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가 멈추면, 당신은 탐정이 된다
2006.12.05 17:54게임메카 김지연
불타는 벽난로와 따뜻한 커피 한 잔. 여기에 추리소설 한 권이 더해지면 꼼짝하기 싫은 겨울밤도 금방 지나갈 것 같다. 벽난로가 무리라면 따뜻한 방안에서 컴퓨터를 켜고, 느긋이 추리게임을 즐겨보는 건 어떨까?
추리소설의 여왕이라 불리는 애거서 크리스티. 특히 밀실 살인이 특기인 그녀의 소설은 이미 한번 게임화 된 적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라는 고립된 섬에서 펼쳐지는 살인 게임을 다룬 소설이었다. 이번에 게임화 된 ‘오리엔트 특급열차 살인사건’ 역시 고립된 상황의 열차에서 벌어진 살인을 다룬 소설이다.
오리엔트 특급 열차는 터키, 이스탄불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운행하던 고급 열차이다. 당시 이스탄불에서 동양의 신비로움을 느껴보려던 서양의 부유층이 많이 이용했다. 식당차에서는 고급요리와 함께 은은한 실내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고급 재료를 사용한 호화로운 객차의 인테리어는 귀족들의 사교장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지금의 KTX같은 인기를 자랑했다.
여기에 등장하는 탐정 ‘에르큘 포와로(푸아로)’는 땅딸막한 체구에 멋진 콧수염을 기른 벨기에인이다. 코난이나 김전일 같은 만화 속 탐정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이 굴러갈 것 같은 체구와 녹색 고양이 눈을 가진 할아버지가 영 시원찮게만 보인다.
하지만 잘난 척을 좋아하는 포와로는 자칭 ‘세계 최고 명탐정’이다. 사람 무시하는 재주도 보통이 아니지만, ‘회색 뇌세포’라고 자랑하는 머리를 사용해, 앉아서 해결하는 두뇌수사가 특기다.
고립된 열차에서 살인 사건 발생!
쏟아지는 폭설에 갑자기 멈춰버린 오리엔트 특급. 여기에는 다양한 계층의 13명의 사람들과 에르큘 포와로라는 탐정이 타고 있었다.
여행을 즐기는 포와로에게 어떤 남자가 접근한다.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 남자는 포와로에게 자신을 지켜주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여러 번 제안한다. 하지만 잘난척쟁이 포와로는 “당신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는 이유로 멋지게 거절한다.
밤이 지나고 열차는 폭설 때문에 멈춘다. 그리고 누군가를 두려워하던 남자, ‘라쳇’은 자신의 방에서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됐다.
게임은 원작 소설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어드벤처 게임의 재미를 살리기 위해 새로운 캐릭터를 도입했다. 원작에서는 포와로의 친구이자 열차 회사의 직원으로 ‘부크’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소설에서 그는 포와로의 곁에 있지만 큰 활동은 하지 않고 잘못된 추측을 거듭할 뿐이다.
게임에서는 ‘앙트와네트 마르세이유’ 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한다. 플레이어는 그녀의 시선으로 게임 속 사건을 관찰할 수 있다. 그녀는 열차 회사의 직원으로 등장한다. 소설 속의 부크와는 달리 상당히 활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작품 내에서 큰 비중을 가진다. 포와로가 부상을 당한 후 포와로 대신 기차의 이곳저곳을 수색해 단서를 찾는다.
오리엔트 특급은 좁은 열차 안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루었기 때문에 장소의 이동이 많지 않다. 게임의 그래픽은 훌륭한 수준이지만 눈 내리는 배경이나 열차의 객실 등이 반복되면 조금 단조롭게 보일수도 있다. 그래도 원작 소설에 비해 열차 곳곳과 열차 바깥 부분으로의 이동이 많은 편이다. 앙트와네트는 고장 난 열차의 난방장치를 고치는 등 여러 가지 숨겨진 퍼즐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의 줄거리에 따라, 고립된 열차의 모든 승객은 용의자가 된다. 경찰도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라 앙트와네트는 한정된 장소와 물건을 이용해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 예를 들면 승객 전원의 지문을 채취한다거나, 물건에 묻은 지문을 채취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 필요한 도구를 찾기 위해서는 열차 안과 밖의 여러 장소를 꼼꼼히 찾아봐야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기는 물건도 있으므로 지나쳤던 장소라도 탐정처럼 꼼꼼한 눈으로 살펴보자.
원작과 다른 재미. 멀티 엔딩
원작이 있는 작품의 경우, 원작을 좋아하는 플레이어와 원작을 모르는 플레이어가 존재한다. 이 둘 모두를 만족시키는 게임이 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두 플레이어는 그 양상이 전혀 달라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오리엔탈 특급 살인은 원작의 팬보다는 모험적인 추리게임을 즐기고 싶은 팬에게 더 재미있는 게임이 다. 포와로가 척척 사건을 해결하는 원작과는 다른 여러 가지 멀티엔딩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모티브를 주기도 한 원작 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은 ‘복수 때문에 일어난 범행’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플레이의 재미를 위해 생략한다)
게임은 소설과 다르다. 후반에 밝혀지는 반전의 핵심. 복잡하게 얽힌 인물 간의 관계를 밝히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게임에 재미를 주기 위해서 앙투아네트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찾아낸 단서를 토대로 퍼즐을 푸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 이 퍼즐들은 이야기의 중요한 순간에 잘 배치되어 있어 앙투와네트(플레이어)의 비중은 크다. 포와로는 충고해주는 조연에 머물러 있다. 원작의 팬이라면 이 부분이 상당히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게임 속의 퍼즐은 꼼꼼하게 필요한 물건을 찾고, 조금만 생각해 응용한다면 어렵지 않다. 또 승객 중의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여러 의견을 수집하고 그것으로 새로운 결말을 예상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게임의 결말에도 반전은 있다. 하지만 원작의 반전과 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게임에서는 인물 간의 비극성에 좀 더 초점을 두어 여러 가지 결말을 만들어 냈다.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서 원작의 결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게임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단검으로 찔린 사체로 미루어 보아, 범인은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남자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앙투와네트(플레이어)가 열차 안에서 발견한 단서로 도구를 사용했다는 트릭을 증명해 낸다면, 포와로는 이것을 바탕으로 추리를 발표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범인과 동 떨어져 있는 늙고 힘없는 여자. ‘드래고미로프 공작부인’이 범인으로 끝나는 엔딩을 볼 수도 있다. 이 때 밝혀지는 부인의 동기는 새롭게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범인이 딸의 원수일수도 있고, 남편의 원수일수도 있다. 우리는 원작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예상치 못한 슬픈 사연을 만나볼 수 있다.
게임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은 소설의 팬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결말을 보여 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소설원작이 훌륭하기 때문에 게임의 반전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원작 팬들을 위해서 포와로 역의 목소리로 TV 드라마에서 평판이 좋았던 배우 ‘데이비드 서쳇’을 기용하였다. 또 표정 변화가 풍부한 그래픽으로 소설 속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게임 진행 중에 단순한 동작을 승객 수만큼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 게임의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
13명의 승객과 펼치는 두뇌 싸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 일까? 열차는 이미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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