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앨먼딘: 전대미문의 사건 (5화)
2004.04.02 19:35방지나/방지연
[소설]
그림자의 왕 바스티안 - 1장 앨먼딘(Almondine)
추적자
해가 막 서쪽으로
가라앉았을 때 익셀은 키루를 서쪽으로 날려보냈다. 등에 지고 있던 커다란 가방을
내려놓고 고삐를 끄르자 키루는 어느 때보다도 가볍게 하늘을 날았다.
“데려가고 싶지만 다이너스는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위험해. 알았지, 키루? 산맥을 돌아서 린다 누님이 있는 마을로 돌아가.”
그렇게 말하며 유선형의 머리를 두드렸을 때, 키루는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콧소리를 내며 금색의 눈을 굴렸다. 키루가 영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익셀은 걱정스러웠다. 혼자 마을을 찾아가게 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 마을의 근처였고, 이렇게 먼 곳에서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대로 갈 수 있을까?
“배가 고프면 혼자 사냥해서 먹을 수 있지?”
키이이!
일부러 평소보다 힘차게 날개를 퍼덕거리는 것은 익셀을 안심시키려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식, 너도 이제 다 컸구나.”
익셀이 키루와 함께 한 것도 벌써 5년째였다. 5년 전 익셀은 산에서 다 죽어가던 다이너스 새끼를 발견하고 마을로 데려왔다. 당시 마을의 레인저들은 누구도 키루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혀를 차며 편하게 죽여주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들 했었지만 익셀은 반쯤 강요로 키루를 먹이고 재워서 살려놓는데 성공했고, 산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익셀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어린 다이너스는 산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고, 계속 곁에 눌러앉자 하는 수 없이 익셀은 그를 도맡아 키우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키루였다.
처음엔 손도 많이 가고 곤란하게 하는 적도 많았지만 키루가 다 자란 지금은 오히려 익셀 쪽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을 정도. 덩치도 많이 커져서 사냥개 만하던 작은 몸이 수십 배로 불어 어렸을 적 ‘키루키루’하고 울어서 키루라고 붙인 귀여운 이름이 무색할 정도였다.
키루가 동쪽으로 날아간 밤, 모포를 두르고 잠든 샤레티의 곁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익셀은 구릉 쪽에서 한 떼의 불꽃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빠르게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키루가 날아간 방향이다.
익셀의 예상대로 추적자들은 다이너스의 행방을 우선으로 쫓고 있는 것 같았다. 익셀과 샤레티가 가게 될 벨룸요새는 전혀 다른 북쪽 방향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이 실수를 깨닫고 되돌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익셀은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차가운 공기에 샤레티가 눈을 떴을 때엔, 익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모닥불 위엔 간이 냄비가 걸려 있었고, 맛있는 냄새가 주변에 감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멀리 가진 않은 것 같았다.
“일어났어?”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나며 익셀이 나타났다.
“어디 갔었던 거야?”
“안심해, 이걸 하고는 아무 데도 못 가니까. 저쪽에 샘이 있어서 다녀왔을 뿐이야. 물품체크도 해야했고.”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계약의 고리를 원망스럽다는 듯이 들어 보이곤 그는 냄비 속을 국자로 휘저었다. 세수를 했는지 그의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좋은 냄새가 나.”
보글보글 기분 좋게 끓고 있는 냄비의 속엔 익셀이 만든 수프가 끓고 있었다. 뭔지 알 수 없는 식물들이 고기와 함께 끓고 있었지만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식욕을 자극했다. “샘에서 손을 씻고 오면 줄게.”
익셀의 말대로 샤레티가 공터 옆에 있는 작은 샘에 다녀왔을 때, 그는 작은 그릇과 컵에 냄비 속의 내용물을 나누어 담고 있었다. 익셀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지난밤에 본 것을 샤레티에게 알려주었다.
“다행히 추적자들은 키루를 쫓아간 것 같아.”
“그래? 다행이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어. 벨룸 요새까지 가는 것은 긴 여정이 될 거야. 위험한 일도 있을 수 있고. 무엇보다 돈이 필요해.”
“돈이 필요하다고?”
익셀은 고갯짓으로 자신이 끌러 놓은 짐 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익셀이 다니면서 사냥한 짐승의 가죽들과 몇 가지 쓸모 없는 물건들이 따로 분류되어 있었다.
“저것들이 제값을 받을 수 있다면 좀 낫겠지만 그래도 터무니없이 부족하니까.”
샤레티는 익셀이 주는 그릇을 받아들고 불가에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무언가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돈이 되지 않을까?”
그것은 지난 저녁까지도 그녀가 머리에 하고 있었던 장식 핀이었다. 진주와 은으로 된 하얀 머리장식은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물건이 아니었다. 익셀은 그것을 받아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장물처럼 팔아야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가격을 받기는 힘들겠지만 이거라면 틀림없이 벨룸 요새까지의 여행자금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을 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팔아도 돼?”
“괜찮아, 필요 없으니까.”
“그럼 이 근처에 내가 아는 마을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저것들과 함께 돈과 식량으로 바꿔 올게.”
샤레티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만 끄덕이고 따뜻한 수프를 한 모금 마셨다. 스푼이 없기 때문에 그릇 채로 마셔야 했지만 오히려 손바닥에 닿는 그릇의 온기가 기분이 좋았다.
“이거 맛있는걸? 이런 것도 누나에게 배웠니?”
“우리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할 줄 알아.”
사냥을 다니다 보면 하루 이틀 내로 집에 돌아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 항상 건 식량만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괴로운 일. 그러니 한두 가지 정도의 요리는 익히는 것이 필수였다.
익셀은 샤레티가 수프를 맛있게 마시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이 근방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입에 맞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샤레티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한 아침식사였다.
“다행이다.”
“뭐가?”
익셀은 자신의 몫으로 덜어 놓은 수프가 담긴 컵을 집어들면서 조용히 대답했다.
“개구리를 못 먹기에 뱀도 못 먹으면 어쩌나 했거든.”
순간 샤레티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그녀는 말없이 수프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금새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어제 먹었던 과일 먹을래.”
“아….”
익셀은 어째서 샤레티가 수프를 거의 남기다시피 하고서 과일을 먹겠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수프는 누님에게도 칭찬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는데…. 영문을 모른 채 그는 그저 개구리 구이처럼 신관들의 식사로는 맞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추측할 따름이었다.
태양이 중편에 떠오르기에는 아직은 이른 때.
마을 입구에 입간판(入看板)은 거친 풍파에 시달린 듯, 단 한 글자라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곳이 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낡은 간판만큼이나 마을도 허름하고 꾀죄죄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게 마을의 거리는 외지인들과 여행자들로 소란스러웠다.
지도상에서는 흔적처럼 보일 정도로 작은 이 마을에 여행자들이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이곳이 카펠라와 펑가이아의 그로잉 힐을 관통하는 가도 상에 있기 때문이었다. 교통의 요지라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가도를 지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거쳐야할 관문과 같은 곳이기도 했다.
지금도 마을 어귀에는 가도를 지나는 중에 들른 마차가 몇 대 서 있었고, 각기 분주히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익셀은 익숙한 길을 지나 낡은 문이 달린 작은 집을 찾았다. 가게 위에는 아무렇게나 퍼브(Pub)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고, 내부는 허름한 바(Bar)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이 가게의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익셀은 알고 있었다.
익셀은 퍼브의 문 우측 벽면을 손으로 짚었다. 낙서처럼 분필로 그려진 자국이 있었다. 파란 색과 붉은 색의 빗금. 그 옆엔 각기 날짜가 적혀 있다.
그 표식의 의미는 관계자가 아니면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곳에게 일한 일이 있는 익셀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파란색의 빗금은 새로운 정보를 뜻한다. 파란색 빗금은 중요한 정보일 때만 그려진다. 빗금이 없어도 새로운 정보가 있을 때도 많은 법. 그와 달리 붉은 색은 새로 추가되는 사항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덧붙여지는 것으로 새로 현상금이 내 걸린 타겟이 있다는 뜻이었다.
‘좋아.’
붉은 빗금의 날짜는 가장 최근의 것이 몇 일전이었다. 아직까지 그의 목엔 현상금이 걸리지 않은 상태라는 뜻. 아마도 신전 측은 앨먼딘의 부재가 밖으로 새어 나갔을 때 일어날 파급효과를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현상금사냥꾼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익셀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샤레티를 마을 안으로 데려오지 않고 숲에 숨어있게 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샤레티의 외모는 너무나 눈에 띌 것이 분명했다. 누구든 한번 본다면 그녀의 얼굴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개성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소녀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녀를 떼어놓고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샤레티는 숲에 혼자 남아있는 것을 싫어했다. 같이 가겠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결국 허락하면서도 그녀는 잔뜩 독이 오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 정 그렇다면 다녀와, 다만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계약의 고리가 제멋대로 반응하게 될 거라는 사실만 알아둬.’
익셀은 자신의 손목에 걸린 계약의 고리를 내려다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문을 밀고 퍼브 안으로 들어섰다.
“야아, 익셀 아니냐?”
바에 앉아있는 사람 하나가 그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40대의 거한으로 퍼브의 주인인 빈스였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현상금사냥꾼으로 한몫 단단히 했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의 눈가에 나 있는 흉터는 그때 입은 것이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정보를 팔고 일거리를 현상금사냥꾼에게 제공하는 중개인으로 물러나 있었고, 익셀은 일 때문에 이 남자를 만나는 일이 많았다.
“마침 잘 왔다. 네가 들으면 솔깃할만한 건수가 있어. 북쪽지역에서 몬스터가 나타나 마을을 습격했나봐. 진짜 큰놈이라던데 목에 걸린 액수가 기가 막힐 정도야. 내가 그 전단을 어디다 뒀더라….”
“미안해, 빈스. 나 당분간 이 일 못할 것 같아.”
“뭐야, 다른 일이라도 하고 있는 중이야?”
“응”
빈스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유감인걸. 정말 괜찮은 자리인데 말이야. 하는 수 없지. 다른 녀석에게 넘기는 수밖에….”
익셀은 그의 곁에 의자를 가져다 앉으면서 퍼브 안을 둘러보았다. 매우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손님은 거의 없었다. 구석에서 맥주 잔을 앞에 둔 채 장부를 보며 계산을 하고 있는 뚱뚱한 상인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상인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그는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익셀이 퍼브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느낀, 전신을 훑는 듯한 시선은 그 쪽에서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누구?”
“하웰이라고 하는데 보통 상인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거야. 지나는 길에 잠시 쉴 겸 정보를 사러 들렀지.”
이거라고 하면서 빈스는 손가락 엄지와 검지를 흔들었다. 그 뜻은 ‘노예상인’이었다.
신성황국 엘마이어에서는 노예매매가 금지되어 있지만 그 법률은 너무나 느슨했다. 매매가 금지된 것이지 소유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사왔다는 증서만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돈 많은 부자나 귀족들은 손쉽게 노예를 부릴 수 있었고, 그 때문에 증서를 위조해서 국내에서 노예를 파는 상인도 뒤쪽으로는 흔했다.
“저 녀석은 얼굴이 좀 반반하면 남자든 여자든 상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거든. 조심해라. 뭐, 너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 말에 익셀은 기분이 상해서 되도록 빨리 용무를 끝마치기로 결심했다.
“아에데스 쪽에서 뭔가 특별한 정보 없었어?”
“아에데스? 글쎄다. 어제로 예정되어 있었던 앨먼딘의 약혼이 나중으로 미뤄졌다는 게 가장 큰 사건이지. 아직 신전 측의 공식 발표도 없고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그날 낮에 다이너스 한 마리가 나타났다고 하더라. 이런 지방에 다이너스라니 좀 이상하잖냐, 핫핫, 읍!”
그가 크게 웃기 시작하자 익셀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목소리 낮춰.’
다행히 퍼브 안에 있던 상인은 지금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들었더라도 그냥 잡담으로 여겼을 것이다. 장난기 어린 빈스의 눈이 진지함을 되찾는 것을 보고 익셀은 막은 손을 놓았다.
“너 뭔 일 저질렀냐? 그 다이너스는 키루였던 거지? 어젯저녁에 몇몇 사람들이 신전에서 나와서 다이너스가 사라진 방향으로 쫓아갔다던데 그거 널 쫓고 있는 거냐?”
“무슨 문제가 있었다면 벌써 내 목에 현상금이 붙지 않았겠어? 말했잖아,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비밀이니까 큰소리 내지 말아 줘.”
빈스는 두 눈에 의심을 가득 품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물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 내가 도와줄 일이 뭔데?”
익셀이 빈스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그는 익셀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금새 알아채는 것이다.
“전에 맡겨두었던 내 돈을 지금 당장 찾고 싶어.”
“지금?”
대답대신 익셀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빈스는 무겁게 몸을 일으켜 바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는 손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천 오백 골드야.’
익셀의 손에 쥐어주면서 빈스가 속삭였다.
“겨우?”
“저번에 반 받아갔잖아.”
그러고 보니 최근에 린다에게 송금한다고 목돈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익셀은 주머니를 열고 액수를 확인하며 구석에 앉은 상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직이 물었다.
‘요즘 말 시세가 얼마나 하지?’
‘글세, 3, 4천 할걸?’
“음….”
턱없이 모자란 금액이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 익셀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가볼게.”
“가끔 일 문제 말고 다른 일로도 놀러와라.”
“한가하면.”
익셀이 더 볼일 없다는 듯이 빠르게 문을 밀고 나서는 것을 보며 빈스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제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 군.’
익셀의 성격상 자신의 문제로 갑자기 맡겨둔 돈을 찾으러 오는 일은 없었다. 목돈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도 말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언가 큰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다. 하지만 익셀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빈스에게도 그는 기대려 하지 않았다.
‘하긴… 그게 현명한 거지. 이 바닥에 어디 믿을 놈이 있던가?’
그는 마른 수건을 찾아 먼지가 앉은 잔 하나를 닦기 시작했다.
“이봐, 저 아이도 현상금 사냥꾼인가?”
장부를 보고 있던 상인이 물었다. 빈스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저래 봬도 실력은 좋은 편이라오. 메디쿠나(Medicuna)의 레인저촌 출신이거든.”
“그런 것치고는 곱게 생겼는데?”
이 양반, 또 버릇이 발동했구먼. 빈스는 혀를 찼다.
“눈독들이지 마쇼. 지 누나나 마찬가지니까. 린다도 생긴 것 하나는 귀티나서 은퇴하기 전까지 이런 바닥에서 일할 것 같지 않다는 소리 깨나 들었다오. 그런데 성깔과 실력이 만만찮았거든. 저 녀석은 린다처럼 괄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린다의 동생이었어? 그럼 못써먹겠군.”
뚱뚱한 사내는 빈스의 입에서 린다라는 이름이 나오자 아쉽다는 듯이 입을 쩝 다셨다. 린다가 은퇴한지 벌써 10년이 다되어가고 있었지만 이 바닥에서 아직 그녀의 이름은 공포의 대명사로서 여러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빈스의 가게를 떠난 후 익셀은 운이 좋았다. 5일에 한번인 시장이 열리는 날이어서 샤레티의 머리장식과 몇몇 가지 물품을 쉽게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의 좁은 길을 지나며 그는 기분 좋게 콧소리를 내었다. 길바닥은 노점들과 물건을 사고 파는 여행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주칠 수 있는 것은 인간 족만이 아니었다. 펑가이아 및 다른 여러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무카펀이나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방랑하고 다닌다는 베린족들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드물게 검은 표범 같은 머리를 한 카라카스 족들도 눈에 띄었다. 익셀이 식량을 사기 위해 들렀던 가게의 여주인도 무카펀 족이었다. 무카펀 족은 펑퍼짐한 체형에 짧은 다리는 빨리 움직이기 힘들어 보였지만 그만큼 빼어난 손재주와 영리한 머리를 가진 종족으로 토끼같이 머리위로 솟은 한 쌍의 귀를 가지고 있었다.
“이용해주셔서 고마워요. 또 오세요.”
갈라진 입술을 영락없이 토끼처럼 움직이며 무카펀 여주인은 익셀에게 말린 빵과 고기를 포장해 주었다. 친절한 성품은 종족 특성이었다.
식량을 장만한 후에 몇몇 필요한 물품을 구하다 보니 한시간이 쉽게 흘러갔다. 가지고 있는 돈은 풍족한 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벨룸 요새에 닿기 전까지는 최대한 아껴야만 했고 그 때문에 물건 하나를 살 때마다 상인들과의 흥정 하다보니 예상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가능하면 말을 구하고 싶었는데….마을 어귀에 있는 여관 쪽에 좋은 말 몇 마리가 서 있는 것을 곁눈으로 흘끗 보면서 익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돈이 모자라니 어쩔 수 없었다. 키루가 아쉬웠지만 다이너스는 너무 눈에 띄었다.
여관 앞에 있는 말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좋은 말은 한 남자가 데리고 있는 세 마리였다. 튼튼한 근육에 매끈하고 늘씬한 다리가 오래도록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만큼이나 고삐를 쥔 남자도 인상적이었다. 그는 말고삐를 쥔 채 여관 종업원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몸집이 커서 용병 같은 인상이 강했지만 복장은 남달랐다. 흔해 보이는 복장이 어딘지 몸에 맞아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용병이 아니라 다른 직업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여행자인 것 같지도 않았지만.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보고 가렴!”
그때 여관의 맞은편에 있는 옷가게 아줌마가 지나가던 익셀을 발견하곤 큰 소리로 외쳤다. 익셀은 무심코 ‘필요 없어.’라고 말하고 지나려다 잊고 있었던 것을 한가지 기억해 내었다.
“아…”
가게의 노점 위 유난히 눈에 띄는 데에 걸려있는 여성용 의복. 샤레티와 같은 나이 또래의 마을 소녀들이 흔히 입을 것 같은 복장이었다. 익셀은 샤레티가 입고 있는 옷이 여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무래도 옷은 필요하겠지?’
하지만 어떤 옷이 좋은 것일까? 익셀은 반쯤 무의식적으로 린다가 입었던 것과 가장 비슷한 옷을 가리켰다.
“저거.”
가게 아주머니의 얼굴이 화색을 띄었다.
“어머 보는 눈은 있구나? 막 바로 싸게 들어온 물건인데 괜찮지 않니? 여자친구에게 선물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여자친구라니, 당치도 않았다.
“누나 거야.”
샤레티의 나이는 익셀보다 많았으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어머, 그래?”
아주머니는 약간 서운한 듯한 표정을 보였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 가격은 50골드란다. 서비스로 포장도 해줄게.”
그리고는 익셀이 포장은 괜찮다고 말하기도 전에 재빨리 옷을 걷어서 가게 안쪽으로 들고 들어갔다. 50골드라고? 마음만 먹으면 40골드까지 깎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이 마을에서 시간을 지체할 틈이 없었다. 슬슬 샤레티가 기다리다 지칠 때였으니까. 더 늦었다가는 무슨 일이 있을지 두려웠기에 익셀은 그냥 그대로 지불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사람을 찾아 왔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데에 올 리가 있겠소?”
맞은편 여관 쪽에서 말을 끌고 온 남자가 큰 소리로 여관 종업원에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길 폭이 좁은데다가 목소리가 커서 굳이 들으려 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지만 말소리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이렇게 생긴 사람을 찾는데 말이야. 혹시 본적 없소?”
그가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순간 익셀은 머리가 어찔한 충격을 받았다. 남자의 손에 들려진 그림, 그 그림 속의 인물은 익셀 자신과 너무나 닮아있지 않은가!
“똑똑히 기억해둬, 이 그림대로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야. 아마 굉장히 아름다운 소녀와 함께 있을 테니까 눈에 금방 띌 거야. 혹시라도 보면 연락해.”
틀림없었다. 저 남자는 신전에서 보낸 추적자였다. 남자가 데리고 있던 말에 세 필은 저 사람 외에도 두 명 이상의 추적자가 이 마을에 있다는 뜻?
“아줌마! 이 후드도 사겠어. 지금 써도 되지?”
익셀은 가게 앞에 있는 갈색 후드를 멋대로 집어들고 머리에 눌러 썼다. 남자가 이쪽을 보고 눈치채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건 20골드.”
아주머니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익셀은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억누르려 애썼다.
“나 참, 그 도련님이 제대로 짚기나 한 건지 모르겠네. 아무리 추적마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애매해서야 어떻게 찾기나 하겠어? 밤새도록 말 타고 달려왔더니, 어이쿠 삭신이야. 그럼 우리말들 잘 부탁하네. 난 한잔 마셔야겠어.”
맙소사!
남자는 여관 안으로 들어갔지만 익셀은 그 남자가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 추적 마법이라고? 추적자들 가운데 마법사가 있다!
익셀은 아주머니에게 돈을 지불하는 즉시 부리나케 샤레티가 기다리고 있는 마을 근처의 숲으로 달려갔다. 빨리 이 마을을 떠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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