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악당만 잡다 지쳐 쓰러진 ‘사무라이 쇼다운’
2019.06.06 08:58게임메카 이새벽
게임에서 스토리는 중요한 요소지만, 사실 장르에 따라 그 중요도는 조금씩 다르다. RPG나 어드벤처, 액션 게임 등은 스토리에서 재미를 찾도록 기획된 경우가 많지만, 리듬게임, 퍼즐, 비행슈팅 등 스토리와 무관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 장르도 분명 존재한다. 대전게임의 경우 스토리의 중요성이 비교적 덜한 편에 속한다. 스토리가 게임 분위기를 잡아주고 캐릭터를 돋보이게 해 주지만, 메인은 대전이기 때문에 딱히 스토리를 몰라도 재밌게 즐기는 유저가 많은 편이다.
아무리 대전 게임에서 스토리가 덜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좀 너무하다 싶은 게임이 하나 있다. 바로 1993년부터 이어진 SNK 장수 시리즈 ‘사무라이 쇼다운’이다. 굳이 너무하다는 표현까지 쓰는 이유는, 시리즈 스토리 대부분이 ‘사악한 힘에 오염된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전세계 검객이 일본에 모인다’는 내용을 계속 재탕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려 26년 동안이나 말이다.
‘사무라이 쇼다운’ ~ ‘사무라이 쇼다운 2’ - 악마와 계약한 기독교도 사무라이의 복수
1993년 출시된 ‘사무라이 쇼다운’은 간단한 조작과 무기를 사용한 한 방 액션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대전 게임이었다. 스토리는 실제 일본 역사에 바탕을 두었지만, 아무래도 첫 작품이다 보니 딱히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은 듯하다. 사실 스토리 외에도 메인이 되는 대전 콘텐츠 외에는 대체로 엉성했다. 해외 버전 제목도 ‘Samurai Shodown’이라 잘못 표기하는 등, 여러 모로 어색한 면이 많았으나 메인이 되는 칼부림 액션이 큰 호평을 받으며 이 같은 단점을 모두 덮은 사례다.
일단 ‘사무라이 쇼다운’ 스토리는 18세기 일본에서 실제 일어난 텐메이 대기근을 배경으로 한다. 텐메이 대기근은 1783년 아오모리 이와키산과 아사마산이 분화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난세가 찾아온 사건이다. ‘사무라이 쇼다운’은 이러한 실제 역사에 판타지를 가미했다. 그러나 사실 ‘난세’라는 점을 제외하면 실제 텐메이 대기근이 게임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은 꽤나 적다.
게임 내에서 텐메이 대기근보다 중요한 사건은 시마바라의 난이다. 시마바라의 난은 17세기 일본 카톨릭 신자들이 지나친 착취와 박해에 들고 일어나 반란으로 번진 사건이다. 이 반란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아마쿠사 시로는 결국 숙청되고 만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죽기 전 유언으로 ‘1세기 후 부활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아마쿠사 시로가 악마가 되어 돌아왔다는 것이 ‘사무라이 쇼다운’의 주된 스토리다.
증오심에 가득 찬 아마쿠사 시로의 원혼은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떠돌다 ‘암브로시아’라는 사악한 존재로부터 속삭임을 듣는다. 자신에게 봉사하면 복수할 힘을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이 계약에 응한 그는 부활에 성공하고,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기 위해 ‘암브로시아’를 지상에 강림시킬 음모를 꾸미게 된다. 그러나 ‘암브로시아’ 강림이 가까워짐에 따라 전세계에서 불길한 징조들이 포착되고, 영웅들이 일어나 재앙을 막기 위해 하나 둘 일본으로 모여든다.
결국 ‘사무라이 쇼다운’에서 아마쿠사 시로는 처단 당한다. 멀티 엔딩 시스템 탓에 어떤 캐릭터로 플레이 했는지에 따라 구체적인 엔딩은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공식 스토리에 따르면 아마쿠사 시로를 쓰러뜨린 것은 ‘하오마루’라는 사무라이였다. 그렇게 악마가 된 아마쿠사 시로가 쓰러지면서 일본 각지에서 벌어지던 혼란도 차츰 잦아드는 것으로 ‘사무라이 쇼다운’ 스토리는 마무리된다. 그러나 아마쿠사 시로는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었으니, 이야기는 ‘사무라이 쇼다운 2’로 이어진다.
1994년 출시된 ‘사무라이 쇼다운 2’는 전작이 예상을 뛰어넘은 판매를 보이자 이에 힘입어 제작된 후속작이다. 스토리 역시 자연히 전작에서 이어지는데, 악당이 바뀐 것을 제외하면 큰 흐름은 대동소이하다. 주된 내용은 아마쿠사 시로가 아닌 또다른 악의 하수인 ‘라쇼진 미즈키’가 다시 한 번 ‘암브로시아’ 강림을 획책하고, 영웅들이 모여 이를 저지한다는 것. 신규 캐릭터 추가, 캐릭터들 사이의 대화 등 볼거리는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전작과 같은 흐름을 이어간 셈이다.
‘사무라이 쇼다운’ 엔딩에서 악마가 된 아마쿠사 시로의 혼은 ‘하오마루’에게 절단 당해 선한 면과 악한 면으로 나뉘었다. ‘사무라이 쇼다운 2’에서는 고대부터 ‘암브로시아’의 화신으로 활동하던 마녀 ‘라쇼진 미즈키’가 이 선한 혼을 붙잡아 ‘암브로시아’를 강림시킬 계획을 꾸민다. 여기에 주인공 ‘하오마루’를 비롯한 캐릭터들에게 강림 의식에 필요한 고대 용사의 혼들이 있다는 뜬금 없는 설정이 새로 붙어, 악당 ‘라쇼진 미즈키’는 이를 모으기 위해 영웅들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사무라이 쇼다운 2’ 결말은 ‘라쇼진 미즈키’가 패배하고 암브로시아 강림에 실패하는 다소 뻔한 스토리로 귀결된다. 게다가 ‘사무라이 쇼다운 2’에서 인기 캐릭터였던 ‘나코루루’가 파괴된 자연을 되살리기 위해 스스로 희생해 사망한다는 엔딩 때문에 팬덤의 불만도 거셌다. 그 탓인지 1995년 발매되는 ‘사무라이 쇼다운 3’은 후속 스토리를 이어가는 대신 ‘나코루루’가 죽기 전 시기를 다룬 프리퀄로 제작돼 약간의 쇄신을 꾀했지만, 그리 큰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사무라이 쇼다운 3’ ~ ‘사무라이 쇼다운 4’ - 악당 바뀌나 했더니 다시 돌아온 아마쿠사
‘사무라이 쇼다운 3’은 ‘아마쿠사’와 ‘암브로시아’를 또 꺼내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약간의 변화를 줬다. 이에 ‘미나즈키 ‘잔쿠로’라는 새로운 악당이 등장하지만, 결국 ‘사무라이 쇼다운 4’에 이르러서는 ‘아마쿠사 시로’ 카드를 또 꺼낸다.
‘사무라이 쇼다운 3: 잔쿠로 무쌍검’은 부제 그대로 ‘미나즈키 잔쿠로’라는 미치광이가 악당으로 등장하는 스토리를 다룬다. 본디 ‘잔쿠로’는 아들과 함께 검술을 연마하던 자였으나, 강도를 만나 아들이 인질로 잡힌다. 여기서 강도와 아들을 한 번에 죽이며 정신이 나간 그는 아내를 비롯해 만나는 사람을 모두 도륙내며 돌아다니는 광기의 화신이 된다. 그를 막기 위해 영웅들이 모이고, 마침내 그를 쓰러뜨리게 된다는 줄거리다.
그렇게 변화를 꾀했지만, 마신과 악마 등이 등장하던 전작들에 비하면 다소 소박해(?) 보이는 내용은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996년 발매된 ‘사무라이 쇼다운 4: 아마쿠사 강림’은 다시 한 번 전통의 악당 악마 아마쿠사 시로를 내보냈다. 게임 내 시간상으로 따지면 ‘사무라이 쇼다운’ 다음에 ‘사무라이 쇼다운 3’ 사건이 발생했고, 그 다음 ‘사무라이 쇼다운 4’가 이어지며, 마지막이 ‘사무라이 쇼다운 2’였다는 것으로 정리된 셈이다.
‘사무라이 쇼다운 4: 아마쿠사 강림’은 처음 설정 이후 언급이 없던 악한 아마쿠사 시로의 조각이 등장한다. 3편 보스인 ‘미나즈키 잔쿠로’ 역시 아마쿠사 시로에 의해 부활했으나, 너무 강한 힘을 지닌 터라 통제가 어려워 봉인시켜 두었다는 설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이전 시리즈와 차별화되지 않는 전개였다. 대전 게임으로서는 콤보 시스템을 추가하는 등 진일보했지만, 스토리상으로는 별 발전이 없었다. 2편에서 벌어진 나코루루의 죽음을 해소하기 위해 스토리를 무리해서 앞으로 돌려 놨으니, 세계관 확장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사무라이 쇼다운’ 시리즈는 다양한 변주를 통해 스토리 정리 및 확장을 꾀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하이퍼 네오지오 64 아케이드 기기 사양으로 1997년에 출시된 ‘사무라이 쇼다운 64’는 다시 한 번 ‘사무라이 쇼다운 2’ 이후 시기를 다루며 스토리 확장을 시도했다. 여기서는 파괴신 강림을 획책하는 ‘유가’라는 새로운 흑막이 등장했으나, 안타깝게도 게임 자체가 열악한 3D 기술로 팬들에게 외면 받아 잊혀지며 흑역사로 남았다.
SNK는 그 외에도 ‘사무라이 쇼다운’, ‘사무라이 쇼다운 2’, ‘사무라이 쇼다운 3’ 스토리를 담은 RPG ‘사무라이 스피리츠 무사도열전’이나, 인기 캐릭터 ‘나코루루’의 개인 이야기를 다룬 어드벤처 게임 ‘나코루루 ~그 사람으로부터의 선물~’를 발매해 지속적으로 캐릭터와 스토리 확장을 꾀했다. 하지만 두 게임 모두 생소한 장르에 섣불리 도전한 탓인지 상업적 성공도 높은 인지도도 얻지 못했다.
‘사무라이 쇼다운 5’ ~ ‘사무라이 쇼다운 6’ – 마지막엔 포기했다, 에도 시대 미소녀 메이드 등장
‘사무라이 쇼다운’ IP가 침체에 접어든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SNK에게도 위기가 닥친 시기였다. ‘사무라이 쇼다운 64’ 처럼 3D로 넘어간 많은 게임이 저조한 실적을 거둔데다, 자사 IP를 활용한 테마파크 ‘네오지오 월드’를 개장했다 크게 실패하며 도산 위기를 겪은 것이다. 결국 SNK는 2001년 380억 엔 가량 부채를 안은 채 도산하고 말았다. 그에 따라 한동안 ‘사무라이 쇼다운’ IP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SNK는 도산하기 전 미리 다수의 IP를 플레이모어라는 계열사에 이관시켜 뒀고, 결국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모어는 2003년 다시 한 번 ‘사무라이 쇼다운’을 발매하게 된다. 바로 ‘사무라이 쇼다운 5’, 일본 내수명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로’다. 이름 그대로 시리즈 중 가장 앞선 시기를 다룬 이 게임은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 텐메이 대기근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활용했다. 어떻게 보면 시리즈 처음부터 병풍처럼 존재하던 설정을 최초로 활용한 셈이다.
‘사무라이 쇼다운 5’는 텐메이 대기근 시대 도탄에 빠진 백성의 절규에도 중앙정부가 결코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자, ‘쿄코쿠 히노와노카미 가오우’라는 다이묘가 반란을 일으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쿄코쿠 가오우’는 또 다른 악마적 존재 ‘암황’에게 빙의당한 상태로, 사악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결국 ‘사무라이 쇼다운 5’는 ‘쿄코쿠 가오우’가 패배한 후 정신을 차리거나 처단되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거대한 악에 타락한 인물이 난세를 틈타 음모를 꾸미고 ‘하오마루’를 위시한 캐릭터들이 이를 막는다는 큰 궤는 전작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여기에 캐릭터 설정과 엔딩에도 다소 무리수 전개가 연속돼 팬들의 논란을 사기도 했다. 이에 후속작인 ‘사무라이 쇼다운 5 스페셜’은 아예 공식 세계관에 포함되지 않는 내용의 대전에만 치중한 게임으로 제작됐고, 또한 그 뒤를 이어 나온 ‘사무라이 쇼다운 6’도 기존 시리즈를 잇는 스토리 대신 아예 은혜 갚기 위해 미소녀 메이드로 변신한 학이 나오는 등 아예 드림매치 게임으로 전개됐다.
사실 ‘사무라이 쇼다운’은 본래부터 진득한 스토리 전개와는 별 인연이 없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사무라이 쇼다운 6’의 변화는 너무 급진적이었다. 게임 분위기도 축제 분위기로 변해버렸고, 상징이었던 폭력성도 거의 없어진 데다 핵심이 되는 게임 시스템도 낯설게 변하며 팬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이후 ‘사무라이 쇼다운’은 몇 개의 외전이나 합본만 출시하며 2005년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긴 휴면에 들어가게 된다.
‘사무라이 쇼다운’, 신선한 리부트일까 이번에도 재탕일까?
그리고 2018년 10월, 갑작스럽게 ‘사무라이 쇼다운’ 신작 소식이 공개됐다. 2019년 새 ‘사무라이 쇼다운’이 출시된다는 이야기였다. 정식 시리즈 ‘사무라이 쇼다운 6’으로부터는 14년, 가장 최근 발매된 게임인 외전 ‘사무라이 쇼다운 센’부터 잡아도 11년만의 복귀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이번에 발매되는 ‘사무라이 쇼다운’이 정식 넘버링 대신 리부트 타이틀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이름부터 어떤 넘버링도 없이 ‘사무라이 쇼다운(Samurai Shodown)’이며, 오랜 세월 쌓인 내용을 정리하고 새로운 스토리가 전개된다. 사실 세계관을 계속 역행하면서 설정이 번복되고 꼬인 것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고, ‘리부트를 통한 오래된 IP의 부활’이 최근의 시류라는 점을 생각하면 꽤나 합리적인 결정인 듯 보인다.
하지만, 그간 역사를 짚어보면 ‘과연 이번에는 다를까’ 라는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다. 기존에도 ‘사무라이 쇼다운’은 천편일률적인 스토리만 이어왔고, 그 결과 나중에는 아예 공식 스토리와 무관한 논-카논(non-canon) 게임들로 시리즈 말미를 채우기까지 했다. 물론 ‘사무라이 쇼다운’에서 스토리는 거드는 역할일 뿐이라고 하지만, 리부트까지 하면서 똑같은 스토리를 반복한다면 리부트의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과련 오는 6월 27일 발매되는 새로운 ‘사무라이 쇼다운’은 어떤 이야기를 선보일까. 11년이라는 세월 만에 돌아온 ‘사무라이’의 변화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