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한 논문만 53편, MazM 페치카 고증에 전문가도 놀랐다
2020.05.19 18:27 게임메카 서형걸 기자
개발사 '자라나는씨앗'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오즈의 마법사 등 유명 문학 작품을 다룬 스토리게임 MazM 시리즈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신작 ‘MazM: 페치카’를 준비하고 있는데 전작과 달리 비교적 생소한 한국 근대사, 그 중에서도 연해주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분야이기에 김효택 대표는 “고증에 신경을 쓰면서, 재미까지 챙기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역사 연구자 모임 만인만색 연구자 네트워크(이하 만인만색)의 김태현 공동대표는 자라나는씨앗의 고증을 위한 노력에 대해 “전문 연구자의 박사 논문보다도 더 많은 자료를 조사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만인만색 측에서 실제 역사와 다른 내용을 넣도록 권유할 정도였다. 입장이 살짝 뒤바뀐 것 같은 자라나는씨앗과 만인만색은 이후 단발적인 자문을 넘어 엄무협력에 이르렀다. 게임메카는 서울의 한 카페에서 자라나는씨앗 김효택 대표와 만인만색 김태현 공동대표를 만나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전문가가 말릴 정도의 철저한 고증
만인만색을 만나기 전, 자라나는씨앗은 ‘MazM: 페치카’를 위해 자체적으로 자료를 조사했다. 찾아서 읽은 논문만 53편에 다수의 서적까지 섭렵한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에 대해 김효택 대표는 “기획자들 사이에서 ‘실수하면 안 된다’라는 공감대가 있어 열심히 공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구한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주무대로 오리지널 캐릭터와 실존인물이 어우러진 MazM: 페치카의 전체적인 줄거리가 완성됐다. 얼마나 많은 부담감을 안고 작업에 임했는지 김효택 대표는 “기획자들에게 ‘차기작도 역사를 소재로 하면 어떨까?’하는 물은 적이 있는데, 다들 손사래를 쳤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부담감을 해소해준 것이 바로 만인만색이었다.
김효택 대표는 “나중에 알고 보니 ‘MazM: 페치카’ 개발 초기부터 만인만색에 도움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만인만색은 지난 2015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를 위한 신진 역사 연구자 모임에서 출발해 현재는 학술 활동뿐 아니라 실생활에서의 자유로운 응용방법도 강구하고 있다. 김효택 대표는 지인으로부터 ‘역사공작단’이라는 만인만색이 운영하는 팟캐스트를 소개받아 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라나는씨앗과 만인만색의 공식적인 첫 만남은 작년 여름이었다. 만인만색 측에서 자라나는씨앗이 준비한 자료를 보고 고증에 대해 좀 더 철저할 것을 요구했을 것 같지만, 실제는 그 반대였다. 김태현 만인만색 공동대표는 당시를 회상하며 “역사 고증에 대한 강박이 느껴질 정도였다”며, “오히려 만인만색에서 게임적 허용이 가능한 부분에 대해 조언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게임 속에 등장하는 ‘여성 공산당원’ 캐릭터였다. 역사적으로 여성 공산당원이 등장하는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게임 속에 여성 공산당원이 등장할 경우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김태현 공동대표는 “스토리에 깊이와 흥미를 더할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이기에 현재적 관점에서 충분히 재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며, “게임 내에 마련돼 있는 잡학사전 기능을 통해 이러한 점을 명시하고 있기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만인만색의 이와 같은 대외 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치는 연구자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김태현 공동대표는 “게임 개발에 도움을 주는 것은 연구의 일환이자 취미라고 생각한다”며, “연구실에서 논문을 쓰는 것 못지않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유연한 사고는 한 사람의 게이머이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현 공동대표는 “게임을 하는 것을 좋아하며, 특히 스타크래프트는 20년 넘게 즐기고 있다며, “만인만색에 소속된 연구자 중에는 인디게임은 물론, 보드게임까지 찾아 즐기는 코어 게이머도 다수 존재한다”고 게임에 대한 높은 관심을 내비쳤다.
고증과 재미를 함께 잡는 2인 3각
김태현 공동대표는 이번 자문이 이렇게 오래 이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며, “보통 자문이라 하면 1, 2회 정도 만나 전반적인 내용을 검토하는 선에서 끝난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를 이해하는 게임 개발사인 자라나는씨앗과 게임을 이해하는 역사 연구자 단체인 만인만색은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업무협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자라나는씨앗과 만인만색은 기초적인 사료 해석과 사실관계 확인은 물론, 스토리 전반에 걸친 개연성 검증까지 협업하고 있다. 김효택 대표는 “스토리를 완성하기 전, 플롯과 인물 설정이 나오면 만인만색 측에 전달한다”며, “부족한 개연성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피드백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또한 만인만색 측에서는 게임 개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자라나는씨앗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2인 3각을 통해 완성된 MazM: 페치카의 스토리에 대해 김효택 대표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스토리게임 마니아들에게도 흥미로울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반일 감정 또는 애국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아니라, 보편적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처절한 삶의 현장을 무대로 한 드라마라는 것이다.
MazM: 페치카가 오리지널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인공 표트르벨로프를 비롯한 다양한 가상인물은 많은 고민을 안고 있는 청년들로, 전세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김효택 대표는 “한국사를 몰라도, 역사적 실존 인물을 처음 접했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며, “단순히 한국사 지식을 전달하기보다, 매력적인 스토리로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끔 스토리를 구상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다양한 국적의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점도 흥미를 끌 수 있는 부분이다. 예를 들어 게임에는 ‘라돌라 가이다’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한국 독립운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체코의 장군이다. 김태현 대표는 “한국사를 소재로 한 게임에서 저 멀리 체코 사람이 등장한다는 부분이 신기하게 여겨질 것이다”라며, “이와 같은 캐릭터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 게이머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MazM: 페치카’는 시리즈 최초로 한국어는 물론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로 동시 번역돼 출시될 예정이다. 특히 한-러 번역의 경우 이전까지 한국어 -> 영어 -> 러시아어의 중역이었다면 이번에는 한-러 직역이어서 보다 정확한 의미전달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김효택 대표와 김태현 공동대표는 이번 MazM: 페치카가 향후 한국사 소재 게임들의 게임적 허용에 대한 기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를 통해 개발자는 고증에 대한 부담을 덜고, 역사 연구자는 역사가 학문의 영역만이 아닌 실생활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공공재’라는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 김효택 대표는 MazM 시리즈 팬들이 기뻐할만한 또 다른 신작 소식을 전했다. MazM: 페치카 다음에 나올 게임은 닌텐도 스위치로도 나온 MazM: 지킬 앤 하이드의 후속작이라는 것이다. 현재 MazM: 페치카와 함께 개발 중이며, 자세한 내용은 추후 공개할 것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