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게임광고] 통키와 초사이어인의 끔찍한 혼종
2019.01.22 16:57 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한국 게임의 성숙기였던 1990년대를 기억하십니까? 잡지에 나온 광고만 봐도 설렜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 '게임챔프'와 'PC챔프', 'PC 파워진', '넷파워' 등으로 여러분과 함께 했던 게임메카가 당시 게임광고를 재조명하는 [90년대 게임광고] 코너를 연재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90년대 게임 광고의 세계로, 지금 함께 떠나 보시죠.
▲ '달려라 피구왕' 광고가 실린 제우미디어 '게임챔프' 1996년 2월호 (사진출처: 게임메카 DB)
[잡지보기]
1990년대 초중반을 보낸 국민학생들은 당시 ‘피구왕 통키’의 어마어마한 인기를 잘 알 겁니다. 만화영화 방영 시간만 되면 길거리에 남자아이들이 없어졌고, 학원들도 그 시간을 피해 수업 일정을 짤 정도였죠. 전국 어딜 가도 배구공에 불꽃마크 그려 던지는 모습이 보였고, 빙글빙글 돌며 ‘회전 회오리 슛’을 쓰려다 넘어져 다치는 아이들도 속출했습니다.
당시 한일 양국에서 인기가 많았던 피구왕 통키는 당연히 게임화도 많이 됐는데요, 그 중에는 이상한 게임도 있었습니다. 유명세는 이용하고 싶은데 IP를 따오기엔 돈이 많이 들 것 같고, 그렇다고 무단으로 사용하면 법적 소송이 우려되니 애매하게 살짝 바꾸자… 라는 의식의 흐름대로 만든 게임입니다. 오늘 소개할 한국 게임업체 게임라인의 ‘달려라 피구왕’이 그 주인공입니다.
▲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 지 혼란스러운 '피구왕'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사진출처: 게임메카 DB)
일단 광고를 보겠습니다. 붉은 머리의 캐릭터가 한 명 있네요. 얼핏 보면 ‘피구왕 통키’의 주인공 통키 같지만… 자세히 보면 어딘가 다릅니다. 땅딸막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통키와는 달리 팔다리가 쭉쭉 뻗은 것이 최소 2차 성징의 문턱은 넘어섰으며, 얼굴과 헤어스타일은 왠지 ‘드래곤볼’ 초사이어인을 닮았습니다. 어린 나이엔 이걸 ‘피구왕 통키’라고 자기최면을 걸며 플레이했지만, 지금 보니 피구공 대신 기공포를 쏠 것 같아 뭔가 섬뜩하군요.
게임을 자세히 뜯어보면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게임 제목부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달려라 피구왕!’이고, 게임 일러스트에 나온 작달막한 캐릭터는 얼핏 ‘피구왕 통키’ 공식 게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슷합니다. 광고에 나온 게임 스크린샷이 좀 적기에, 마침 게임메카에서 보유하고 있던 패키지를 꺼내보겠습니다. 패키지 뒷면에는 게임 스크린샷 4점이 수록돼 있는데, 불꽃슛을 연상시키는 짝퉁 통키, 푸른색 긴 머리를 휘날리는 라이벌(?) 캐릭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당시 발매된 '달려라 피구왕' 패키지 뒷면, 당시 게임들이 대부분 그렇듯 게임 소개는 별로 없다 (사진: 게임메카 촬영)
참고로 패키지 아래쪽에 쓰여진 ‘공연윤리위원회 심의번호’가 인상적이네요. 당시 게임 패키지 심의는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주관했는데요, 웬만한 선정적/폭력적 콘텐츠는 죄다 검열했지만 게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겉핥기 식으로만 살펴보고 심의를 내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죠. 이후 게임 심의는 영등위, 게임위 등으로 넘어오며 전문적 심의체계가 완성됐습니다.
‘달려라 피구왕’ 게임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면, 이 게임은 ‘피구왕 통키’가 SBS를 통해 재방송되며 한 번 더 인기를 끌었던 1995년 출시된 슈퍼 알라딘보이(메가드라이브)용 게임입니다. 여러모로 1992년작 메가드라이브로 출시된 ‘피구왕 통키’ 게임을 직접적으로 벤치마킹한(이라고 하고 사실상 베낀) 게임이죠. 필살슛을 쏠 때마다 약간의 일러스트가 나오는 전체적인 시스템도 흡사합니다.
다만 전체적인 시스템 완성도나 일러스트 품질 등은 유명세를 노리고 급조한 게임답게 당시 기준에서도 많이 조잡했습니다. 한국어 게임이 많지 않았던 당시 한국어로 ‘피구왕 통키’ 비스무레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다고 해도 될 겁니다. 다만 시대 정황상 이 장점 하나가 꽤나 커서, 당시 나름 잘 팔렸던 게임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 '달려라 피구왕'과 함께 묶여 있는 게임라인 작품들 (사진출처: 게임메카 DB)
다시 광고로 돌아오면, 이 광고 제목은 ‘달려라 피구왕’이 아니라 ‘피구왕 7합’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패키지 하나에는 ‘달려라 피구왕’ 뿐 아니라 게임라인 제작 게임 6종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위에 소개된 게임들입니다.
다만, 대표작인 ‘달려라 피구왕’만 봐도 알 수 있듯 나머지 게임들도 영 좋은 게임은 아니었습니다. ‘장풍 2’는 아무리 봐도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복붙했습니다. ‘월드컵축구’는 열혈고교 축구 게임과 흡사하고, ‘버그트리스’는 ‘테트리스’에 ‘뿌요뿌요’식 방해 시스템을 섞어 놓은 듯한 게임입니다. 마지막 ‘아기공룡 둘리’는 슈팅게임이라는 설명과 게임 스크린샷을 의도적으로 감춘 듯한 모습인데요, 제일 마지막에 짤막하게 소개돼 있는 걸 감안하면 왠지 제대로 된 게임은 아닐 것 같습니다.
*덤으로 보는 B급 게임광고
▲ 에러율 0%를 내세우며 에어프랑스 테러 사건을 내세운 SKC 광고 (사진출처: 게임메카 DB)
오늘의 B급 광고는 SKC 플로피디스크입니다. ‘에러율 0%’를 주제로 한 광고인데, 왠지 모르게 전면에는 특공대원으로 보이는 모델이 서 있고, 뒷배경에는 ‘에어프랑스’ 여객기가 나와 있습니다. 대체 무슨 연관일까요?
이 광고가 나오게 된 배경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994년 크리스마스 이브,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파리로 출발하려던 에어프랑스 여객기에 보안경찰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들이 들이닥쳐 승객들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 정부는 마르세유 마리냐 공항에서 대대적인 테러 진압작전을 벌여 테러범을 전원 사살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아마도 SKC는 이러한 조직적이고 치밀한 특수부대의 작전처럼, 자사 플로피디스크도 안전하다는 것을 어필하려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사건은 사건 해결을 위해 군사력을 투입하려는 프랑스 정부와 자국 내 사건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알제리 정부 간 불협화음으로 인해 인질 몇 명이 공개 처형됐고, 진압 과정에서도 항공기 진입이 늦어지며 테러범들이 대응할 시간을 벌어줘 총 13명의 승객 사상자를 냈습니다. 에러율 0%를 광고하기엔 뭔가 부적절한 예시가 아니었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