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사전에 따르면 ‘노동조합(Labor Union)’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것을 기본적 목적으로 하는 노동계급의 자주적인 단체이다. 노동조합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임금과 노동, 그리고 시간 등 노동자들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하는 데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지위개선을 위한 정치활동을 적극 수행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산업군에는 이러한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충실하게 활동한다. 우리가 방송 언론을 통해 종종 접하는 노동자와 사용자 간의 의견 마찰로 이슈가 되는 노사분쟁 역시 노동조합의 활동 중 하나다. 그렇다면 게임산업에는 노동조합이 있을까?
| 결론부터 말하면 아직은 없다. 야근은 기본이요, 밤샘은 옵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들릴 만큼 강도 높은 근로 환경으로 짜여 있는 것이 IT 업계다. 특히, 개발 인력들은 빠듯한 일정에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시간에 쫓긴다. 물리적인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주말 근무 역시 일상이다. 이렇다 보니 몇몇 대형 업체를 제외하고는 근무 환경이 윤택할 리 만무하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이 없다니, 의문일 수밖에 없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 그 정도는 감내하지 않을까? 라고 한다면 그건 이제 옛말. 만들던 게임을 끝까지 완성하고자 열정 하나만으로 몇 달 월급을 못 받아도 일을 하는 순진한 ‘열정 노동자’가 되기에는 지금의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각종 규제, 부당한 대우 등으로 엄두도 못 낼 상황이다. ◀ H2 소프트의 김종득 개발자 |
이런 상황에서 지난 26일, 게임개발자연대(가칭)가 공식 성명서를 통해 출범 추진에 나섰다. 이 단체는 게임 개발자들의 인권과 권익, 그리고 게임 개발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바야흐로 게임업계 종사자들로 구성된 최초의 노동조합이 등장한 것이다.
게임개발자연대가 업계 최초의 노동조합 성격을 띠면서 관계자들의 이목이 쏠리고 있는데, H2 소프트의 스마트폰게임 개발자이자 게임개발자연대 구성을 발의한 김종득 개발자로부터 이들 단체의 시작과 비전을 들어봤다.
게임업계 종사자들의 단체를 새로 설립하게 된 계기와 배경이 어떻게 되는가? 준비 과정 등을 자세히 알려달라.
오래전부터 게임개발자협회(KGDA)가 실제 개발자들의 협회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에 많은 한계가 있음을 실감했다. 개발자협회 2대 회장이셨던 김광삼 교수나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개발자들과 몇 차례 다른 조직의 설립 여부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조직을 구성하는데 여러 가지 준비와 여건이 필요해서 술자리 성토 정도로만 하고 지냈다. 그러던 참에 이번 게임산업협회의 명칭 변경을 두고 트위터에서 비웃으며 자조 섞인 농담들을 하다가 '지금이라도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개설하게 됐다.
현재 단체 설립은 어느 정도로 준비되었나? 업계 최초의 종사자들로 구성된 연대를 준비하며 고충은 없는지 궁금하다.
일단 온라인에서 어느 정도 개발자가 모이면 오프라인으로 공식 준비 모임을 하고, 모임의 방향에 대해서 모색하는 자리를 가지려고 한다. 온라인에서는 많은 개발자가 의욕적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모임의 성격이나 지향점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하는 이들이 아직 부족한 것 같다. 우선 모임의 성격을 명확하게 정하고 시작할 계획이다.
이 연대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공식적으로 발족할 텐데 그러면 상근 직원이라던가 하는 부가적인 것들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부터 현실적인 부분이 문제가 된다. (모임에 참여한 징가의 직원 제보를 따르면) 미국의 애니메이션 조합 같은 경우 한 달 급여에서 소정의 조합비를 내고, 이 자금을 통해 독립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이렇게 운영되는 조합에 가입하면 애니메이션 회사가 근로자에게 터무니없는 저임금이나 부당한 대우, 임금 체납 등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연대를 준비하면서 고민인 부분이라면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해서 연대 구성원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가게 하느냐는 것이다. 또 운영에 필요한 조합비를 얼마나 어떻게 받을 것이냐 하는 것이 고민이다.
사실 더 중요한 부분이라면 게임 개발자가 노동자라는 인식이 너무 약하다는 점이다. 여러 측면이 있을 텐데 많은 1세대 개발자들이 스스로 게임 개발자라고 인식하고 현업에서 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창업을 했거나 주요 경영진이 되면서 스스로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조합 성격의 '개발자 조합'이 아니라 스스로 개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전체를 아울러 공동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는 조직으로서 '개발자 연대'로 제안을 했다.
연대의 인원 규모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현재 인원은 몇 명인가? 또한, 연대가 포용할 게임업계 종사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현재 페이스북의 '게임 개발자 연대(가칭) 준비 모임'에 가입한 사람은 약 250명 정도다. 장기적으로는 업계 추산 전체 인원을 5만 정도로 잡고 10% 정도 가입을 최소 목표로 잡고 있다. 해외의 노조 가입률이 30% 정도 된다고 하는데 국내는 10%가 채 안 된다.
'개발자'라는 단어는 굉장히 포괄적인 단어라서, 게임 개발에 관여하는 모든 분을 아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임 설명에도 '게임 개발자 및 QA, 운영, 마케팅 등 관련 종사자'라고 했다, 개발에 직접 관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인접한 사람들까지 포함하고 싶다. 게임 개발이라는 게 옛날엔 게임 디자이너, 아티스트, 프로그래머 정도에 조금 넓게 보면 사운드 작업자 정도를 포함했는데, 사실 현대의 게임 개발이라는 건 그 외에도 마케팅이라던가 운영 등 굉장히 세분되어 있다. 그래서 '게임 개발자 = 게임 개발 관련 종사자'라고 하고 싶다.
현재 한국에는 한국게임산업협회와 한국게임개발자협회, 두 곳이 대표 단체로 자리하고 있다. 이들과 어떠한 차별화된 포지션을 취할 예정인가. 현재 생각하고 있는 연대의 활동 방향성과 비전이 궁금하다.
게임산업협회는 경영자들과 회사들이 만든 단체니 게임 산업의 사업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겠고, 게임개발자협회는 처음 신비로 동호회에서 시작했는데 정부에서 사단법인으로 바꾸기를 요청했다. 처음에는 개발자들의 정보 교환과 교류 등에 꽤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부의 정책이나 언론의 게임 관련 부정적인 시각들에 대해서 발언해야 했지만, 정부의 지원금이나 기관과의 관계 등으로 할 수 없게 됐다.
개발자연대는 이런 교훈을 기반으로 한다고 보면 된다. 게임 사업과 관련된 단체도 아니고, 정부의 지원을 받는 개발자 단체도 아니다. 온전하게 개발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로 개발자의 시각으로 활동할 것이다.
지난 30일, 게임에 대한 새로운 규제 법안이 발의되는 등 게임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장기간 지속하고 있다. 이번에 법안을 대표 발의한 신의진 의원에게 공개 토론을 요청할 예정이라 들었다. 토론회 개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사항이 있으면 설명해주길 바란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내부적으로 정부의 법안에 대해서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관한 토론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일각에서는 과도한 게임 플레이 때문인 부작용은 실재하는 현상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즉, 업계에서도 게임의 부작용을 자율적으로 해결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른바 ‘자율규제’로 압축되는 이 사안에 대해서도 힘을 발휘할 계획이 있는가?
과도한 게임 플레이로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게임만이 아니라 학원 수업이라던가 운동, 주식 투자 등 모든 것이 과하면 좋은 게 없지 않나? 특히 최근 음주 폭력(주폭) 관련해서 정부에서 힘을 싣고 있는 분위기인데, 주폭이 심각하여 주류 출하량을 줄일 수는 있겠지만, 일 인당 음용량을 줄여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건 개개인이나 주변에서 조언하고 관심을 둬 조절하게 할 문제다.
사실 술과 비교하기가 좀 모호한데, 술이 이번 4대 중독 물질에 포함되고 생산, 마케팅 등 관련 산업 전반을 정부에서 규제하겠다는 이 법안은 과학적으로 과음이 몸에 좋지 않다는 내용이 검증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은 과학적, 의학적으로 '게임 중독(addiction)'이라는 단어에 관해서 규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업계의 자율규제는 물론 필요한 부분이다. 한도 금액 같은 것을 설정할 수 없다면 절제력이 없는 아이들이 사고 싶은 물건들을 마구 결제할 것이고, 가계에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대체로 이런 사례를 자주 경험해본 회사들은 이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하고 있기도 하다. 모바일 게임은 결제 버튼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영유아들이 부모들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게임을 하다가 눌러서 결제되는 일도 종종 있다.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이라는 게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옳은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임금체납과 같은 부분에 적극 대응하는 등 종사자들이 겪는 고충을 해결하는 것 역시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고 들었다. 게임업계에 최초로 노동조합과 유사한 연대가 생기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계획을 잡고 있는가?
업계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게임 개발이라는 직종이 참 아름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쪽도 일반 사업장들과 다르지 않게 임금 체납, 직장 내 폭력, 착취 등의 문제가 꽤 있다. 물론 좋은 회사들도 많아서 좋은 대우를 해주는 곳도 있지만, 그만큼 아닌 회사들도 있다. 게임 회사가 전부 돈을 잘 벌고 좋은 경영자가 사업하는 건 아니니까.
만들던 게임이 끝까지 완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순진하게 몇 달 월급이 안 나와도 '게임만 완성하자'는 일념으로 일을 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게임이 완성되어 좋은 성과가 나올 때야 체납된 임금에 보너스까지 받지만, 그 몇 달이 순간 자원봉사가 되는 일도 있다. 이 문제는 사실 노동부를 통하거나 하면 되지만, 아주 독한 사장님들은 회사 이름 바꿔가며 요리조리 도망도 잘 다닌다.
이런 부분을 공동으로 대응해서 (밀린 월급을) 받아내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직장 내 폭력이나 착취 같은 경우도 대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아직 방향만 설정하는 단계고, 이런 일들을 진행하는 데는 꽤 현실적인 여러 난관이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반드시 해내야 할 부분이라고 보고 있다.
게임업계에 그동안 노동조합이 없었던 주요 이유로는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성향과 자유로운 근무환경’ 등이 손꼽히고 있다. 특히 업계 근로자의 평균 연령이 타 업종에 비해 젊은 편이라 집단행동에 소극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게 잘못 생겨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중 후반부터 게임이 산업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면서 처음 유입된 개발자들이 대부분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이다. 가족도 없고 생계의 부담도 덜했기 때문에, 심지어 밥값만 줘도 일한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돈 안 줘도 된다는 사람들도 있었디. 덕분에 사회적 인식이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월급 적게 받아도 좋은 거 아니냐?’ 하는 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그때 20대였던 사람들은 30, 40대가 되었고, 가족도 있고 생계도 중요한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노동에는 반드시 적정한 임금이 따라야 하고 또한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여러 노동 조건들, 휴가라던가 수당이라던가 하는 부분이 따라붙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저 90년대 중반의 소위 1세대 개발자들이 이제 그 빚을 갚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사회적 인식이고, 이걸 깨려면 이젠 적극 얻어내야 할 부분이다.
이 외에도 현재 계획 중인 활동이 있다면 소개해주길 바란다.
일단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여 앞으로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 이른 시일 내에 토론 게시판을 갖춘 사이트를 만들어서 운영하는 것이 지금의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