 안으로 진입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밀집수비 형태를 보여주며 이 때문에 수비수들을 정면에 놓고 어정쩡하게 날리는 슛은 80~90% 이상 수비수들을 맞고 튕겨 나온다. 또 공격시에는 자동적으로 공격수가 사이드 라인을 파고 들다가 다시 볼을 받으러 오는 모습과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수비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초보단계이기는 하지만 좀 더 발전된다면 아주 괜찮은 포메이션을 가진 게임이 되리라 믿는다.
▶ 완벽하지는 않지만 공.수 포메이션에는 많은 발전이 있다 |
▶ 프리킥과 중거리슛의 성공률이 지나치게 높은 것을 제외하고는 골 밸런스도 전작에 비해 나아졌다 |
중거리슛과 프리킥의 골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점수 밸런스도 나쁘지 않다(프로 난이도 기준). 개인적인 실력편차를 인정하더라도 예전처럼 농구스코어를 낼 수 있을 정도로 ‘깨는’ 수준은 아니다. 찬찬히 뜯어보자면 골키퍼 앞으로 돌진하는 공격수의 움직임에 약간의 핸디캡을 적용한 것과 몸싸움으로 인해 헤딩슛의 성공률을 크게 낮춘 것, 킬 쓰루패스의 성공률을 크게 낮춘 것에 기인한 것이지만 피파는 이렇게 인위적으로라도 골의 확률을 줄일 필요가 있는 게임이다. 실제로 EA스포츠온라인(이하 EASO)에서 멀티 플레이를 하면 대부분 2~3골 내에서 승부가 가려지게 되는 것을 볼 때 게임밸런스는 확실하게 향상된 것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문제의 오프 더 볼 컨트롤 시스템(Off the ball control system: 이하 오프 컨트롤 시스템)을 살펴보자. 오프 컨트롤 시스템은 피파 2004에서 너무나도 쉽게 구현되어 대대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있는 기능인데 개인적으로 이 시스템이 제대로만 구현되었다면 축구게임의 전반적인 트렌드를 바꿀만한 아주 멋진 기능이 될 뻔 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2명의 선수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은 아케이드적으로나 시뮬레이션적으로나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스포츠게임도 한단계 발전시킬 수 있는 멋진 개념이다. 볼을 가진 선수만이 아니라 볼을 안 가진 선수를 컨트롤 한다는 것은 거기에서 파생되는 전술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PC용 피파 2004에서는 이 기능이 그다지 위력적으로 구현된 것 같지는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조작키에 있다. [SHIFT+방향키]로 이루어지는 오프 컨트롤 시스템은 볼을 가진 선수와 볼을 받을 선수가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기본적으로 콘솔게임기용 인터페이스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PC용 피파 2004에는 있지도 않은 오른쪽 아날로그 스틱을 움직이라는 문구가 나오기도 한다).
▶ 아이디어는 좋으나 키보드 사용자에게는 거의 무용지물에 가까운 오프 더 볼 컨트롤 시스템 |
▶ 동시에 2명의 선수를 컨트롤한다기 보다는 약간 향상된 패싱 시스템이 되고 말았다. |
볼을 가진 선수를 움직이면 오프 플레이어가 멍청하게 서있고 오프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움직이면 볼을 가진 선수가 제자리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좌우 아날로그 스틱을 쓰는 PS2나 Xbox용 피파 2004라면 이런 문제 해결이 가능하지만 키보드나 일반 조이패드를 쓰는 게이머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 기능이다. 오프 컨트롤을 시도하는 순간 수비의 강력한 압박에 볼을 빼앗기기 십상이다. 결과적으로 키보드를 사용하는 PC게이머들에게는 환상적인 컨트롤 시스템이 아니라 약간 나아진 패싱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구현이 어렵다고 해서 버리기에는 아쉬운 기능이며 다음 버전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세련된 구현이 있으리라 믿는다.
오프 컨트롤 시스템이 개념은 좋았으나 구현이 엉성했다면 EASO에서의 통합 멀티플레이는 어떤가? 최종 베타버전까지 있던 네트워크 플레이(LAN)모드까지 없애면서 필사적으로 정품 구매를 유도했던 EASO 접속기능은 NFL, NHL 등 다른 게임과의 통합적인 성적관리는 물론 클럽모드의 제공으로 커뮤니티기능과 매치업기능을 적절히 혼합했다. 물론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처럼 방대한 대전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게임을 즐기는 데는 별로 불편함이 없다. 가장 좋은 점은 역시 사용자가 신경써야 할 부분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클럽을 만들어 리그전을 펼치는 것도 클릭 몇번이면 가능하고 메신저와 커리어를 관리하는 것도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간편하다.
하지만 서버의 느려터진 속도와 불안정한 접속은 아무래도 개선의 손길이 필요하다. 퀵매치업은 그다지 ‘퀵’하지 않으며 EASO 자체에서 빠른 핑으로 정렬을 해주는 기능이 없기 때문에 재수가 없으면 2,000ms을 훌쩍 넘기는 모뎀수준의 대역폭과 대전을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 EASO에서의 멀티플레이는 간편하기는 하나 빠른 핑과의 선택 플레이가 불가능하다. |
▶ 1.11 패치를 하고 나면 네트워크 플레이와 TCP/IP 플레이를 할 수 있다 |
게임자체의 버그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골을 넣고 리플레이 화면에서 상대편과 우리편의 골대를 혼동한다든가, 볼의 소유권이 애매해지는 루스볼 상황일 때 우리 측 선수를 전혀 컨트롤할 수 없는 스톨(Stall) 상태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전 버전부터 있던 버그였는데 아직 고쳐지지 않은 점은 아쉽다. 골 포스트와 가까운 곳에서 프리킥을 얻었을 때 직접슛을 제외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고쳐져야 할 점이며 민족의 역사적 울분을 대리해소하는데 크게 기여한(?) 일본이 라이센스 문제로 빠진 것도 아쉽다.
이런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피파 2004는 지금까지의 ‘아케이드 피파’에서 ‘스포츠 피파’로 전환하는 기념비적인(동시에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누구라도 이전의 피파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변했지만 피파 고유의 색채를 잃지 않았고 거기에 남의 장점을 받아들여 더 좋은 게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히 보이는 게임이다. 특히 커리어 모드의 추가로 약간의 경영시뮬레이션적 요소를 집어넣은 것과 단순한 시간 때우기용 게임에서 탈피해 반복적인 플레이를 가능하게 한 점도 높게 사고 싶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피파시리즈가 넘버원 셀링 게임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퀄리티를 피파 2004에서 보강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까놓고 말해 3만 5천원을 지불하고 기꺼이 구입할 가치가 있느냐) 80% 정도는 확실하게 그렇다고 답하고 싶다. 차후버전에서 나머지 20%가 마저 채워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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