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수틀리면 신들이 리셋하는 세계관, 엘더스크롤
2017.12.21 20:16 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 모든 운명이 이미 태고 적에 정해진 '엘더스크롤' 세계관 (사진출처: 베데스다 공식 홈페이지)
자유도 높은 게임을 꼽을 때 꼭 빠지지 않는 시리즈가 하나 있다. 바로 오늘날 베데스다를 있게 한 대표작 '엘더스크롤' 시리즈다. 이 게임은 방대한 자유도, 커스터마이즈, 그리고 모드를 통해, 플레이어가 원하는 행동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많은 개발자들이 게임의 자유도와 창의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이 시리즈를 언급할 정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계관 측면에서 '엘더스크롤'은 자유와 꽤 거리가 있는 내용이다. 게임 시스템의 자유도에 묻힌 나머지 상대적으로 잘 조명되지는 않지만, 사실 '엘더스크롤' 세계관을 관통하는 주제는 예언과 운명이다. 세상사를 바꿀 중대한 사건에 대한 예언이 있고, 이를 실행할 영웅이 나타나 정해진 운명을 이루는 것이 이 시리즈의 주된 내용이다.
하지만 만약 예언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에 대한 답은 자못 황당하다. 왜냐하면 신들이 직접 나타나 시간을 강제로 되돌리거나, 수정하거나, 아예 사건이 발생했던 사실 자체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사실상 '답은 정했으니 너는 운명대로 하기나 해'인 셈이다.
▲ 어지간한 사건은 '엘더스크롤'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 (사진출처: 베데스다 공식 홈페이지)
이렇듯 의외로 '답정너' 속성인 '엘더스크롤' 세계관. 과연 왜 '답정너'가 됐고, 실제 게임에서는 이러한 면이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 한 번 확인해보자.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된 '엘더스크롤 2: 대거폴' 멀티 엔딩
사실 시리즈 첫 작품 '엘더스크롤: 아레나'만 해도 '엘더스크롤' 세계관에는 그리 특별할 구석이 없었다. 1994년 발매된 '엘더스크롤: 아레나'에서 세계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고, 게임 줄거리도 황위를 찬탈한 사악한 마법사 '제이거 탄'에 맞서 황제를 구출한다는 단순한 내용이었다.
'엘더스크롤'이 유명세를 탄 것은 1996년 발매된 후속작 '엘더스크롤 2: 대거폴'부터였다. '엘더스크롤 2: 대거폴'은 전작에 비해 시스템적인 발전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전작에 비해 공간적으로 훨씬 넓어진 세계와 풍부한 콘텐츠를 제공해 큰 인기를 끌었다. 세계관도 '엘더스크롤 2: 대거폴'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정립되기 시작했다.
▲ '엘더스크롤 2: 대거폴' 인트로 영상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 작품부터 시리즈의 무대가 되는 세계인 '넌(Nirn)'의 상세한 지리, 문화, 역사, 신앙이 설정됐고,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육신을 희생한 신 '에이드라'와 창조에 가담하지 않은 신인 '데이드라'가 나뉘었다. 그런데 여기에 특별히 눈에 띄는 기이한 설정도 붙었다. 만약 신들이 정한 운명과 다른 사건이 발생하면, 세계관이 강제로 초기화되고 수정된다는 것이다.
'엘더스크롤 2: 대거폴'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황제 '우리엘 셉팀 7세'의 신뢰하는 친구이자 요원이다. 황제의 밀명으로 44개의 도시국가가 난립 중인 무법의 땅 '하이 락'에서 사건들을 처리하던 주인공은 이후 예기치 못했던 엄청난 사건에 휘말린다.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고대의 무기 '누미디움'을 다시 가동시킬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이후 주인공은 시공을 넘나들며 '누미디움' 작동장치를 찾고, 세상의 역사를 바꾸게 될 선택을 내리게 된다.
▲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에 등장한 두 번째 '누미디움'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구체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고대 황제인 '타이버 셉팀'은 궁정 마법사 '주린 아크투스'의 도움으로 신의 유해로 만들어진 골렘 '누미디움'을 가동하여 세계를 정복한다. 그러나 거대한 제국을 이룬 황제가 이제는 제국 내부 숙청에 '누미디움'을 동원하자 '아크투스'는 환멸에 빠진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아무도 '누미디움'을 사용할 수 없도록 '누미디움'을 분해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 '만텔라'는 이계로 보내버린다.
주인공은 바로 이 '만텔라'를 찾아 '누미디움'을 복구하고, 그 통제권을 자신이 선택한 이에게 줄 수 있었다. '엘더스크롤 2: 대거폴'은 누구에게 '누미디움' 통제권을 주느냐에 따라 7개 엔딩으로 나뉘었다. 엔딩에 따라서 '넌'의 미래는 크게 다르게 묘사됐다. 예를 들어 황제에게 '누미디움'을 주면 제국은 다른 국가들을 정복하여 더욱 거대한 영토를 이룬다. 반면 오크 영웅 '고트워그'에게 주면 그는 제국과 다른 인간 국가들을 짓밟고 오크들의 국가 '오르시니움'을 건국한다.
▲ 각 엔딩마다 주인공의 선택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상세히 설명됐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엘더스크롤 2: 대거폴' 때만 해도 이러한 멀티 엔딩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러나 후속작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를 개발하며 전작의 엔딩들 중 무엇을 정사(正史)로 취급할 것인지가 문제로 떠올랐다. '누미디움'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따라서 '넌'의 역사가 달라지므로,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 스토리를 어떤 엔딩 기준으로 쓸지 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베데스다가 택한 답이 상당히 특이했다. 7개 엔딩 모두 정사로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택 하에 정해진 설정은 다음과 같다. 다른 차원을 넘나들며 무리하게 '만텔라'를 회수한 주인공의 행보는 '넌'에 시공 붕괴, 즉 '드래곤 브레이크'를 일으킨다. 이에 시간의 신 '아카토쉬'이 나타나 시공을 복원하는데, 문제는 '만텔라' 소유권에 따라 엇갈린 시간선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각기 다른 시간선에서 발생한 모순적 사건이 동시에 발생한 것으로 처리했다. 일곱 엔딩이 모두 이루어진 셈이다.
이후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와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에 언급된 이 사건을 보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3일 동안의 기억이 사라지고, 깨어났을 때는 '하이 락' 지역이 작위적으로 재구성되어있던 것이다. 44개에 달했던 왕국은 4개로 축소되었으며, 나머지 40개 왕국은 존재가 삭제됐다. 자고 있어났더니 멀쩡했던 도시가 하룻밤 만에 적국에게 함락되어 있었고, 정복자들도 자신이 대체 어떻게 도시를 함락시킨 건지 모른 채 혼란스러워했다.
세계관 내에서는 이 황당한 사건에 대해 많은 사람이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를 포기한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기억이 없는 짧은 시간 동안 생긴 변화로 인해 '대거폴' 인근 지역이 안정화됐으므로, 이 사건을 '평화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서쪽에서 벌어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며 '서방의 뒤틀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에 나타난 '아카토쉬'의 화신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베데스다는 아예 인과와 운명을 벗어난 사건에 '아카토쉬'가 개입하여 작위적으로 시공을 재배열하는 것을 '드래곤 브레이크'라는 설정으로 정식화한다. 이름을 '드래곤 브레이크'라고 한 이유는 시간의 신 '아카토쉬'가 드래곤 모습이며, 그가 만든 인과율이 깨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들의 현실조작은 '드래곤 브레이크'에 반쯤 자동으로 따라붙는 조치다.
이렇듯 '드래곤 브레이크'는 '엘더스크롤 2: 대거폴' 멀티 엔딩을 처리를 위해 급조한 설정이지만, 이후 설정 모순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주 사용됐다.
후속작에서도 계속되는 '드래곤 브레이크'
급조된 만큼 설정이 부실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드래곤 브레이크'는 이후로도 세계관 곳곳에서 암시되거나 직접 언급됐다.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와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에서도 '드래곤 브레이크'는 이야기 흐름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는 전작에 이어 또 한 번 '누미디움'을 둘러싼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실 '누미디움'의 창조자는 '드웨머'라고 불리던 지하 엘프족이다. 어느 시점에 우연히 죽은 신 '로칸'의 심장을 손에 넣은 '드웨머'는 자신들의 장기였던 기계공학을 통해 인공신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성모독을 용납할 수 없던 신 '아주라'는 다른 엘프 씨족인 '카이머'들에게 '드웨머'들을 막으라는 계시를 내리고, 이에 '카이머'는 영웅 '네레바'의 지도 하에 '드웨머'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도시를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드웨머' (사진출처: 엘더스크롤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
그런데 전쟁이 한참이던 때, 승기를 잡기 위해 무리하게 '누미디움'을 작동시킨 '드웨머'들은 한 순간에 종족 전체가 세상에서 지워진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고 '네레바'는 '로칸'의 심장을 얻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반신이 되기 위해 심장을 이용하고자 했던 부관들의 배신으로 '네레바'는 목숨을 잃었으며, 게임은 먼 훗날 환생해 복수를 위해 돌아온 '네레바'인 주인공의 행보를 다루었다.
이렇듯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의 발단이 된 '드웨머'의 종족 단위 실종은 '드래곤 브레이크'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게임 내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있지만, 가장 자주 거론되는 설은 바로 '드웨머들이 누미디움의 힘으로 세상의 인과법칙과 운명을 바꾸자, 아카토쉬가 직접 개입해 드웨머 종족 전체를 삭제하고 시간을 되돌린 것'이라는 이야기다. '엘더스크롤 2: 대거폴' 줄거리와도 맞닿아 있는 설정이다.
▲ '알두인'을 다른 시간대로 추방한 '드래곤 브레이크'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은 주요 줄거리 자체가 '드래곤 브레이크'와 더욱 깊게 연관된다. 주요 악당인 최초의 드래곤 '알두인'은 본디 신들이 주기적으로 '넌'을 갱신하기에 앞서 파괴할 임무를 맡은 존재였다. 그러나 지배욕에 타락한 그는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자기 소유로 삼았으며, 특히 인간에게 학정을 일삼다 세 영웅이 일으킨 반란으로 패배했다.
그런데 사실, 그가 사라진 진짜 이유는 '드래곤 브레이크'다. 영웅들은 '알두인'을 직접 패배시킬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신들에게 받은 마법적 힘 '쑴(Thu'um)'과 시공 너머에서 온 유물인 '엘더스크롤'을 사용해 '드래곤 브레이크'를 일으키고, 드래곤 '알두인'을 자신들의 시간대에서 제거했다. '알두인'이 없는 역사를 새로 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일으킨 '드래곤 브레이크'로는 강대했던 그의 존재를 완전히 지울 수 없었고, 결국 '알두인'은 4500년이 지난 미래에 돌아온다.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의 '드래곤 브레이크'는 신에 의해 직접 일어난 사건은 아니다. 그러나 신들의 도움과 계시에 의해 일어난 일임은 분명하며, 게임 내에도 '아카토쉬'와 여신 '키나레스'가 '알두인'의 파멸을 위해 인간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언급은 자주 언급된다. 또한 '알두인'이 다른 시간대로 추방된 장소는 이후 '시간의 상처(Time-Wound)'라고 불리는데, 이는 '알두인' 추방 사건으로 인해 '넌'의 시공이 일부 손상됐음을 암시한다.
▲ '엘더스크롤 온라인'에 등장한 '미들 던' 사건 기록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여기에 게임 중 언급만 되는 '드래곤 브레이크'까지 포함하면 훨씬 당황스러운 사건도 있다. 예를 들어 제국 초기에 발생한 대규모 '드래곤 브레이크'인 '미들 던'은 1008년간의 역사가 송두리째 삭제된 일을 다루고 있다. '미들 던'은 제국의 중심 지역인 '시로딜'을 무대로 한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에서 잠깐 다루어진다. 한 종파가 특별한 주술적 의식으로 시간의 신 '아카토쉬'로부터 엘프를 가호하는 면을 제거하고자 했는데, 그 탓에 거대한 '드래곤 브레이크'가 발생한 것이다.
게임 내 서적과 유적에서 수집되는 정보들에 따르면, 이 시기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들은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태양이 푸른빛으로 빛났다거나, 아들이 부모를 낳았다는 등 기괴하거나 인과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아카토쉬'가 너무 방대한 범위의 시간을 억지로 재배열하면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
이처럼 '엘더스크롤' 세계관에서 '드래곤 브레이크'는 신들이 정해둔 운명이 어긋날 때 발생하며, 곧바로 신들의 작위적 수정 조치가 가해진다. 말 그대로 세상의 운명은 이미 정해놨으니, 인간은 그대로 따라서 살면 된다는 것이다.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이렇듯 '드래곤 브레이크'는 '넌'의 역사가 운명에서 벗어났을 때, 억지로 시간을 재배열하는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반대로 생각해보면 '넌'에는 이미 정해진 운명이 있으며, 반드시 운명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엘더스크롤' 시리즈 내용은 모두 '엘더스크롤'에 예언으로 기록되어있고 주인공은 그 예언을 이룰 영웅이라는 식으로 설정되어 있다.
아예 게임 이름 자체가 작중 예언 이름과 일치하는 것도 많다. 예를 들어 '엘더스크롤 3: 블러드문'은 '넌'에서 전해지는 '블러드문 예언'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주인공이 예언의 주인공이 된다. 그런가 하면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은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에서 잠시 나왔던 '오블리비언 예언'이 실제로 닥치는 내용이다.
▲ '엘더스크롤 3: 블러드문'에서는 불길한 달이 뜰 때 시작되는 '블러드문' 예언에 휘말린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렇다면 예언을 듣기만 하고 일부러 이루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답은 이미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에 나와있다. 상술했듯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 주인공은 데이드라 신 '아주라'의 선택을 받은 영웅 '네레바'의 환생이다. 그런데 메인 퀘스트로 들어가게 되는 장소 '화신의 동굴'에는 죽은 환생자의 영혼이 수십이나 모여 있다. 사실 '아주라'는 주인공 이전에도 영웅의 환생을 한 트럭씩 모아두었던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사실 '아주라'는 주인공 외에도 수많은 '네레바'의 환생을 모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아주라'의 기준을 충족할 정도로 뛰어나지 못했거나, 예언의 주인공이 될 생각이 없던 자들이다. 다시 말해, '아주라'는 예언이 성취될 때까지 수천 년 동안이나 '네레바'를 환생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내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해'라는 뜻이다.
▲ '화신의 동굴'에 갇힌 '네레바' 환생자들의 영혼 중 하나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세상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게 하는 신은 '아주라'뿐 아니다. 상술한 '블러드 문' 예언은 '데이드라' 신 '허신'이 계획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데이드라' 신 '몰락 발'은 속임수와 고통으로 복종을 강요해 인간이 자기 뜻에 따르게 한다. 물론 '에이드라' 신들도 '드래곤 브레이크'를 비롯해 강제로 운명을 짜맞추기는 마찬가지다.
주인공 역할은 '운명의 도구'
여기까지 보면 한 가지 궁금증이 든다. 왜 신들은 세상을 원하는 대로 직접 바꾸지 않고 예언과 영웅을 이용하는 걸까? 물론 이유는 메타게임적으로 보면 플레이어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지만, 세계관에서도 나름대로 그럴 듯한 대답을 준비해놓고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엘더스크롤'에 등장하는 신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세계창조에 관여한 '에이드라'와, 관여하지 않은 '데이드라'다. 이 중 '에이드라'는 세계를 창조하던 중 자신의 육체를 희생했기에 물질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에 나왔던 것처럼 인간의 육신을 화신으로 삼아 활동하는 등,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힘을 행사할 수 있다.
▲ '엘더스크롤 온라인'에 등장한 '몰락 발'도 숭배자의 도움을 통해서만 '넌'을 침략할 수 있었다 (사진출처: '엘더스크롤 온라인' 공식 홈페이지)
반면 '데이드라'는 물질적인 육체를 지니고 활동할 수 있는 신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에이드라'와 달리 세계창조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고, 따라서 세계에 대한 소유권 또한 없다. 따라서 이들은 늘 제한적인 방식으로만 '넌'에 나타날 수 있다. 일시적으로 자신의 세계와 '넌'의 경계가 약해지는 때에만 등장한다거나, '넌'의 인간이 의식을 통해 자신을 초대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식이다.
이처럼 '에이드라'와 '데이드라' 양쪽이 모두 세계에 영향을 제한적으로만 끼칠 수 있으므로, 결국 신들의 뜻을 대행해줄 영웅의 존재가 중요해진다. '엘더스크롤 2: 대거폴'에 등장하는 인물 '언더 킹'의 이야기는 이러한 '엘더스크롤' 세계관의 특징을 보여준다. "예언은 모든 사건에 선행한다. 하지만 영웅이 없으면, 사건도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모든 사건이 신들에 의해 계획되어있지만, 영웅의 도움 없이는 정해진 운명도 잠재태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에 등장한 '알두인의 벽'은 태고부터 먼 미래의 일들이 이미 예정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즉, '엘더스크롤' 세계관에서 주인공의 역할은 '운명의 도구'다. 주인공은 신들이 미리 정해놓은 운명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주인공의 도움 없이는 신들이 정한 운명도 실제 역사가 될 수 없다. 세계의 운명은 신들과 주인공이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물론 '답정너'이기는 하지만, 아예 주인공이 수동적으로 종속되기만 한 위치는 아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 개발자와 플레이어의 관계와도 비슷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