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머들의 온라인 탑골공원, '거상' 추억 탐방기
2019.10.16 18:20 게임메카 이재오 기자
1999년 출시된 노래인 이정현 '와' 고화질 라이브 영상이 유튜브에서 나온다. 채팅창에는 이정현 특유의 손가락 마이크를 형상화한 '<<-' 이모티콘과 함께 키보드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탑골공원'인 지상파 방송사 유튜브 음악 채널에 가면 24시간 내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 온라인 탑골공원이 40대와 30대, 20대, 심지어는 10대 사이에서 불같은 인기를 얻으며, 여기저기서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콘텐츠들이 넘쳐나고 있다.
게임계에도 수많은 고전게임들이 있지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란 표현과 가장 어울리는 온라인 탑골공원 MMORPG를 꼽자면 역시 '천하제일상 거상(이하 거상)' 만한 게임이 없다. 물론 '바람의 나라'처럼 더 오래된 게임도 있지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활성화 되어 있는 게임을 찾으라면 역시 '거상'만한 것이 없다. 최근 한창 근무시간에도 몰래몰래 키보드 떼창에 참여하고 있는 기자가, 학창시절 기억을 살려 무려 15년 만에 '거상' 추억 탐방에 나섰다.
2019년에도 대기열이 잡히는 건재함
'거상'은 본래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부록 게임으로 시작했으나 대체 역사와 RTS 전투, MMORPG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콘셉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2002년에 독립한 작품이다. 2000년대 초중반, 청소년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전성기를 맞이했었다.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선 '스타크래프트' 못지않게 반드시 해봐야 하는 게임 중 하나였으며, 게임을 좋아하는 남학생들은 쉬는 시간 마다 삼삼오오 모여서 이 게임에 대한 난상토론을 벌이곤 했다. 기자 역시 그 당시 '거상'을 즐겼던 평범한 남학생 중 한 명이었다.
당시 기억을 안고 무려 15년 만에 재접속을 시도해봤다. 사람이 제일 많다는 주작 서버에 접속을 했는데, 무려 접속 대기열이 잡혔다. 주말 밤이라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오래된 게임에서 접속 대기까지 걸릴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다.
어떻게든 게임에 접속해 워프를 타고(거상에선 '지름길'이라고 부른다) 한양에 도착해보니 내 캐릭터가 어디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시끌벅적한 분위기 그 자체. 당시에는 신수는 커녕 거북차 하나만 들고 있어도 사람들의 선망어린 눈빛을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너나 나나 옆구리에 청룡과 백호를 용병으로 데리고 다닐 만큼 화려해진 한양의 비주얼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오죽했으면 15년 전엔 귀해서 구경 한 번 하기 힘들었던 '봉황비조'가 발에 치일 정도로 흔해졌을까. 조심스럽게 한양에 모인 사람들에게 "안녕하세요, 저 15년 만에 접속했습니다"라며 인사를 날려보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자연스럽게 묻힌 건 덤이다.
옛날에 보던 용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구나
당시 밤새 '거상'을 즐기고 아침에 친구들과 모여 나눴던 이야기 주제는 대부분 '어떤 용병이 제일 쓸만한가?' 였다. 거상은 캐릭터 못지 않게 얼마나 강한 용병을 데리고 다니는지가 중요했다.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용병은 역시 '유생'과 '늑대낭인(일명 늑낭)'이었다. 그중에서도 유생의 경우 유성룡으로 전직이 가능했으며, 포박술을 이용해 적에게 CC기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파티에 없어선 안 되는 존재였다. 오죽했으면 좌판마다 '레벨 40 유생 파초선'을 팔고 있었을 정도. 기억상 늑대낭인은 별로 안 좋았지만 멋있다는 이유로 사용했던 거 같다.
게임에 들어가 조선과 일본, 대만의 주막을 돌아다니며 용병을 찾아보니 당시 용병이 그대로 보였다. 다만, 사냥 메타가 많이 바뀌고 캐릭터 및 레벨 인플레이션이 심하게 진행돼서 유생이나 늑낭 같은 비전직 캐릭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구경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레벨이 150이 되어야 가능한 2차 전직 캐릭터인 '봉황비조'와 '화룡차' 조차 쓸모없는 용병으로 취급 받을 정도다. 다들 최종 테크인 청룡, 기린, 주작, 잭호 등을 데리고 다니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아무리 추억보정을 감안해도 유성룡과 늑낭은 사용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좌판 앞에서 "유성룡 파초선 찾습니다"라고 외쳤지만 다들 '쟤 뭐지' 라는 눈빛과 함께 외면했다. 단 하나 나의 추억을 지켜준 부분이 있다면 '빙석술'로 몬스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던 '순비연'이 아직 건재하다는 점이었다.
천도복숭아를 팔던 저잣거리는 인력시장 Ver. 2019가 되었네
본격적인 사냥에 앞서 저잣거리에 들렀다. 과거엔 저잣거리가 '거상'의 핵심 장소였다. 게임을 진행하다 막히는 게 있다면 일단 저잣거리부터 들렀을 정도였다. 당시 저잣거리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많이 샀던 아이템은 역시 천도복숭아 같은 포만감 만땅 음식과 경험치 작으로 레벨업 시킨 각종 용병들이었다. 흡사 노예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수많은 도술사와 야수전사, 늑대낭인 등이 이 저잣거리에서 주인을 섬기고 사회로 진출했었다.
2019년 저잣거리 분위기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예전처럼 전직을 앞둔 용병을 팔기보다는 최소 레벨 200 이상 음양사나 화포수, 수도승 등 당장에 전력이 되는 고렙 용병이 팔린다는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여전히 노예시장 못지 않은 인력사무소가 형성돼 있었다.
하나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예전엔 '천도복숭아'처럼 포만감을 채워주는 음식 아이템이 많이 진열돼 있었는데, 지금은 삼색채경단이나, 백호의 전투화, 주술 비법 같은 장비나 의복 재료가 더 많이 팔리고 있었다. 좌판에서 물건을 파는 유저한테 물어보니 이제는 다들 돈이 넘쳐서 음식은 주막에서 구매하면 그만이고, 장비도 다 맞춘 만렙 유저가 많아서 치장용 장비나 재료가 더욱 잘 팔린다고 하더라. 천도복숭아는 어디갔냐고 말했다가 언제적 이야기 하냐며 혼난 건 비밀이다.
조선 최고의 근본 사냥터는 '한라산'과 '무령왕릉'이지
온라인 탑골공원 세대에게 '거상' 사냥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부르라면 아마도 두 곳이 언급될 것이다. 바로 '한라산'과 '무령왕릉'이다. 특히 '한라산'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조선의 '근본' 던전으로, 여기서 '황룡'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던전이었다. 만렙 찍어본 유저라면 황룡이 떨구는 비늘과 '낡은 동령'이라는 아이템을 얻기 위해 매일 게임 속에서 한라산을 등반해봤을 것이다. 여기 한라산은 엣날부터 활화산이란 설정이 있어 백록담에 용암이 고여있으며 이를 반영해 화구산이라는 또 다른 던전이 존재하는데, 재밌게도 한라산은 불과 얼마 전인 2014년 휴화산에서 '활화산'으로 재분류 된 바 있다. 지질학자를 뛰어넘는 개발자들의 어마어마한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무령왕릉'도 거상 최고의 인기 던전 중 하나였던 만큼 추억을 회상하며 들러봤다. 정확히 어떤 퀘스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도굴꾼을 250마리도 아니고 2,500마리를 잡아야 깰 수 있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무령왕릉에서 한 달 가까이 살았던 추억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무령왕릉에는 벌집 속에 벌떼마냥 수많은 도굴꾼이 살고 있으며, 2시간에 한 번씩만 나타나던 고체력 몬스터 '기마창수의 혼'도 여전하다. 참고로 지금도 기마창수의 혼의 맷집은 아직도 건재해서 만렙 신수를 다수 기용해서 갔음에도 승리하는데 15분이 넘게 걸렸다.
참고로, '무령왕릉'이나 '한라산'이나 지금은 흘러간 옛 추억의 장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 말을 걸어봤지만 부동석처럼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마도 한라산 폭포 밑에서 도를 닦으며 시간을 낚는 고인물 유저가 아니었을까.
인도 찍고 우리 땅 독도에서 마무리한 탐방기
비교적 최근, '거상'에 인도 지역이 추가됐단 이야기를 듣고 인도로 여행을 떠나봤다. 가는 방법이 다소 황당했는데, 일단 무투장을 통해 인도로 이동한 다음 사막여왕거미에게 죽으면 캘커타로 자동으로 가게 된다. 참고로 사막여왕거미의 전투력은 어마무시하기 때문에 만렙 용병 파티로도 금방 죽을 수 있으니 어떻게 죽을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인도에 오자마자 느낀 점은, 이 곳의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조선 던전 최종 보스 못지않은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냐면 가장 만만하게 생긴 벵골 여우가 500만에 가까운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라산 황룡과 맡먹는 전투력이다. 귀엽고 조그마해서 애완동물로 키우면 딱 좋게 생겼다고 냉큼 덤벼들었다가 데리고 있던 청룡이 사망할 정도였다. 결국 기자는 벵골 여우의 텃세를 이기지 못하고 금방 조선으로 돌아와서 짧은 인도여행을 마무리해야 했다.
슬슬 온라인 탑골공원에서 나가야 할 때가 왔지만, 그래도 독도는 봐야겠다는 생각에 동해로 향했다. 거상에서 독도는 현실과는 달리, 울릉도보다 크고 넓은 것이 특징이다. 넓다고 해서 딱히 새로운 던전이 있거나 여기에만 사는 몬스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징적인 장소다 보니 기분이 남다르긴 하다. 독도에 방문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대한민국 동쪽 땅끝'이라고 쓰여있는 비석과 태극기가 꽂혀있는 곳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차오르는 애국심(?)과 함께 15년 만의 '거상' 탐방기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