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어디에도 없던 세계관, 토먼트의 '누메네라'
2017.03.02 19:10 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 '토먼트'의 새로운 배경 '누메네라' 세계관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지난 2월 28일 RPG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정신적 후계작 ‘토먼트 타이드 오브 누메네라(이하 토먼트)’가 발매됐습니다. ‘토먼트’도 전작처럼 깊이와 자유도 모두를 잡은 뛰어난 스토리텔링이 강점인데요, 제작사인 인엑자일엔터테인먼트는 이러한 스토리텔링을 가능하게 해준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그 무엇과도 다른 세계관(A World Unlike Any Other)’이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특별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에 ‘토먼트’의 이야기도 흥미로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토먼트’의 세계관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옛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의 팬이라면 이번 ‘토먼트’를 보고 당황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에서는 ‘던전 앤 드래곤’ 설정의 판타지 세계관인 ‘플레인스케이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차원을 넘나드는 모험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반면에 ‘토먼트’는 SF 장르인 ‘누메네라’라는 조금 생소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답니다. 전작 배경인 ‘플레인스케이프’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지요. 세계관이 완전히 새로운 만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듯한데요, 그렇다면 ‘토먼트’에서 그렇게 중요하다는 ‘누메네라’ 세계관은 어떤 곳일까요?
중세 판타지와 SF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기묘한 결합
‘누메네라’는 ‘플레인스케이프’ 세계관의 저자이기도 한 유명 TRPG 제작자인 몬테 쿡의 최신 작품입니다. 2013년 킥스타터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된 이 세계관 겸 TRPG 규칙은 제작단계에서부터 51만 7,255 달러(한화 약 5억9천만 원)라는 높은 모금액을 모아 큰 관심을 받았고, 발매된 후에도 ‘오리진 상(Origins Award)’을 비롯한 여러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누메네라’는 이미 그 자체로 흥미로운 요소들이 검증된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는 셈입니다.
‘누메네라’ 세계관이 내세우는 강점은 바로 판타지와 SF가 기묘한 방식으로 결합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계관은 강한 판타지의 향취를 풍기지만, 동시에 SF적인 요소가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물론 검과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에 갑자기 미래기술로 무장한 우주해병대나 로봇이 떨어진다면 어떨까요? 아마 판타지와 SF 어느 쪽의 분위기도 제대로 낼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누메네라’는 단지 두 장르를 합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대신 10억년 후 먼 미래의 지구라는 독특한 배경을 바탕으로, 과거의 진보된 과학기술을 잃어버린 인류가 옛 문명에 대해 느끼는 경이와 놀라움을 판타지적인 색채로 보여주고 있지요.
▲ 판타지와 SF가 혼합된 독특한 분위기의 '누메네라' 세계관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이 세계의 대기에는 이따금 ‘쇠바람(Iron Wind)’이라고 불리는 금속성 먼지폭풍이 불어 닥칩니다. 이 불가해한 바람은 접촉하는 모든 것을 바꾸어버립니다. 바위가 구름으로, 나무가 바위로 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도 찢어발기고 재조립해서 끔찍하게 뒤틀린 모습으로 변모시키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쇠바람’을 초자연적인 정령의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 ‘쇠바람’은 그저 지난 시대에 만들어진, 그리고 지금은 고장 나서 통제권이 상실된 나노머신 군체입니다. 정체를 파악하고 적절한 통제수단만 알아내면 실은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누메네라’에서는 마법을 방불케 하는 많은 신비로운 요소가 실은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아니면 과학적인 것을 미신에 입각해 신비롭게 볼 수도요. 다시 말해 익숙한 것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게 합니다. ‘누메네라’에 존재하는 것들은 완전히 낯설지는 않지만 신기한 느낌을 주고, 무서운 면도 있지만 동시에 흥미를 자극합니다. 고대 기술을 다루는 기술자 ‘나노’는 열광선 방출기를 마법 지팡이처럼 사용합니다. 그런가 하면 고장 난 옛 전쟁용 기계는 골렘과 비슷하게 느껴질지도요.
이러한 특징들 덕분에 ‘누메네라’는 중세 판타지와 SF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이질적인 두 장르를 하나로 결합시키면서도, 양자의 고유한 분위기는 잃지 않은 채 색다름을 더하고 있습니다.
옛 시대의 신비로 가득 찬 ‘제9세계’
그렇다면 ‘누메네라’의 세계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이 부분을 얘기하기 전에 우선 이것부터 얘기해야겠군요. 사실 엄밀히 따지면 ‘누메네라’는 세계관 이름이지 세계의 이름은 아닙니다. 이곳 거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세계를 ‘제9세계’라고 부릅니다. 10억년이 흐르는 사이 지구의 문명이 여덟 번 바뀌었고, 지금은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문명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제9세계’ 이전의 여덟 문명은 모두 고도의 과학기술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나노 기술로 물질을 재구성하고, 항성변조 기술로 태양의 나이를 연장시켰으며, 우주항행 기술로 지구를 항성간 문명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문명들은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사라지고 말았고, 지금 ‘제9세계’는 고작 중세 정도의 문명을 재건했을 따름입니다. 이 세계에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것과 먹는 것을 대부분 직접 만들고, 상업은 일부 도시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지요. 대부분의 마을은 기껏해야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가 작은 마을을 이루어 농사나 어업으로 먹고 삽니다.
▲ 대부분의 '누메네라'는 이해할 수 없지만, 삶 곳곳에서 사용된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그렇다고 ‘제9세계’의 문명이 실제 중세와 똑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들은 옛날부터 지구 곳곳에 남겨진 지난 문명들의 잔재를 발견해왔고, 때로는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도 어떻게든 이롭게 사용할 방법을 찾아내기도 했거든요. 예를 들어 ‘제9세계’의 한 마을은 고대에 추락해 반쯤 땅에 파묻힌 비행선 옆에 건설됐는데, 기계의 엔진에서 아직도 저온의 열이 방출되는 덕분에 난방과 온수를 누립니다. 그런가 하면 ‘오릴라(Orrila)’라는 도시에 있는 고대의 전파기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청취자의 마음 속에서 텔레파시로 투사해줍니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도 쉽게 의사소통 할 수 있는 덕분에 이 도시는 상업의 중심지가 됐지요. ‘제9세계’ 사람들은 이러한 과거의 유물들을 ‘누메네라(Numenera)’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제9세계’에 남겨진 모든 ‘누메네라’가 이로운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들은 여전히 용도가 수수께끼인 채 남아있고, 인간에게 위험하거나 적대적인 기계도 많습니다. 지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들이 계속해서 방출하는 전파망인 ‘데이터스피어(Datasphere)’는 때때로 운 없는 사람의 머릿속에 갑작스러운 영상과 정보를 주입합니다. 먼 과거에 만들어진 자동화 기계 병사 ‘우르골리아 병사(Oorgolian Soldiers)’는 아직도 고대에 받은 지시대로 보이는 모든 사람을 공격하고 다닙니다. 이처럼 어떤 ‘누메네라’는 아직 ‘제9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복잡하거나, 혹은 위험합니다.
▲ '제9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누메네라'를 찾아 모험한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옛 문명이 남긴 흔적은 좋은 쪽과 나쁜 쪽 양면으로 작용합니다. 하지만 ‘제9세계’ 사람들은 싫든 좋든 ‘누메네라’의 존재를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직도 많은 ‘누메네라’가 지구 곳곳에 남아있고,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야심이 큰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누메네라’를 발굴하고 이용법을 알아내기 위해 고대 유적을 찾아 모험을 떠나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게 찾아낸 ‘누메네라’가 사소한 것이라면 마을에 갖고 가 생필품과 바꾸기도 하고, 운이 좋아 아주 중요한 것을 찾아낸다면 왕이나 군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실제로도 ‘제9세계’에 존재하는 많은 조직들은 ‘누메네라’를 통해 설립됐습니다. ‘진실회(The Order of Truth)’라는 종파는 옛 시대의 문명을 존중하고 ‘누메네라’를 이해하기 위해 생겨난 조직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고대인들의 지성을 숭배할 것을 요구하는 신앙을 만들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라켄회(The Sarracenians)’는 유전조작으로 만든 식물 ‘누메네라’ 에 열광하는 집단이고요. 도시국가의 왕들도 자신의 권세를 늘리고 군대를 강화시킬 새 ‘누메네라’를 찾는 데 늘 관심이 많습니다.
▲ '제9세계'에서는 권력도 '누메네라'로 지탱된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만약 중세에 21세기의 도구들이 떨어진다고 생각해봅시다. 물론 대부분 사용하지 못할 테고, 잘못 작동했다가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우연히 어떤 방식으로든 유익한 사용법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중세에 21세기의 도구를 얻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나 조직이 존재한다면 역사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요? 그보다 훨씬 미래의 진보한, 마치 마법과도 같은 도구가 떨어진 것이 바로 ‘제9세계’입니다.
‘제9세계’에서 벌어지는 모험
그렇다면 ‘제9세계’에서는 어떤 사건들이 벌어질까요? 물론 대부분 ‘누메네라’를 찾아 지난 문명의 흔적을 발굴하는 모험입니다. 어떻게 보면 던전 탐사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다만 그 안에서 등장하는 것이 오크나 해골병사가 아니라 자동화 보안설비나 퇴행한 돌연변이 짐승들이고, 발견하는 보물도 금화나 마법무구가 아니라 ‘누메네라’인 것이죠. 어쩌면 이미 ‘폴아웃’ 시리즈 등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한 번쯤 본 것일지도 모릅니다.
▲ '제9세계'의 가장 흔한 모험은 '누메네라'를 찾아 고대 유적을 탐험하는 것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단지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제9세계’에서는 전투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경이의 재발견’도 매우 중요합니다. 신비스러운 장소를 발굴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술을 찾아내고, 이것을 삶의 여러 측면에 활용하는 것 말입니다. 게임 ‘토먼트’에서도 전투를 줄이고 여러 모험적 위기상황을 연출하는 데 집중한 점도 바로 이러한 ‘누메네라’ 세계관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지요.
탐험가들이 갖고 돌아온 이상한 장치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기이한 폭풍이 마을을 휩쓸고 지나간 후 모두 성격이 바뀌었거나, 파손됐지만 아름다운 인조인간을 만나는 등의 이야기도 ‘누메네라’의 모험에 포함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처음 직면했을 때는 불가사의하고 마법처럼 신비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더 진행되면 이면에 존재하는 원리나 인과를 일부 이해하고, 어쩌면 이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누메네라,’ 앞으로 계속 볼 수 있을까?
중세 판타지와 SF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독특한 관점에서 결합시킨 ‘누메네라’ 세계관,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조금 흥미가 생기시나요? 이렇게 세계관을 알고 나면 직접 체험해보고 싶으신 생각 아마 드실 텐데요, 마지막으로는 ‘누메네라’ 세계관으로 제작된 작품들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누메네라'는 기본적으로 TRPG다 (사진출처: 공식 홈페이지)
기본적으로 ‘누메네라’는 TRPG로 제작됐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TRPG란 비디오게임 장르 RPG와 구분되는, 보드게임의 일종인 역할수행 게임을 뜻합니다. 보드게임과 유사한 규칙 하에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놀이지요. 하지만 아직 ‘누메네라’는 TRPG 외로는 많은 작품이 제작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누메네라’ 자체가 크라우드펀딩으로 개발로 2013년에 제작됐으니, 아직은 세계관 치고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셈입니다. 그만큼 이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적지요. ‘누메네라’는 지금까지 17개의 TRPG 상품, 소설 한 권이 제작됐습니다. 그 외에는 한 보드게임이 이 세계관을 배경으로 제작됐고, 비디오게임으로는 ‘토먼트’가 첫 작품이지요.
보시다시피 ‘누메네라’는 전투보다는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흥미로운 관점의 서사에 집중했습니다. 그 덕에 색다른 재미를 주지만, 다른 면으로는 비디오게임으로 만들기 힘들다는 문제도 있지요. 사실 ‘토먼트’ 이후로 이 세계관의 게임이 얼마나 나올지는 장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누메네라’ 세계관이 말 그대로 ‘어디에도 없던’ 재미있는 세계관임은 분명합니다. 그렇기에 최근 서사 중심의 게임이 없던 요즘, ‘누메네라’를 배경으로 한 ‘토먼트’가 정말 오랜만에 내리는 단비로 느껴지는 것이겠지요. 이번 ‘토먼트’가 좋은 결과 거두어 추후 더 많은 ‘누메네라’ 세계관 게임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