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라이즌 제로 던, 기계생물은 말을 못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2018.03.27 15:38 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 '호라이즌 제로 던' 기획 포스트모템 강연을 진행한 에릭 볼제스 (사진: 게임메카 촬영)
2017년 GOTY 수상작 후보로 여러 번 거론된 '호라이즌 제로 던'은 여러 독특한 요소들로 출시 직후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오픈 월드, 기계생물로 이루어진 생태계, 인류 멸망 이후 먼 미래에 재건되기 시작한 원시문명 등 흥미로운 소재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점은, 이런 여러 요소가 위화감 없이 한 데 어우러진 완성도 높은 세계관이었다.
그렇다면 '호라이즌 제로 던'은 어떻게 이처럼 독특하고 짜임새 있는 세계관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이번 GDC 강연 <호라이즌 제로 던: 게임 기획 포스트모템>에서 게릴라게임즈 리드 디자이너 에릭 볼제스는 그 노하우를 게임 기획 4단계로 설명했다. 출시에 이르는 전 과정을 4단계 프로토콜인 ▲콘셉트 ▲사전 제작 ▲제작 ▲다듬기로 정리하고, 그에 따라 핵심 콘텐츠를 끊임 없이 재확인하고 개선했다는 것이다.
▲ 아이디어를 기획 의도에 맞게 줄이고 다듬어나가는 과정이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기본 플레이 패턴, '코어 루프'부터 만들어라
▲ 개발 기획 첫 번째 단계, '콘셉트' (사진: 게임메카 촬영)
볼제스는 '호라이즌 제로 던' 개발이 세 가지 핵심 요소를 주축 삼아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오픈 월드', 포스트-포스트 아포칼립스 풍의 '장엄한 자연', 그리고 경외심이 들게 하는 '거대 기계와의 전투'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오늘날 '호라이즌 제로 던'에서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개발 초기 단계에서 이 요소들은 서로 잘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기획서가 통과된 후 게릴라게임즈는 2011년부터 2년 반 정도 시간을 잡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우선 '콘셉트' 확립 단계에서는 여러 방면 지식을 갖춘 소규모 팀들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플레이 가능한 게임'을 만들기 위한 초석을 세워야 했다. 아이디어 정리와 게임 구조 확립, 두 가지 '콘셉트'를 완성해야 한 것이다.
▲ '콘셉트' 단계에서 세 요소는 아직 통합된 체험으로 개발되지 않았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볼제스는 아이디어 정리 단계에는 '오픈 월드', '장엄한 자연', '거대기계와의 전투'를 하나로 연결하지 않고 각각 개별적으로 제작했다고 밝혔다. 아이디어도 따로 나왔고, 프로토타입도 별개로 제작했다. 이러한 방식은 장점과 단점이 명확했다. 장점은 아이디어와 기술을 빨리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오픈 월드', '장엄한 자연', '거대기계와의 전투' 부분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따로 존재했다. 볼제스 말에 따르면 '섬들'처럼 분리된 셈이었다.
볼제스는 그렇기에 두 번째 단계인 게임 구조, 즉 '코어 루프(Core Loop)'가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코어 루프'는 플레이어가 실질적으로 플레이 하게 될 플레이 패턴이다. '호라이즌 제로 던'은 마을을 떠나 야생에서 탐험하고, 기계생물을 찾아 사냥하고, 그 부품을 모아 캐릭터를 강화하는 것의 반복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나온 아이디어와 기술을 '코어 루프' 중심으로 정리하고 조합해야 했다.
▲ 호라이즌 제로 던 '코어 루프'를 나타낸 이미지 (사진: 게임메카 촬영)
볼제스는 '코어 루프'에 맞게 정리하는 작업이 아이디어로 얻은 결과물 가운데, 게임에 '필요 없는 요소'를 찾아내는 작업이라고도 설명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 아이디어는 모두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게임에 적용할 아이디어와 기술을 골라내고 나면 비로소 본격적인 게임 제작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렇게 하고도 손대야 할 부분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이를 확정하고 실제 플레이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듬는 것이 바로 '사전 제작' 단계다.
플레이에 맥락 부여해주는 '스토리'와 '내러티브'
▲ 개발 기획 두 번째 단계 '사전 제작' (사진: 게임메카 촬영)
콘셉트가 확정된 후에는 제작 팀 규모도 확장된다. '호라이즌 제로 던' 프로젝트는 '콘셉트' 기획 단계에서 여덟 명이라는 적은 수로 시작했지만 '사전 제작' 단계에 들어서면서, 우선 '내러티브 디자인 팀'을 추가되고, 기획 팀을 '코어 디자인', '월드 디자인', '퀘스트 디자인' 세 개로 분화시켰다. 게임 맥락을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획하기 위해서다.
콘셉트 기획 단계에도 스토리와 내러티브에 대한 논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개략적인 수준이다. 여기에 '내러티브 디자인 팀'이 추가되면 '코어 루프'에 어울리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다시 한 번 콘셉트 기획 단계에서의 많은 아이디어가 정리된다. 예를 들어 초기에 있었던 궁정 암투라거나, 주인공이 군대를 지휘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의 스토리는 모두 배제됐다. 사냥-수집-성장이라는 '코어 루프'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 내러티브에 안 맞는 아이디어는 모두 배제됐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사전 제작' 단계에서는 이처럼 게임 전반에 '맥락'을 부여하는 작업이 핵심이었다. 기계생물 디자인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초기에 기계생물은 '거대한 적'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기계들이 자연생태계를 이루어 살아가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거대 기계생물들 외에도 작은 기계생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나, 어떻게 이러한 생태계가 구축됐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호라이즌 제로 던'의 특징인 기계생물 설정 및 디자인이 시작된 것이다.
그 외에도 인터페이스, 월드 구현, 퀘스트를 비롯한 다양한 부분이 맥락에 맞게 조정됐다. 같은 콘텐츠라도 맥락에 따라 플레이어가 느끼는 체험은 천차만별이 되며, 게임을 계속 하게 만드는 동기도 차이 난다. 그렇기에 게임에 맥락을 부여하는 '스토리'와 '내러티브'는 '사전 제작' 단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요소가 된다.
▲ 기계생물도 단순한 '적'이 아닌 '생태계 구성원'으로 치밀하게 설정됐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그렇게 게임 전반을 관통하는 분위기에 따라 큰 틀을 갖추고 나면, 그 다음 세부사항들을 실제 플레이 할 수 있게 만드는 '제작'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결과물이 기획에 맞는지 끊임 없이 확인하라
▲ 개발 기획 세 번째 단계, '제작' (사진: 게임메카 촬영)
'제작'은 쉽게 말해 게임을 '플레이 할 수 있는 상태'로 완성시키는 단계다. '콘셉트'와 '사전 제작' 단계에 나온 아이디어와 기술을 바탕으로 완전한 게임을 만드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부터 제작과 함께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나타나므로, 이에 대한 해결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게릴라게임즈는 이 단계에서 산발하는 문제들을 시기 적절하게 포착하고 해결하기 위해 개발과 테스트를 동시에 진행했다. 특정 부분을 만든 후 곧바로 테스트를 해 예상치 못한 오류나 문제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 중 기술적인 결함 외에도 기획상 맹점이 발견되는 일도 많다. 볼제스는 '제작' 단계에 파악한 문제 중 하나로 툴 팁이 게임 화면을 가리는 바람에 몰입이 저하됐던 일을 예로 들었는데, 그 개선책은 툴 팁을 홀로그램 오버레이로 묘사하는 것이었다.
▲ 개발 도중 드러난 툴 팁 문제는 홀로그램 방식으로 해결했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만들다 보니 원래 계획과 너무 달라진 부분도 있었다. 그 예 중 하나가 '인간 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호라이즌 제로 던'은 처음부터 거대 기계괴수 전투를 핵심 요소 중 하나로 삼았다. 그러나 스토리를 만들다 보니 기계생물은 말을 못한다는 점이 문제가 됐고, 어쩔 수 없이 드라마 강화를 위해 인간 적들을 계속 추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적' 비율의 증가는 인카운터 디자인에도 추가적 문제를 불러왔다. 거대기계생물과의 전투는 부위파괴를 중심으로 한 '몬스터 헌터' 같은 싸움이 바탕이다. 그러나 인간은 부위파괴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장비 활용과 수적 우위를 이용하는 적이어야 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오픈 월드라는 특성 탓에 모든 지역에 전술적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인카운터를 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 생각보다 커진 '로봇은 말할 수 없다'는 문제 (사진: 게임메카 촬영)
이처럼 '제작' 단계에서는 계속해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발생하므로, 때로는 본래 기획과 다른 방향으로 개발을 진행해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혼자서도 거대 기계괴수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인간 보스 '헬리스'는 거대 기계괴수와의 전투에 썩 부합하지는 않지만, 스토리 진행과 인간 적 인카운터 구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내놓은 차선책이었다.
그렇기에 게임을 완성한 후에도 결과물에 대한 점검은 필수다. '제작'이 끝나고 나면 마지막으로 완성된 게임을 최종 손질하여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 '다듬기'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다 만든 후에도 '다듬기'로 한 번 더 완성도 확인은 필수
▲ 개발 기획 네 번째 단계, '다듬기' (사진: 게임메카 촬영)
'다듬기'는 '제작' 단계에서 완성된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테스트 해보고 피드백을 받아 개선하는 작업이다. 개발자는 오랜 시간 동안 제작해온 게임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예상보다 낯설어 하는 부분이 많을 수 있다. 이 마무리 단계에서는 이러한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세부 요소들을 다듬는 작업을 한다.
'다듬기' 대상은 스토리, 그래픽, 사운드, 인터페이스, 난이도 등 다양하다. 대단히 세부적인 곳까지 다듬을 때도 있는데, 볼제스는 그 예로 아이템 이름을 들었다. 본래 '호라이즌 제로 던'은 기계가 생물처럼 활동한다는 설정에 맞게, 기계생물에서 뜯어낸 재료 아이템도 모두 장기 이름이었다. 예를 들어 '기계 코어'는 '기계 심장' 같은 식이었다. 하지만 '기계 심장'으로 쓸 시 일부 플레이어는 해당 아이템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다듬기' 작업을 해도 만족스럽게 개선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볼제스는 그러한 예 중 하나로 제작 시스템을 들었다. 생각보다 재료 아이템 정리에 손이 많이 갔고, 제작 자체도 썩 눈에 띄거나 잘 쓰이는 시스템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 계속된 '다듬기'에도 불구하고 제작 콘텐츠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사진: 게임메카 촬영)
명확한 개발 프로토콜, 명작을 위한 지름길
▲ 단계별로 계속 목표를 확인하는 것이 명작을 탄생시키는 길이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볼제스는 '호라이즌 제로 던'이 대체로 이러한 4단계 프로토콜을 거치며 제작됐지만, 실제로 늘 이 프로토콜대로 되지는 않았다고 회고했다. 때로는 '제작' 단계까지 가서 작업하다, 다시 '사전 제작' 단계에서 만들던 스토리와 설정을 수정하기도 하는 등 다소의 변동사항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프로토콜을 기준 삼아 제작하는 것은 개발 일정 관리에 상당한 도움이 되며, 게임을 보다 체계적으로 만들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끝에 '호라이즌 제로 던'은 2017년 2월 출시돼 7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게릴라게임즈가 발매한 역대 게임 중 가장 큰 성공이다.
볼제스는 게릴라게임즈가 이 과정을 통해 '호라이즌 제로 던'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명백히 알 수 있었으며, 핵심가치를 좇으면서도 필요에 따라 세부계획을 유연하게 수정하고 적응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명문화된 절차와 체계를 따르면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