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공포를 맛보고 싶은가?(더 서퍼링)
2004.06.18 18:44게임메카 윤주홍
언다잉의 발매 이후 북미지역에선 이렇다 할 호러게임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엘비라를 시작으로 어둠 속의 나홀로, 7번째 손님, 가브리엘나이트, 판타스마고리아에 이르기까지 정통 호러게임의 계보를 밟아온 서양권의 작품들은 1996년 미카미 신지의 ‘바이오하자드’가 등장하면서부터 침체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플레이스테이션의 발매와 함께 혜성처럼 등장한 바이오하자드는 호러게임을 대중화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제시한 청사진은 공포를 인간의 내면에서 끌어내는 것보단 오감을 자극하는 것에 치중한 아류작을 양산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말았다.
▶ 어둠 속의 나홀로와 바이오하자드 |
하지만 이런 변화가 호러게임의 깊이를 퇴보시킨 것이라고 보긴 힘들지도 모르겠다. 실사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비쥬얼적인 발전이 이뤄진 시대에 온통 텍스트가 난무하는 고전호러게임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인 푸념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사일런트 힐’이나 ‘령 제로’처럼 하드웨어의 발전과 함께 독자적인 색깔을 추구한 정통성 있는 호러게임은 1990년대를 주름 잡았던 명작들의 바통을 이으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 호러고어액션의 새로운 정의 '서퍼링' |
미드웨이와 엔코어소프트에서 출시된 ‘서퍼링’은 먼저 언급했던 호러게임의 장르적 모호함을 게이머의 몫으로 남겨둠으로서 공포물의 발전방향을 새롭게 제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액션이냐 공포물이냐…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건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가 판단할 노릇이 아닐까. 필자가 바이오하자드를 ‘액션게임’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서퍼링은 공포의 섬뜩함과 액션의 통쾌함을 한데 버무린 ‘고어게임’의 모습으로 게이머들의 냉철한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공포의 근원을 ‘고어(Gore)'에서 찾는다
주인공
토크(Torque)는 자신의 부인과 자식 둘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다.
간수들의 손에 이끌려 ‘지구에서 가장 지독한 장소’라고 불리는 애봇 스테이트
교도소로 수감된 토크. 자신이 어째서 가족을 죽였는지, 정말 자신의 가족을 죽인
것이 맞는지 당시의 기억을 전혀 못하고 있는 그는 가족사진을 품에 안고 사방에
바다로 둘러싸인 섬 속 죽음의 교도소로 걸어 들어간다.
사형수들만 갇힌 독방 안에서 앉아 있던 토크는 갑자기 교도소 주위가 지진으로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윽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소리. 교도소 안은 순식간에 정체불명의 괴물들로 피범벅이 되며 시체들이 즐비한 지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 감옥으로 끌려들어오는 토크. 이윽고 평생 잊지 못할 지옥을 맛보게 되는데... |
서퍼링은 상당히 잔인한 게임이다.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이나 ‘버수스’,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처럼 피로 뒤범벅된 고어영화의 느낌을 풍기는 서퍼링(맨헌트의 느낌도 강하다). 그래서인지 중간중간 컷신으로 표현되는 장면은 이 게임이 등급분류에 관대한 미국에서도 M등급(성인용)을 받은 이유를 증명해준다.
팔과 다리가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진 괴물들은 이곳저곳에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사람들을 토막내고 주위를 온통 피로 물들게 한다. 동료죄수의 몸에 꽂힌 칼날을 빼들고 괴물을 죽일 때마다 입고 있는 티셔츠가 시뻘건 핏자국으로 물드는 장면 또한 이 게임이 국내에 출시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기본적으로 3인칭시점에서 진행되는 서퍼링은 근래에 보기 힘든 화끈한 액션과 공포가 조합된 게임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래픽 자체는 수년전에 발매된 하프라이프를 연상시킬 정도로 조악한 수준이나 손맛이 느껴지는 조작감과 훌륭한 사운드 그리고 연출이 뒷받침된 게임성은 단순히 겉모습으로만 보이는 단점을 충분히 덮고도 남는 수준이다.
죄수들의 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게임인 만큼 서퍼링은 폐쇄적이고 음습한, 어둠 일색의 배경에서 진행된다. 마치 사일런트 힐을 연상시키듯 가슴에 플래시라이트를 달고 어둠을 더듬어 나가는 주인공 토크는 무시무시한 칼날과 리볼버 권총, 샷건, 타미기관단총과 같은 화기로 중무장한 람보로 등장한다.
▶ 모두 죽었다... 믿을만한 사람은 내 자신 뿐 |
그래서인지 언뜻 보기에 시리어스 샘과 같은 하드코어액션을 연상시키기 쉽지만 서퍼링은 A급 공포영화에 버금가는 음향효과와 맥스페인 스타일의 연출기법으로, 왜 이 게임이 공포물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음산한 배경음악이 주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마치 귀 옆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속삭임, 그리고 괴물이 등장할 때마다 빨라지는 비트의 테크노음악은 사운드효과로 관객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드는 공포영화의 공식을 철저하게 뒤따라간다. 죄수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모니터방에서 폐쇄회로 화면을 통해 목격되는 흑백의 영상들 역시 게이머의 불안 심리를 자극시켜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 천정에 달라붙어 있다가 급작스럽게 공격해오는 헹맨은 오금을 저리게 한다 |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등장했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괴물들 역시 독특한 행동방식으로 게이머의 눈동자를 혼란스럽게 만들며 공포감을 증대시키고 있다. ‘헹맨’이라고 불리는 온몸이 온통 칼날로 이뤄진 초반의 몬스터는 천정을 기어 다니다가 주인공을 공격하는 장면으로 게이머를 전율케 하지만 적을 모두 쓸어버리는 액션 자체가 게임의 모토인 만큼 이런 공포감은 챕터 1, 2를 지나 후반에 갈수록 줄어든다(그렇다 해도 집에서 혼자 불 끄고 서퍼링을 즐기는 느낌은 ‘화이트데이’에 못지않다).
▶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들과 아내의 환각 |
주인공 토크는 몸속에 악마적 기질이 내재된 인물로 등장한다. 맥스페인 1편에서 부인과 아이를 잃고 끊임없이 괴로워하던 주인공을 연상시키듯 토크 역시 정녕 자신이 가족을 죽인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게임 진행 내내 가족에 대한 추억과 환각증상을 겪으며 고통을 호소한다.
마치 영화를 연상시키는 듯한 연출은 이런 주인공의 환각증상을 통해 맛볼 수 있는데,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는 아들의 환청이나 감옥 안에서 느닷없이 등장해 주인공을 놀래키는 부인의 모습이 그것이다. 주인공의 악마적 기질은 적을 죽일 때마다 얻는 '광기 게이지(Insanity meter)'가 가득 찰 때 또다시 발휘된다. 광기 게이지가 가득찬 주인공은 [C] 버튼을 눌렀을 때 마치 페인킬러의 폭주모드처럼 악마로 변신, 주위에 있는 적을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최악의 괴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연출과 함께 서퍼링의 재미를 북돋아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게이머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는 세 종류의 엔딩에 있다. 주인공 토크는 감옥을 돌아다니며 괴물 외에도 생존자를 곳곳에서 목격하게 되는데 이 때 게이머가 내리게 될 판단은 가족에 대한 기억이 어떤 형태로 바뀌어나가게 될 지를 판가름 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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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손을 잡아줄 것인가, 말 것인가... |
▶ 괴물로 변신한 토크. 아무도 못말린다 |
게이머는 진행 중간중간마다 간수 혹은 죄수 등 다양한 모습의 생존자를 목격한다. 이때마다 주인공은 천사와 악마의 속삭임을 듣게 되는데, “인내하라”라는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금방 전까지 너를 괴롭히던 간수녀석이야… 그놈을 죽이면 리볼버까지 얻게 되는걸? 죽여! 죽여!”와 같은 악마의 속삭임이 동시에 들려온다. 물론 판단의 게이머의 몫. 살아남은 생존자는 주인공을 도와주게 되지만 다혈질 게이머에겐 되려 방해물이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편이다.
괴물의 시체를 넘고 넘는 하드코어 액션이 게임진행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서퍼링은 제공된 지도가 무색할 정도로 길 찾기가 쉬운 편이다. 대부분의 잠긴 문은 바로 옆에 보이는 버튼을 클릭함으로서 열 수 있고 간혹 닫힌 문의 장애물을 당겨서 다른 문에 걸치는 식의 퍼즐이 등장하기도 하나 이는 8칸짜리 윈도우용 지뢰찾기게임을 해결하는 것보다 쉽다.
▶ CCTV로 보는 화면 역시 공포감을 증대시켜주는 요소 |
훌륭하기 때문에 아쉬운 게임
서퍼링은
센세이션한 공포와 짜릿한 액션을 둘 다 선사한 수작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게임을 즐기는 내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는 작품이기도 했다.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의 초반의 공포감이 엔딩까지 지속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이것은 다른 공포게임에서도 흔히 겪을 수 있는 ‘익숙함’ 때문이지만 플레이타임이 비교적 짧은 탓에 서퍼링이 가지고 있는 매력 자체가 퇴색되는 듯한 느낌까지 준다(기억에 오래 남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퍼즐 또한 게임의 플레이타임을 단축시키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단점 중의 하나다.
이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서퍼링은 올 여름 게이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줄 ‘흙 속의 진주’로 칭할 만한 역작이다. 무차별 살상이 이 게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아우르는 특징이긴 하나 그 판단과 댓가를 게이머의 몫으로 남김으로서 ‘도덕성’에 대한 고찰까지 내포한 느낌을 주는 서퍼링. 부디 나쁘지 않은 게임성과 훌륭한 스토리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 ‘더 씽’처럼 흙 속에 파묻혀버릴 저주받은 역작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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