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3에서 만난 PS VR, 신기하지만 ‘비싸고 피곤한’ 장난감
2016.06.17 18:24 게임메카 김영훈 기자
게임업계에서는 흔히 2016년을 가리켜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 기술) 원년’이라 한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오큘러스가 촉발시킨 게이밍 VR 붐이 드디어 결실을 맺는 해이기 때문이다. 오큘러스를 따라 대열에 합류한 주요 기기는 밸브 ‘바이브’와 소니 ‘PS VR’가 있으며, 삼성 ‘기어 VR’과 중국산 ‘폭풍마경’처럼 스마트폰 전용도 나름의 영역을 구축했다. 이 가운데 ‘오큘러스 리프트’가 ‘바이브’는 각각 3, 4월에 정식 출시되며 이제 ‘PS VR’만이 게이머둘과 만남을 기다리는 중이다.
소니는 이미 지난해부터 각종 국제 IT행사에 참가해 ‘PS VR’에 대한 정보를 조금씩 공개해왔다. 소니가 내세운 ‘PS VR’의 강점은 PS4 스펙만으로 유려한 VR 체험이 가능하고, 협력사를 총동원한 탄탄한 타이틀 라인업이 전개될 것이며, 무엇보다 경쟁기기보다 저렴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한 발 앞서 시장에 나선 ‘오큘러스 리프트’와 ‘바이브’가 높은 가격대로 혹평을 받은 것을 반면교사로 삼았으리라. 그리고 마침내 E3 2016 소니 컨퍼런스에서 ‘PS VR’의 정확한 가격대와 발매일이 공개됐다.
▲ 소니 컨퍼런스에 등장한 'PS VR', 399달러에 카메라 및 컨트롤러 별매
‘PS VR’은 오는 10월 13일 북미 기준으로 399달러(한화 약 47만 원)에 출시된다. 다만 5만 원 전후인 PS 카메라와 무브, 에임 컨트롤러 등 주변기기는 별도 판매된다. 국내는 소비자 가격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카메라만 챙긴다 해도 50만 원 이상을 투자해야 ‘PS VR’을 즐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저렴하다며 호언한 것치고는 살짝 부담스러운데, 그나마 타이틀 라인업은 나쁘지 않다. 이날 현장에서는 ‘배트맨: 아캄 VR’과 ‘파포인트’, ‘FF 15 VR’, ‘바이오하자드 7’ VR 데모 등이 공개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렇다면 과연 ‘PS VR’은 50만 원 이상을 쾌척할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일반적인 유저가 E3에서 이를 확인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VR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방증하듯 시연존에 줄이 백여 명씩 늘어서기 때문이다. 다행히 기자는 미디어와 VIP를 위한 특설 라운지를 통해 비교적 수월하게 ‘PS VR’를 다뤄볼 수 있었다. 지난 지스타에서 ‘섬머레슨’을 했고, 이번에는 ‘배트맨: 아캄 VR’, ‘파포인트’, ‘FF 15 VR’, ‘바이오하자드 7’ VR 데모를 체험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로써 ‘PS VR’은 제 값어치를 전혀 못한다. 거두절미하고 ‘구매를 보류하길’ 권한다.
▲ 이제까지 기자가 체험한 'PS VR' 타이틀, 왼쪽부터 섬머레슨, 파포인트,
배트맨: 아캄 VR, 파이널 판타지 15 VR, 바이오하자드 7 VR 데모(구 키친)
"우와~ '배트맨'에 '파이널 판타지'까지!?" 포장지 그럴싸한 미니게임 잔치
왜 ‘PS VR’은 제 값어치를 못할까? 단순 명료하게 즐길 거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50개에 달하는 화려한 론칭 타이틀을 보고도 어떻게 이런 소리를 하나 싶을 것이다. 그러나 소니가 열심히 포장한 50개 타이틀 가운데 미니게임 수준을 벗어나는 것은 반에 반도 안되며, 그나마도 뭇 게이머가 기대하는 AAA급 타이틀은 전무할 지경이다. 국내외 업계 종사자들은 VR로 제대로 된 AAA급 타이틀이 나오려면 2~3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보고 있다.
‘배트맨: 아캄’과 ‘FF 15’라니 보기엔 굉장히 좋아 보인다. 그러나 ‘배트맨: 아캄 VR’은 무브 컨트롤러를 이용해 배터랭과 갈고리 총을 여기저기 쏘며 노는 소품일 뿐이고, ‘FF 15 VR’은 아케이드장에 흔히 널린 건슈팅 게임에 ‘FF’ 스킨만 씌운 것이다. 그나마도 완성도도 상당히 조잡하고 말이다. 인기 IP와 스킨, 웅장한 사운드가 접목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이정도 VR 체험은 다른 기기에서 무료로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 게임들은 유료로 판매되며, 심지어 별도로 컨트롤러를 요구한다.
소니가 LA 컨벤션 센터에 대형 포스터를 설치할 정도로 밀고 있는 ‘파포인트’도 마찬가지다. VR로 즐기는 PvP용 FPS라는 아이디어는 훌륭하지만, 과도한 멀미와 피로감으로 오래 즐기기 어려운 게임이 됐다. 거기다 이런 장르는 멀티플레이 유저층 확보가 생명인데 ‘PS VR’에 에임 컨트롤러와 적당한 플레이 공간까지 갖춘 인원이 그렇게 많을까? 얼마 못 가 애물단지로 전락할 공산이 크다. 이는 비단 ‘파포인트’뿐 아니라 과도한 주변기기를 요구하는 모든 멀티플레이 게임에 숙명이다. 물론 ‘바이오하자드 7’이나 ‘에이스 컴뱃 7’ 등 튼실한 콘텐츠가 기대되는 작품도 있지만, ‘PS VR’ 전용 타이틀이 아니라 그저 ‘PS VR’로도 즐길 수 있는 게임일 뿐이다.
▲ 직접 배트맨이 되어볼 수 있다, 허우적거리며 배태랭이나 던지는 게 배트맨이라면...
냉정하게, 아직까지 게임만을 위한 비싼 VR기기는 시기 상조
정리하자면 ‘PS VR’ 자체만으로 PS4 한 대 가격인데, 여기에 각각 5만 원 상당의 PS 카메라와 여러 컨트롤러가 거의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아직 가격대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당연히 타이틀은 따로 구매해야 한다. 심지어 그 론칭 타이틀도 어느 정도 콘텐츠가 제공될지 미심쩍다. 평범한 콘솔이 이러한 조건으로 나왔다면 절대 팔리지 않겠지만, 신비로운 체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소비자를 유혹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행사장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잠깐 시연하는 것과 거금을 들여 집에 모셔두고 몇 주 동안 즐기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쯤에서 ‘이건 모든 VR기기에 해당되는 얘기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큘러스 리프트’와 ‘바이브’는 ‘PS VR’과는 비교도 안 되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VR이 가장 각광받는 분야는 게임이 아니라 영상물이다. 인터넷에 VR용으로 포팅된 각종 콘서트, 뉴스, 강의 등 무료 영상이 넘쳐흐른다. 여기에 세계 각지의 기술자들이 만들어 공유하는 각종 프로토타입 신기술도 곧바로 내려 받아 적용해볼 수 있다. 아, 기사에 적기는 조심스럽지만, 흔히 ‘우동’이라 불리는 성인 콘텐츠의 존재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
▲ 엄청난 관심을 받았던 부스, 민망하지만 이 또한 'PS VR'은 가질 수 없는 콘텐츠다
쉽게 말해 일반적인 VR기기는 VR을 위한 모든 콘텐츠를 즐길 수 있으나, ‘PS VR’은 그저 PS에서 제공하는 게임만 즐길 수 있다. 물론 PS4로 영상을 볼 수 있긴 하지만 누가 구태여... VR은 이제 막 태동한 시장이고 지금까지 구축된 것보다 앞으로 쌓아나갈 것이 훨씬 많다. ‘오큘러스 리프트’와 ‘바이브’는 이러한 변화에 ‘PS VR’보다 훨씬 빠르게 대응할 것이다. 기기의 업그레이드 사이클이 굉장히 짧은 하드웨어 시장과 달리 콘솔 시장은 상당히 경직돼 있다. 8.5세대 콘솔이 발표되었을 때의 엄청난 반발을 떠올려보라. ‘PS VR’은 한번 출시된 후에는 거의 변화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소니도 이러한 약점을 잘 알기에 론칭 타이틀에 인기 IP를 대거 투입해 즐길거리가 많은 것처럼 포장했다. 그러나 ‘배트맨’으로 하늘을 날고 도심을 가로지르며 악당의 엉덩이를 차주는 게임이 이미 있는데 무브 컨트롤러로 배터랭이나 던지는 게 어떻게 ‘차세대 게이밍’인가. 현재 VR게임에 핵심은 작품성이 아니라 체험 그 자체에 있다. 그리고 체험을 원한다면 굳이 수십 만원을 들여 집에 기기를 사놓을 필요가 없다. 그래도 VR시대에 뒤쳐지는 것이 싫다면 ‘오큘러스 리프트’나 ‘바이브’를 사면 된다. 몇 가지 괜찮은 게임과 그보다 훨씬 많은 다양한 분야의 VR 콘텐츠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PS VR’은 신기하지만 비싸고 피곤한 장난감일 뿐이다.
▲ 아직은 게임만을 위한 비싼 VR기기는 시기상조다, 확장성 있는 기기로 눈을 돌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