턴 대기시간, 엑스컴 2가 플레이어에게 주는 암시가 있다
2018.03.27 17:24 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 <'엑스컴 2' 세계의 숨은 이야기 탐험> 강연을 진행한 저스틴 로드리게즈 (사진: 게임메카 촬영)
'엑스컴 2'가 처음 발매됐을 때 가장 주목 받은 부분 중 하나는 스토리였다. 기존 '엑스컴'은 늘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들에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았지만, '엑스컴 2'는 외계인에게 이미 정복된 지구를 무대로 하는 인류해방전선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흥미로운 설정에 매료돼 처음 '엑스컴을 시작해 프랜차이즈 팬이 된 플레이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인류가 외계인에게 정복 당해 살아간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게임에 등장하는 민간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일부 민간인 구조 임무에서 사람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임무에서 건물은 비어있고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 부분은 턴 기반 전술게임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민간인이 진로를 차단하면 게임에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 치열한 전투로 여유는 없지만, 은연 중 느껴지는 사람의 흔적이 있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그런데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엑스컴 2'에 민간인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플레이어는 게임 중 이 도시에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최소한 '사람 사는 곳이라면서 왜 이리 휑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정신 없이 플레이 할 때는 느끼기 힘들지만, 지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다.
올해 GDC 강연 <'엑스컴 2' 세계의 숨은 이야기 탐험>을 맡은 파이락시스게임즈 환경 아티스트 저스틴 로드리게즈는, 이러한 '엑스컴 2' 특징이 맵 곳곳에 배치된 미세한 장치들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람이 사는 곳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작은 요소들 덕분에, 플레이어가 스스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이곳이 시가지라고 믿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엑스컴 2'는 턴 기반 게임이라는 특성상 적이 움직이는 동안 대기해야 하며, 자기 턴에도 치밀한 작전을 수립하느라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플레이어는 화면은 들여다 보지만 따로 행동은 하지 않는다. 로드리게즈는 이 시간을 이용해 플레이어가 소소하게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상상을 할 수 있게 준비해둔 것이다.
▲ 빨간 길이 반드시 가야 하는 플롯 진행로 (사진: 게임메카 촬영)
'엑스컴 2'의 넓은 맵에 작은 요소 몇개 숨긴다고 얼마나 큰 차이 생기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엑스컴 2' 맵에서 플레이어가 가게 될 길은 제한되어 있다. 로드리게즈는 이를 두고 '맵에서 플롯을 발생시키는 구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외는 부수적 구획'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부수적 구획은 갈 수 있고 전술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지만, 꼭 가야 할 필요는 없는 공간이다.
로드리게즈는 그렇기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으면 반드시 가야 하는 플롯 경로를 따라 배치하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쉽게 말하면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에 띌 장소'에 배치하는 셈이다. 이렇게 하면 작은 요소라도 플레이어 눈에 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 방금 전까지 화초를 가꾼듯한 사람의 흔적 (사진: 게임메카 촬영)
그렇다면 어떤 요소들을 배치해야 정말 사람 사는 듯한 공간으로 꾸밀 수 있을까? 로드리게즈는 아무렇게나 소품을 배치해서는 사람 사는 느낌을 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이 남겼을 만한 삶의 흔적을 구상했다. 그 예 중 하나가 개발팀에서 소위 '화분 사나이'로 불리는 가상의 사람이다.
'화분 사나이'가 사는 집은 다양한 화분과 정성스럽게 키우고 있는 화초로 가득하다.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에도 물을 주고 있었는지, 식탁 위에도 온통 화분이 있다. 베란다에도 햇빛이 잘 드는 곳에는 반드시 화분이 있다. 옥상으로 올라가면 한술 더 떠서, 아예 빗물을 받아 정화해 수증기로 만들어주는 간이 정화조 및 가습시설까지 있다. 화초에 대한 남다른 사랑이 느껴지는 흔적이다.
▲ 의료용 3D 프린터로 뽑아낸 장난감 자동차는... (사진: 게임메카 촬영)
조금 더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도 있다. '엑스컴 2' 맵 중 하나에는 안과 의원이 있다. 다소 야매 의원인지 진료실 내에는 바가 있고, 곳곳에 술로 보이는 병 음료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데 여기에 자못 독특한 요소가 눈에 띈다. 의료용 3D 프린터인데, 마침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갓 찍어낸 듯한 장난감 자동차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난감 자동차는 인근 시가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마치 의원에서 찍어내 뿌린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 로드리게즈는 의원과 장난감 자동차를 배치할 때, 동네 의사가 취미로 의료용 3D 프린터를 사용해 동네 꼬마들에게 장난감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설정을 짰다고 이야기했다. 마침 그 지역도 빈민가여서 의사가 아이들에게 사제 장난감을 만들어준다는 이야기가 더욱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한 것들이었다는 설정이 있었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이처럼 로드리게즈는 플레이어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빵 부스러기'를 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 외에도 모두가 피신한 집 안에 걸린 가족사진, 혼자 맴돌고 있는 로봇 청소기, 벽에 남은 외계인 그래피티 등은 이 지역에 살았을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준다.
로드리게즈는 이렇듯 맵에서 찾을 수 있는 미세한 스토리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비어있는 공간을 두지 말고, 실제 그곳에 살 만한 캐릭터를 구상하고, 그들이 남겼을 흔적을 배치하되, 플레이어의 자연스러운 상상을 유도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게임 진행 중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도록 플롯 경로를 따라 심어야 한다.
▲ 환경 아트를 통한 세부 스토리텔링의 원칙들 (사진: 게임메카 촬영)
이 스토리는 '엑스컴 2'에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도, 중요한 내용도 아니다. 다만 로드리게즈는 이처럼 상상을 자극하는 소소한 요소들이 턴 기반 게임에 동반되는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도와주며, 세계관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장치가 되어준다고 설명했다.
▲ 사람들의 흔적을 상상하게 하는 여러 요소가 있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