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인즈 게이트 0, '배드엔딩'이 주인공을 강하게 만든다
2016.07.04 13:42 게임메카 김헌상 기자
▲ '슈타인즈 게이트 0' 오프닝 (영상출처: 디지털터치 공식 유튜브)
2009년 일본 5pb와 니트로플러스가 제작한 비주얼 노벨 ‘슈타인즈 게이트’는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고 있다. 타임머신을 둘러싼 암투에 휘말린 주인공 ‘오카베 린타로’는 미래에 벌어질 전쟁을 막고, 소꿉친구 ‘시이나 마유리’와 천재 과학자 ‘마키세 크리스’를 구하기 위해 계속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오카베’는 누구도 죽지 않고 전쟁도 없는 미래를 찾아내는데 성공하며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 6년 만에 나온 정식 후속작 ‘슈타인즈 게이트 0’는 이러한 결말을 180도 뒤틀었다. ‘오카베’가 ‘크리스’ 구출을 포기하고 시간여행을 하지 않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즉, ‘슈타인즈 게이트’ 진 엔딩 직전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내는 셈이다. 전작이 복선을 잘 회수한 완결성이 높은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은 만큼, 스토리를 비틀었다는 시도는 상당히 독특하게 느껴진다. 과연 ‘슈타인즈 게이트 0’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 '슈타인즈 게이트 0' 대표 이미지
전작 장점 그대로 계승한 진행방식
‘슈타인즈 게이트 0’ 진행은 전작과 비슷하다. 기본적으로 ‘오카베’와 주변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을 접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여기에 다른 비주얼 노벨처럼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게임 도중 받는 문자 메시지에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 스토리 분기가 나뉜다.
여기에 시대상을 반영해 '오카베'가 사용하는 핸드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문자 메시지 대신 일본 현지에서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메신저 앱을 패러디한 '라인(RINE)'을 사용하고, AI와 대화할 수 있는 앱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기능이 추가됐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들이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라인’ 메시지나 AI ‘크리스’의 호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스토리 분기가 나뉘는 방식이 기본적으로 전작의 '문자 메시지'와 기능이 동일해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 대화 중 스마트폰으로 '라인'을 확인한다
▲ 때때로 AI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오기도...
여기에 지나간 대화 내용을 다시 볼 수 있는 '백 로그', 게임 중 등장하는 용어가 자세하게 설명되는 '팁' 등 수월한 진행을 돕는 시스템도 여전해 게임 진행에 어려움은 없다. 마지막으로 한국어화 수준도 뛰어나다. 과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일본의 인터넷 은어까지 한국에서 쓰이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러한 익숙한 시스템을 그대로 계승하며 이야기에 집중하기 쉬운 환경을 조성했다.
▲ 지나간 대화 내용을 확인하고...
▲ 모르는 단어는 '팁'에서 확인
좌절한 주인공 ‘오카베 린타로’
그렇다면 이번 타이틀에서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큰 변화는 주인공 '오카베'에 있다. 전작에서 광기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호오인 쿄우마'를 자처하던 '오카베'는 '마유리'가 죽지 않는 미래를 만든다는 확고한 목적을 지닌 능동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번 작에서 그는 ‘크리스’를 해치려는 ‘닥터 나카바치’를 막으려다 실수로 자신이 그녀를 칼로 찌르게 된다. 그 이후, ‘크리스’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큰 절망에 빠지고, '미래를 바꾸려 하면 재앙이 일어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크리스’를 구하지 못한 것은 고통스럽지만, 다른 친구들이 안전하니 괜찮다는 것이다. 문제는 전작을 해본 유저라면 ‘크리스’를 구하지 못할 경우 타임머신 기술을 두고 3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전자작을 해본 입장에서 '슈타인즈 게이트 0'에서 처음 느끼는 것은 답답함이다.
▲ 깊은 절망에 빠진 '오카베 린타로'
이러한 답답함을 해소해주는 주역은 다른 캐릭터다. 이번 작에서 처음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메인 스토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지만 일상 파트에서 숨돌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특히 대학생이지만 체구가 작아 중학생으로 오해받는 ‘히야죠 마호’나 ‘오카베’에게 짓궂은 농담을 건네는 ‘레스키넨 교수' 등이 강력한 존재감을 뽐낸다. 여기에 기존 등장하던 캐릭터들도 훗날 자신의 부모님이 될 ‘하시다 이타루’와 ‘아마네 유키’가 좀처럼 연인으로 발전하지 않아 전전긍긍하는 ‘아마네 스즈하’ 등 다양한 에피소드로 웃음을 자아낸다.
▲ '마호' 선배는 무척 귀엽다
▲ 어머니와 친해지지 못해 혼이 나는 아버지
여기에 다양한 캐릭터의 시점을 번갈아 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작은 ‘오카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어서 그가 모르는 것은 플레이어 역시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작에서는 다른 인물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 비중이 높아졌다. 예를 들어 ‘마호’를 통해 대학시절 ‘크리스’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볼 수 있고, 미래에서 찾아온 ‘스즈하’는 미래에 발생하는 사건을 알려주어 새로움을 더한다.
▲ '오카베'가 모르는 이야기도 알 수 있다
▲ '스즈하'가 알려주는 2036년의 사건
다시 말해 ‘슈타인즈 게이트 0’는 전작과 달리 ‘오카베 린타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등장인물의 시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외전 ‘선형구속의 페노그램’과 유사한 군상극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택하면서 전작에서 다소 의문으로 남았던 ‘오카베가 어떻게 절망을 극복하는지’를 납득할 수 있게 전달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직접 확인해야 재미있을 테니 언급하지 않겠지만 몇몇 엔딩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다.
▲ 아마 전작을 해봤던 사람이라면...
본편, 알면 좋지만 몰라도 안심
‘슈타인즈 게이트 0’는 익숙한 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해 플레이어가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여기에 개성적인 캐릭터와 함께 이들의 이야기들을 심도 있게 다루며 스토리 매력이 확 살아났다. 비주얼 노벨로서는 합격점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이야기 시작 지점이 전작의 진 엔딩 직전이라 사실 '슈타인즈 게이트'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전지식이 부족해 약간의 진입장벽을 느낄 수 있다. ‘슈타인즈 게이트’ 세계관은 ‘세계선’이나 ‘어트렉터 필드’ 등 다소 난해한 설정이 많다. 따라서 전작은 시간여행의 진실을 파헤치면서 이러한 개념을 하나하나 알아갔다. 하지만 이번 작에서는 이를 전부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가 시작된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가 사망하는 중요한 장면에서 시작되니 처음 접하는 사람으로서는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워 다소 몰입감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
▲ 사전 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도 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신입 유저의 이해를 돕기 위한 다양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게임 도입부에서 여러 장의 일러스트를 통해 ‘크리스’의 사망 경위를 말해주고, 최면치료를 받는 장면을 통해 ‘오카베’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초반부에 강조해서 알려준다. 여기에 시간 여행의 비중을 크게 줄여 관련 설정을 줄줄이 꿰고 있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야기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 다양한 일러스트가 이해를 돕는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슈타인즈 게이트’ 본편을 진 엔딩만 남긴 채 플레이하고 ‘슈타인즈 게이트 0’를 하는 것이다. 다만 인물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요소가 곳곳에 있으니 처음 하는 유저들도 상상력을 조금 동원하면 무리 없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이것도 '슈타인즈 게이트'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