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입액션의 진수를 맛보고 싶은가?(씨프 3: 데들리 섀도우)
2004.06.02 12:33게임메카 윤주홍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암흑의 밤. 온통 검은색의 옷과 장비로 무장한 한 사내가 시계탑의 벽을 탄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시계탑 꼭대기에서 잡담을 나누던 경비병들의 대화가 끝나자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다시 벽을 타는 사내. 마치 경비병의 그림자가 된 듯 그의 뒤에 슬며시 다가간 사내는 블랙잭을 꺼내 목 뒤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실신한 경비병을 암흑 속에 숨겨두고 탑의 내부로 침입한 그는 벽 곳곳 마다 꽂혀 있는 횃불을 향해 물의 속성을 지닌 화살을 날린다. 사방이 암흑으로 변한 건물 안에서 당황하는 경비병들 사이로 연막탄을 터뜨린 사내는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아 주위를 둘러본다. 순간의 찰나 속 도둑장비를 꺼내 비밀금고를 연 그는 쳐다만 봐도 눈이 멀어버릴 듯한 희대의 보물을 손에 쥔다. “배에 기름만 찬 형편없는 녀석들…”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경비병들에게 비웃음의 눈빛을 보낸 사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
그의 이름은 개럿. 단순히 부를 위해 훔치는 것이 아닌, 도적이 발휘할 수 있는 극한의 능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그의 모험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진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1998년 말 첫 선을 보인 씨프(Thief: The Dark Project)는 메탈기어 솔리드의 출연 이후 마치 금단의 영역으로만 여겨져 왔던 잠입액션게임이라는 장르에서 커다란 획을 그은 작품으로 도래했다. 액션게임 하나하나가 모두 기술의 발전을 등에 업고 번듯한 외양과 현란한 액션만을 추구하고 있을 때, 씨프는 잠입과 은닉 그리고 훔치기라는 도적의 진정한 로망을 추구하며 동종의 장르와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롤플레잉게임에서 파티의 일원으로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던 도적이 1인칭액션게임이라는 장르에서 등장한 사건은 당시의 게이머들에겐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표적도 없이 흔들거리는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광경을 비롯 경비병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수분동안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주인공 개럿의 모습은 닥치는 대로 쏘고 파괴하는 액션에 익숙한 게이머들에겐 왠지 범접하기 힘든 카리스마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울티마 언더월드를 시작으로 시스템쇼크, 바이오포지, 테라노바에 이르기까지 금단의 영역만을 개척해온 루킹글래스의 또 다른 역작 씨프는 2편인 메탈에이지(Thief: Metal Age) 발매 이후 개발사의 파산으로 새로운 둥지인 이온스톰에서 세 번째 작품이 준비되어 왔다.
1, 2편의 역경을 헤치고 나온 개럿. 지금의 게이머에게는 스플린터 셀의 ‘샘 피셔’나 메탈기어솔리드의 ‘솔리드 스네이크’가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지만 씨프의 개럿을 제외하고 잠입액션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극한의 난이도에 도전장을 내미는 게이머들을 위해 애꾸눈 개럿이 또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씨프는 중세의 도적을 그리고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지만 세계관은 그 시대와는 다른, 색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판타지의 느낌을 풍기고 있으면서도 산업혁명시대의 기계문명을 다루고 있는 씨프의 세계관은 얼핏 황당스러운 이야기로 들리기도 하나 나름대로 치밀한 시나리오를 그려낸다.
게임 속 세계엔 질서와 창조의 신 ‘빌더’와 파괴와 혼동의 신 ‘트릭스터’라는 두 개의 종파가 존재한다. 빌더를 모시는 일족은 일명 해머로 불리는 사람들로 기계와 인조적인 것만 추구하며 약육강식과 자연을 숭배하는 페이건은 트릭스터를 모시고 있다. 이 가운데 철저히 중립을 지키고 있는 조직이 바로 키퍼로서 이들은 이미 정해진 예언서를 받들어 지식만을 추구한다. 실제로 존재 했을런지는 모를 일이지만 기독교나 여러 종교의 한 분파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주인공 개럿은 소년시절 시장바닥에서 이 키퍼의 일원으로부터 소매치기를 감행하다 붙잡히게 되는 것으로 진정한(?) 도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
키퍼의 수많은 지식을 전수받던 개럿은 아무런 욕심도, 목적도 없이 오직 순수한 지식만을 추구하는 키퍼의 생활에 염증을 느껴 조직을 뛰쳐나와 홀홀단신으로 도적으로의 삶을 살게 된다.
씨프의 1편은 이처럼 개럿이 키퍼를 나와 자신만의 길을 찾기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해머와 페이건 사이에서의 혈투 그리고 키퍼의 가르침 속에서 자아를 찾아나가는 스토리가 바로 1편과 2편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대개의 시리즈가 그랬듯 종국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개럿이 손발 벗고 나선다는 이야기가 3편을 이루고 있다. 액션게임이라는 카테고리에서 새삼스레 세계관을 강조하는 이유는 게임을 이루는 스토리라인의 이해 없이 씨프를 즐기는 것 자체가 재미를 상당히 감소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
게임은 정해진 목표에 따라 개럿이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행되긴 하나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 쓰다만 일기장을 비롯 NPC들의 대화내용에서도 단서를 찾아내야만 원활한 플레이가 가능하다.
▶ 엿들은 내용 중 중요한 사항은 노트에 기록된다 |
이전 시리즈를 즐겨보지 못한 게이머들을 위해 씨프의 게임진행방식을 소개하자면 ‘정해진 목표의 물건을 훔쳐 안전하게 달아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물론 미션 하나하나마다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게임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훔치기’다.
개럿은 철저히 빛과 어둠 그리고 소리라는 세 가지 주의사항에 입각해 움직여야만 한다. 스플린터 셀이 씨프 1편을 참조해 만든 그것처럼 빛의 밝기에 따라 화면 하단엔 ‘빛 게이지’가 나타나며 빛깔이 어두워질수록 개럿은 경비병의 눈에 띄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에 존재하는 횃불이나 양초의 불꽃은 반드시 끈 상태로 움직이는 것이 씨프의 가장 핵심적인 플레이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주위의 경비병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는 소리에도 역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달리기와 걷기, 그리고 살금살금 걷기까지 총 세 가지 종류(벽에 기대고 이동하기나 앉아서 이동하기 역시 살금살금 걷기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의 이동모드는 속도가 소리의 크기에 비례한다. 경비병은 항상 한곳에만 지키고 서 있는게 아니므로 무조건 살금살금 걷는 게 능사라고 볼 순 없다.
▶ 적의 등 뒤로 얼마나 조용히, 신속하게 다가서는가가 관건이다 |
1편 발매 당시 유수의 언론에서 사운드 관련 상을 휩쓴 경력답게 3편도 만만찮은 청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니 그보다는 청각적인 공포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림자 속에 숨죽인 개럿의 벽 뒤쪽으로 지나다니는 경비병들의 발자국 소리는 화이트데이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공포감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비병의 눈에 띄지 않고 정해진 목표물로 이동, 물건을 훔쳐내는 것이 씨프 제 1의 목표다. 도적이라면 모름지기 경비병의 눈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불가피한 경우에는 등 뒤로 다가가 기절시키거나 소음화살(Noise Maker Arrow)을 이용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한다. 불가피한 경우에는 적을 죽여야만 하나 기절을 시켰든 죽였든 간에 시체를 NPC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옮겨놓는 것은 기본상식이다.
3편 역시 이처럼 1, 2편의 플레이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된다. 가장 큰 변화는 주인공의 손과 발을 게이머가 직접 볼 수 있다는 것(3인칭 시점 역시 지원한다) 그리고 목표는 한가지이지만 자유분방한 플레이가 가능한 시스템을 들 수 있다.
자유분방한 플레이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각 종파의 반응이 달라지는 팩션(Faction) 시스템이다. 가령 기계를 숭배하는 해머종파를 위해 철을 갉아먹는 벌레를 처치해주면 해당 종파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유히 걸어 다닐 수 있다는게 그것인데, 페이건 사람들이 시키는(특정 조각상을 없애 달라는 요청) 일을 해도 해당 종파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미션 수행 중에도 정해진 길만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 나름대로 자유로운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씨프 3의 플레이 방식에 근거하고 있는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씨프 3에서 개럿은 미션목표의 순서에 아랑곳 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으며 훔쳐둔 장물을 팔아 언제든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수도 있다. 구입한 물건은 미션을 넘겨도 그대로 유지되며 맵을 돌아다니는 곳곳에도 숨겨져 있다. 물건을 훔칠 때마다 해당 스테이지에 남은 보물의 량이 퍼센트로 표시되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자유분방한 플레이욕구를 더욱 자극시키고 있기도 하다.
▶ 처음엔 다소 헷갈리지만 몇 번만 성공하면 식은 죽 먹기 |
씨프만의 특징적인 요소였던 자물쇠 따기는 보다 현실적인 모습으로 발전됐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순히 마우스를 소리나는 방향의 가장 자리로 움직이고 키보드의 W, A, S, D와 마우스 왼쪽버튼을 난타하는 것만으로도, 불과 1분이면 모든 자물쇠를 따버릴 수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전의 시리즈에서 마치 도적의 로망으로만 느껴졌던 로프 화살이 사라졌다는 점은 아쉬움을 자아낸다. 로프 화살이 밸런스를 다소 망치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사실이고 이를 대신하여 벽을 타는 장갑이 등장하긴 했으나 두 가지 아이템이 동시에 등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듯 하다.
2편 발매 이후 긴 공백기간과 기술적인 발전에 힘입어 그래픽효과 역시 상당한 업그레이드를 이루었다. 씨프의 특징을 아우르고 있는 그림자가 이 그래픽적인 발전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창틀로 스며들어오는 달빛을 비롯해 술렁술렁 타들어가는 횃불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그림자까지 마치 최신 그래픽엔진을 테스트하기 위한 데모플레이를 보는 느낌을 준다. 이는 [V]키를 눌러 선택이 가능한 3인칭 시점의 화면에서 진면목을 맛볼 수 있는 부분이다.
현실적인 물리효과 역시 게이머를 즐겁게 해주는 시각적인 발전이다. 탑처럼 쌓여진 상자 위의 포션을 획득하기 위해 아래에 있는 상자를 밀어 무너뜨리는 광경이나 드럼통이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모습, 화살에 맞은 적이 담 너머로 넘어가는 장면까지 어느 하나 같을 것 없는 물리효과는 전작들과 색다른 느낌을 주는 특징적인 요소 중의 하나다. 언리얼 웨페어 엔진으로 제작된 일부의 액션게임이 그렇듯 시체가 약간 이상한 모양(?)으로 휘는 장면이 거슬리긴 하나 눈살을 찌뿌릴 정도는 아니다.
기존의 씨프 팬들에게 아쉬운 일이겠지만 전체적인 게임 난이도는 1, 2편에 비해 비교적 쉬워진 편이다. 이는 Xbox로도 출시된 씨프의 특성상 대중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단순히 난이도가 쉬워졌다는 이유만으로 게임이 평가절하 된다기보다는 이전의 시리즈에 비해 떨어지는 요소가 눈에 띄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점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전체적으로 NPC들의 인공지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가장 어두운 그림자에 숨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1센치미터 앞에서도 개럿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비병, NPC들의 모두 다리가 짧아진 이유에서인지 주인공을 얼마 쫓아오지도 못하고 어리버리한 모습을 연출하는 광경은 훌륭했던 전작들의 인공지능이 현저하게 떨어진 느낌마저 들게 한다. 게임에 조금만 익숙해진다면 앉아서 이동하기만해도 자유분방하게 적을 사이를 헤집고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난이도는 상당한 수준으로 낮아졌다.
사양최적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다. 그래픽 부분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점은 인정하나 퀄리티에 비해 사양이 꽤 높게 작용한다는 점은 라이트게이머를 공략하기에 악재로 작용하는 요소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지포스2는 ?물론 보급형 그래픽카드인 지포스4 MX 시리즈에서 플레이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이 그 대표적인 예. 사양문제로 많은 탈을 겪었던 데이어스 엑스 2를 연상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진정한 잠입액션을 찾는다면…
요즘
신세대 게이머들은 너무 단순하고 즉흥적인 액션게임만 즐기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것은 취향 차이며 게임마다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비난할만한
점이 못되는 것은 사실이나 씨프처럼 독자적인 방향을 추구하는 게임이 장수하고
또 다른 개척자가 나오기 위해선 다양한 장르가 균형있는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
개발사가 중간에 바뀌었던 만큼 이전의 팬들에겐 실망스러운 부분이 여럿 눈에 띄긴 하나 씨프 3 역시 전작의 명성을 이을만한 잠입액션의 진수를 선보이고 있다. 난이도 문제와 사양최적화 문제만 해결된다면 대중적인 성공도 예견될만한 씨프 3. 이 작품으로 잠입액션의 진정한 묘미를 선사한 시리즈의 대가 끊길지 그대로 이어질지는 모를 일이지만 게이머의 선택에 따라 대도 ‘개럿’의 생사기로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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