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깨진 밸런스와 메타로, e스포츠 재미 샌다
2020.02.21 10:02 게임메카 이재오 기자
최근 게임의 망가진 밸런스나 메타가 e스포츠 재미는 물론 권위까지 떨어뜨리는 일이 줄곧 발생하고 있다. e스포츠는 게이머 입장에서 보는 재미를 충족하고, 게임 플레이에 대한 가장 선진적인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매체다. 그러나 e스포츠가 다채로운 전략과 뛰어난 경기력으로 메타를 선도하기는커녕 몇 개월째 고착화된 내용으로 지루한 경기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게임은 오버워치다. 작년 8월, 오버워치는 메타의 고착화를 타개하고자 2탱 2딜 2힐 역할 고정 규칙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는 다양한 전략으로 메타를 선도하고 파훼법을 구상해야 하는 프로 경기를 경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는 둠피스트가 OP 영웅으로 군림하고 있던 캐릭터 밸런스를 고치지 않아 '둠피스트를 잘하는 팀이 이긴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누구보다 큰 관심과 주목을 받아야 했던 '오버워치 리그 2019 그랜드 파이널'은 출범시즌에는 다소 못 미치는 시청률과 흥행을 기록했다. 이후 진행된 오버워치 컨텐더스 건틀릿, 오버워치 월드컵 등의 글로벌 대회 또한 예전만큼의 인기와 위상을 자랑하지 못했다.
철권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작년 12월 철권 7에 간류와 함께 추가된 신 캐릭터 '리로이 스미스'가 무적에 가까운 강력한 성능으로 세계적인 격투게임 대회 EVO 재팬을 뒤집어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리로이 하나만 가지고 출전한 지역 고수들이 수년간 프로 생활을 해왔던 초일류 선수들의 주력 캐릭터를 꺾고 대회를 점령해 버린 것이다. 실제로 8강에 진출한 선수 중 6명이 리로이 사용자였으며, 우승한 선수 역시 리로이 유저였다. 대회 우승자조차 소감으로 "리로이를 골라라"라고 말했을 만큼 대회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했다.
사실 철권 7은 게임 출시 이후 외부 IP 캐릭터를 추가할 때마다 좋은 성능 탓에 밸런스에 대한 지적을 받아왔지만, 선수들의 연구나 재빠른 패치로 대회를 점령할 만큼 악명을 떨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리로이 스미스는 철권 모든 시리즈를 통틀어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규격 외의 성능으로 출시된 지 무려 2개월 만에 대전환경은 물론 2020 EVO 재팬같은 대형 e스포츠 대회에 마저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실제로 2020 EVO 재팬은 '리로이 재팬', '리로이7' 등으로 불리며 많은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사태에 선수들과 전문가들 또한 강한 반발을 표하고 있다. 15년 넘게 철권 프로게이머로 활약해온 '무릎' 배재민은 이번 대회에 대해 "아예 이길 방법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며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철권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 밖에도 철권의 많은 탑 플레이어들이 리로이의 성능에 대해 반색했으며, 그중에는 은퇴를 생각한 선수도 있었다. 굳이 은퇴가 아니어도, 겨우 2개월 만에 게임에 대한 흥미가 많이 떨어졌으며 개발진이 방향성을 완전히 잘못 잡고 있다고 비판했다.
오버워치와 철권을 넘어서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 e스포츠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10시즌 패치의 영향으로 이번 시즌에 진행되는 경기가 전반적으로 지루하고 재미없어진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경기 템포가 느려지고 텐션이 낮아지고 있는 가운데, 특히나 국내 리그인 LCK는 경기 시간을 비롯해 장기전 비율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시간 대비 킬 수가 지나치게 낮은 경기가 지속된다는 지적이 많다.
이 같은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기가 2020 LCK 스프링 20번째 경기인 T1과 젠지의 대결이었다. 3세트에 걸친 이 경기는 두 팀이 모두 지나치게 교전을 피하면서 장로 드래곤 앞에서 싸움 없이 5분간 대치만 하며 시간을 태우는 경우가 반복됐다. 해설진은 '외교전이다', '우리 5분 더한다!'라면서 경기를 길어지게 만드는 양 팀의 운영을 비판했으며, 채팅창은 지루하고 졸린다는 것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으로 도배됐다.
이 같은 양상이 계속된 이유는 10시즌 업데이트의 영향이 가장 크다. 에픽 몬스터인 용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대규모 한타가 벌어질 이유가 적어지고, 정글 챔피언의 영향력이 적어지면서 적을 암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진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결국 경기가 늘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시즌 업데이트에 견줄 대대적인 패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롤 운영 방침상 그 정도의 대규모 패치가 시즌 중 진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LCK 해설을 담당하고 있는 이현우는 개인 방송을 통해 "밸런스 패치를 통해 몇몇 문제는 개선될 수 있지만, 게임 진행시간에 대한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힘들다"고 말했다.
e스포츠의 재미와 흥행이 게임의 밸런스와 메타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것은 절대로 좋은 현상이라 볼 수 없다. 특히, 철권7처럼 게임 자체 권위를 실추시킬 정도라면 큰 문제가 된다. 게임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것은 대회를 유지하는 근간인 선수와 팬이 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게임의 수명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다. 유리창이 깨진 차와 멀쩡한 중고차를 갔다 놓았을 때, 멀쩡한 차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반면, 유리창이 깨진 차는 금방 부숴져 버렸다는 내용이다. 사람들이 깨진 유리창을 보고는 차가 고장난 줄 알고 부품을 가져가거나 틈 사이로 물건을 훔쳐가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창 같은 아주 사소한 무질서가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확산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재미없는 메타는 어떻게 보면 깨진 유리창과 같다. 얼핏 보면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문제이며, 언제든지 갑작스레 바뀔 수 있는 것이 메타다. 하지만, 일반 게이머는 물론 선수나 전문가가 느끼기에도 e스포츠 경기를 재미없게 하는 메타라면 사소한 문제라도 재빨리 수정하는 것이 옳다.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는 사소한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