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세이더 킹즈 3, 중세가 이렇게 험난합니다
2020.09.09 17:34 게임메카 서형걸 기자
‘역설사’란 별명으로 유명한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이하 패러독스)는 대전략 장르의 장인이라 할 수 있다. 인류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거시적인 접근이 아닌, 특정 시대를 상세하게 다루는 미시적 관점이 특징이며, 고대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게임이 존재한다. 그 중에서 세계 제 2차 대전을 무대로 한 하츠 오브 아이언, 근세가 배경인 유로파 유니버설리스와 함께 중세를 다룬 크루세이더 킹즈가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언어의 장벽 때문에 소수의 마니아들만 그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9월 2일 나온 신작 크루세이더 킹즈 3는 시리즈 최초로 공식 한국어를 지원한다. 기자도 이 같은 소식에 귀가 솔깃했던 ‘신규 유저’다. 유럽과 아프리카, 중앙아시아를 거쳐 티베트까지 걸쳐 있는 거대한 지도를 봤을 때 이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이 샘솟았다. 그런데 이는 헛된 꿈이었다. 험난한 중세에서는 한 몸 건사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것을 10시간 동안 북유럽 한구석에서 티격태격한 이후에야 깨달은 것이다.
피를 나눈 형제도 눈엣가시가 된다
크루세이더 킹즈 3는 실시간 대전략 게임이다. 게임 진행 속도는 5가지로 조절할 수 있으며, 일시정지를 이용해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영지를 개발하고 병력을 생산해 주변 세력보다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대전략 게임과 유사하다. 플레이어 본인인 영주를 키우는 RPG 요소도 있다. 외교, 전투, 관리, 계책, 학습 등 5가지 인생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으며, 일정 경험치마다 얻는 점수를 소모해 이로운 특성을 해금할 수 있다.
이 같은 기본적인 시스템 소개만으로는 게임 시작 후 10시간 동안 북유럽에 갇혀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크루세이더 킹즈 3의 중세 묘사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세세하기 때문이다. 먼저 게임에서 땅을 넓히려면 크게 전쟁과 외교, 2가지 방법을 구사해야 하는데,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작을 부려야 한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족장이 딱히 나보다 약해 보인다고 해서 무턱대고 전쟁을 걸 수 없다. 탈취하고 싶은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상태이거나, 이단을 처벌한다는 종교적 이유 등 적절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명분이 있더라도 위신이나 신앙도를 전쟁 규모에 따라 소모해야 하기에 싸움닭처럼 구는 것은 쉽지 않다.
명분을 얻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혈연 또는 정략결혼, 개종 등은 물론, 가신에게 명분을 위조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 게임상 시간으로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수 년간 공을 들여야 백작령 정도 규모의 땅을 얻을 수 있다. 크루세이더 킹즈 3 지역 구분은 매우 세세해서 가장 작은 단위인 남작령부터 백작령, 공작령, 왕국령, 제국령 등 차등적으로 나뉜다. 백작령의 규모는 전체 지도와 비교하면 세발의 피 정도다.
갖은 어려움을 돌파해 영역을 확장한 다음 발생하는 문제는 ‘유지’다. 플레이어가 조작하는 영주가 사망할 경우, 대표 작위 승계자로 이어서 할 수 있는데 대다수 영주들은 ‘연합 분할’을 초기 상속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다. 작위가 모든 자녀들에게 동등하게 분배되는 방식인데,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매우 골치가 아프다. 형제가 있을 경우 독립세력으로 떨어져 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기자는 핀란드 대족장으로 시작해 핀란드 대족장령(백작령에 해당)을 통일하고, 이웃에 위치한 사보 대족장령도 복속했다. 그런데 1대 대족장이 사망하자 플레이어는 핀란드 대족장직을 계승하고, 동생이 사보 대족장직을 이어 받으면서 영토가 반으로 쪼개졌다. 연합 분할 방식을 탈피하기까지는 쉽지 않기에,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시작할 경우 플레이 내내 한 뼘의 영토도 넓히지 못하는 참사가 벌어질 수 있다. 참고로 방금 전 예시에서는 동생이 주군(스웨덴 혈통의 핀란드왕)의 전쟁에 참전했다가 요절하는 바람에 가까스로 영역을 회복해 안도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땅이 더 소중한 셈이다.
대전략? 이 게임은 중세 영주 시뮬레이터다
이 외에도 친척의 배신, 반란, 외세와 라이벌 대족장의 침략 등 ‘중세의 쓴맛’을 제대로 느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크루세이더 킹즈 3를 하는 플레이어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정복자를 꿈꾸지 말고, 진짜 중세를 살아가는 ‘영주 1’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게임은 중세 영주 시뮬레이터 그 자체였다.
핀란드 대족장이라고 하더라도 바다 건너 스웨덴 왕에 비하면 골목대장에 불과하니 먼저 머리를 숙인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폴란드 국왕이 프로이센 대족장인 플레이어를 이교도라 칭하며 성전을 걸어올 경우, 기존에 신봉하던 종교를 거리낌없이 버리고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쟁의 명분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이후 교회의 수호자를 자칭하며 주변 이교도 군주들을 향해 창을 겨누고, 교황 성하의 십자군 소집에 가장 먼저 손을 들 줄 알아야 한다. 참고로 십자군 원정에서 공을 세우면 보상이 짭짤하다.
내정에서도 현대인의 마인드를 버리고 중세인처럼 행동해야 한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장남 이하 아들들의 상속권을 박탈하자. 이 같은 행위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식들에게도 득이 되는데, 형제가 서로 눈엣가시처럼 여길 경우 눈뜨고 볼 수 없는 골육상쟁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혼인은 개인적 애정보다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시도해야 하며, 연회와 사냥, 그리고 모략과 선물 등으로 대영주의 권위를 공고히 함과 동시에 봉신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
플레이어와 가족 구성원의 ‘건강’도 중요하다. 전쟁에 너무 열중하다 작위를 이을 자식이 모두 전사한다면 플레이어의 땅은 머지 않아 다른 봉신에게 빼앗기게 된다. 각종 사건/사고(아내와 가신간 불륜, 사생아 탄생 등)로 스트레스가 쌓일 때 적절한 해소 방법을 찾지 못할 경우 정신 붕괴에 이를 수 있다. 또한 궁정의사가 무능하다면? 각종 병치레는 물론, 자식이 요절하는 슬픔을 겪게 된다.
물론 운명이라 할 수 밖에 없는 사건들도 부지기수다. 영주가 선천적으로 신체 또는 정신에 이상이 있을 수도 있다. 작위 계승 직후 개최한 첫 연회에서 갑작스레 숨을 거둬 재위기간을 1년도 채 채우지 못할 수도 있다. 그야말로 게임적 허용을 찾기 쉽지 않은, 지극히 현실적인 중세가 크루세이더 킹즈 3에 펼쳐져 있다.
이처럼 크루세이더 킹즈 3는 국내 게이머에게 익숙한 대전략과 결을 달리하는 게임이다. 때문에 신규 유저라면 게임 시스템을 파악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더군다나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 지명과 인명으로 인해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좌절의 순간을 지나 게임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면, 이보다 깊이 있게 파고들 수 있는 대전략 게임은 없다고 확신한다. 간혹 보이는 폰트 깨짐은 아쉽지만, 공식 한국어 지원이 반가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