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프로게이머를 만나다.
2006.04.15 18:03게임메카 편집부
대담 참석자: 강도경(한빛 스타즈 코치), 김대기(프리랜서 게임 해설위원), 봉준구(PC방 운영), 이지혜 (엔씨소프트 기획자), 채선애(목동에서 바 운영)
약속시간인 7시 정각,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의 청년이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봉준구,아직도 깨지지 않는 기록을 가진 뮤탈리스크의 달인. 현재 안산에서 PC방을 운영하고 있는 그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30분이 지났는데도 다른 멤버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하려고 하니,
“원래 상위 10위 안에 드는 사람들은 다들 늦게 와요.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하거든요(웃음).” (봉준구)
‘적절한 대기씨’로 불리며 디씨인사이드 등의 사이트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김대기, 군입대를 앞두고 지난 2월 은퇴를 선언한 강도경. 그리고 당시 여자 프로게이머로서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지혜(레나)와 채선애.
역시 다들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게이머였기 때문일까, 약속시간 30분이 넘어서야 나머지 멤버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1세대 프로게이머로서 평소에도 친분이 있었던 이들이었지만, 이렇게 5명이 한꺼번에 만난건 5년만의 일이라며 만나자마자 전혀 어색함 없이 이야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내가 진건 순전히 ‘쫄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나마 조금 세련돼졌지만, 스타리그가 막 태동할 당시만 해도 프로게이머들의 의상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저희도 그런 특이한 옷이 좋아서 입은 건 아니에요. 당시 쥬라기원시전에서는 준구랑 이만한 공룡 옷을 뒤집어 쓰고 경기했는데… 정말 창피해 죽는 줄 알았죠” (이지혜)
“그래도 너희는 나아. 난 쫄티 입고 경기하다 계속 배에 힘 주는데 신경써서 진 적도 있다구!!” (강도경)
모인 멤버들에 비해 조금 통통한(?) 체격의 강도경의 말에 모두들 박장대소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프로게이머들은 게이머들에게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
강도경은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경기 전 한 시간 이상 머리를 손질했고, 김대기는 남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머리를 단발로 길렀다고 한다. 그 시절을 대표하던 프로게이머로서 나름대로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 귀여운(?) 저그 대마왕 |
▲ 적절한 대기씨는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
2000년 강도경 Vs 2004년 임요환
등장할 때부터 화려한 빨간색 티셔츠와 번쩍번쩍 빛나는 손목 시계가 계속 눈길을 끌었던 강도경. 역시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최근까지 프로게이머 활동을 해서일까, 그에게서는 확실히 봉준구가 말했던 상위 프로게이머만의 세계가 엿보였다.
“지금도 가끔 2000년의 강도경과 2004년의 임요환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라는 말을 들어요. 2000년 당시만 해도 제가 제일 잘했잖아요(순간 다른 멤버들의 움찔하는 모습에 전혀 아랑곳 없이).” (강도경)
솔직히 궁금했다. 프로게이머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 방송인, 연극배우 등 다양한 일을 해 온 채선애 |
▲ 이지혜는 현재 게임 기획자로 활동중 |
“솔직히 그런 질문은 지금의 박지성과 과거의 차범근 중에 누가 더 잘할까, 라고 물어보는 것과 같죠.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거에요. 다들 당시로서는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잖아요.” (강도경)
“그래도 지금 나하고 붙으면 형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봉준구)
갑자기 옆에 있던 봉준구가 강도경을 바라보며 도발을! 그랬다. 한창 봉준구가 상금 헌터로 불리던 시절, 강도경과 많은 경기를 했었는데 거의 모든 경기에서 강도경을 제압했다고 한다.
또 다시 과거 함께 했던 경기 이야기에 푹 빠진 1세대 프로게이머들. 현재 프로게이머로서 활동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 몇 년 간 프로게이머로서 보낸 짧은 시간들은 아직까지도 그들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에피소드1> 그때 그 경기에선 이런 일도! *김대기 몰수패의 진상 한번은 김대기 선수가 경기시간이 다 됐는데도 계속 나타나지 않아 몰수패를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김대기는 그때 다른 선수의 경기를 구경하느라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다고. “그럼 전화라도 해주지. 핸드폰으로 전화도 않오더라구요. 뭐 전 승부에 워낙 초연한 타입이라서. 하하.”(김대기) *담배피면서 경기를? 방송 중계를 하지 않는 예선전에서는 가끔씩 PC방에서 게임할 때의 습관이 그대로 나오는 선수들이 있었다고 한다. 한 손에는 마우스, 한 손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담배를 잡고 경기하는 모습이 상상되는가? *사실은 졸았어요 1분 1초 긴박하게 흘러가는 게임 방송. 하지만 알고 있는가? 해설하다가 조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중계하는데 갑자기 옆에서 캐스터가 막 옆구리를 찔러서 화들짝 놀랄 때가 있었죠.” (채선애) “졸다가 깨서 애매하게 해설할 때가 있죠.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 해설하면서 모두 한 두번 씩 존 경험이 있을 걸요” (강도경) 이제부터 게임방송을 보다 갑자기 해설자가 머뭇거린다면, 한번 의심해보도록 하자. *저는 ‘김기욤’ 입니다 과거 캐다다인으로서 막강한 실력을 자랑했던 ‘기욤 패트리’ 선수. 강도경이 어느 날 기욤 패트리에게 성이 뭐냐고 물어보자 그가 당황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응, 난 김, 기, 욤” 기욤 패트리, 낯선 한국 땅에서 가장 많이 들어보았던 성 중 하나를 급하게 찍은 게 아니었을까? |
▲ 김기욤(?)과 강도경 |
천지차이인 예전과 지금, 하지만 열정은 그대로
프로게이머라는 단어가 막 생겨났던 무렵,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이 악물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가며 온갖 고생을 해야 했던 1세대 프로게이머들. 그들은 지금의 e스포츠 계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너무 좋아졌죠. 아주머니가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프로게이머들은 게임만 하면 되잖아요. 저희가 처음 시작할 때는 게임 말고도 할 일이 정말 많았거든요. 프로게이머들 전체가 스폰서를 받는 건 아니지만 예전보다 환경이 나아진 건 확실해요” (강도경)
환경이 좋아진 만큼 실력도 나아진 걸까. 이들은 후배 게이머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특히 SK T1의 최연성을 두고 ‘정말 놀랄 만큼 잘한다’며 추켜세웠다.
“저희는 프로게이머들이 경기하는 걸 보면 금방 실력이 보여요. 특히 요즘 최연성 경기를 보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것 같아요” (봉준구)
▲ 앳된 모습의 봉준구, 하지만 이제는 어엿한 선배 프로게이머다
하지만 좋아진 환경만큼이나 지금의 프로게이머들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건 사실이다.
“프로게이머라면 100% 지는 걸 싫어합니다. 특히 지금은 경쟁이 예전보다 치열해서 정말 밥 먹는 시간, 자는 시간 줄여가면서 연습해야 겨우 살아남죠.” (강도경)
현재 한빛 스타즈의 코치로서 바로 옆에서 프로게이머들의 치열한 일상을 접한 강도경의 말에 지금의 프로게이머들이 얼마나 힘겹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에피소드 2: ‘노코멘트’ 강도경 어록 인터뷰 내내 ‘노코멘트’로 일관했던 강도경. 그와의 대화중 일부 발췌. 게임메카: 군대가서도 게임을 하실 생각입니까? 강도경: 아마도 하게 되지 않을… 앗, 노코멘트입니다. 게임메카: 임요환 선수랑은 친하십니까? 강도경: 아, 임요환 친구 없어요(전화를 잘 안받는다며)… 앗, 노코멘트입니다. 게임메카: 프로게이머 당시 아이디가 ‘H.O.T-Forever’ 였는데 HOT 중 누구를 좋아했습니까? 강도경: 그때 머리 스타일을 보면 알 수 있… 앗, 노코멘트입니다. 게임메카: 노코멘트가 너무 많은데 좀 말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강도경: 제가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아서 함부로… 앗, 노코멘트입니다. |
프로게이머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세요?
현재 입대를 준비 중인 강도경. 살며시 프로게이머 병역특례에 관한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일순간 조용해지면서 얼굴이 굳었다. 아차, 실수를 한 건가?
“저희들은 한번도 병역특례를 요구한 적이 없는데, 왜 밖에서 저희들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전 프로게이머도 당연히 군대는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논란이 된 공군의 전산특기병 역시 병역특례가 아니라 똑같이 훈련받는 일반 특기병 중 하나일 뿐입니다” (강도경)
“예전에도 한번 인터뷰하다 말을 적절치 못하게 해 프로게이머 전체가 나쁜 소릴 들은 적이 있었죠. 지금 프로게이머들에게 병역 문제는 굉장히 민감한 사항이라, 오해 살 만한 이야기는 안했으면 좋겠어요” (김대기)
그럼 얘기를 다시 돌려, 현재 나이 어린 고등학생 프로게이머들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심각한 답변은 계속 되었다.
“현재 학교에서 프로게이머를 인정해주지 않아 학교를 옮기려고 생각하는 애들도 있습니다. 아예 고등학교를 중퇴하는 친구들고 있고요. 사생활에 관련돼 자세하게는 말하지 못하지만 저희들도 나름대로 고충을 겪고 있답니다. 맨날 게임만 하면서 쉽게 돈 버는건 아니에요” (강도경)
“저 같은 경우도 고등학교 때 데뷔했는데 학교에 온갖 거짓말은 다하고 겨우 프로게이머 생활을 할 수 있었죠. 지금 어린 나이에 데뷔한 친구들도 저처럼 힘들게 프로게이머 생활을 하고 있을 겁니다.” (봉준구)
그들의 굳은 얼굴. 아마도 프로게이머의 세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고민을 적나라하게 물어봐서였을 것이다. 혹시 나 하나로 인해 후배 프로게이머들이 욕먹지는 않을까, 너무나 조심스럽게 답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1세대 프로게이머로서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처음부터 농담삼아 얘기했던 ‘상위’ 프로게이머 자리는 역시 그냥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난 지금도 게임이 좋다
“전 아직까지 게임만큼 스릴있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 했어요. 그땐 얼마나 게임을 열정적으로 했던지 아직도 여기(손 날을 가리키며)가 아프다니까요”(봉준구)
“그건 네가 자세가 나빠서 그래. 난 지금도 멀쩡하잖아. 근데 준구처럼 프로게이머들 다 한군데 씩은 고장난 데 있어요. 안구건조증, VDT 증후군(장시간 컴퓨터 작업을 하고 난 후 생기는 안증상, 근골격계, 정신신경계 증상 등의 통칭) 같은 건 100% 가지고 있어요. 우리들도 일반 스포츠 선수처럼 자기 몸 불살라가면서 하는 거에요.” (강도경)
게임으로 인해 자신의 삶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 게임과 직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던 아니던 이들의 삶에서 게임을 떼어내기란 힘들 것 같다.
“판이 많이 커졌으면 좋겠어요. 스타크래프트 뿐만 아니라 많은 게임들이 스포츠 종목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돼요. 건전한 방향으로 육성되면 사람들도 생각이 많이 바뀌지 않을까요? 좀 더 많은 후배들이 좋은 환경에서 프로게이머 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게이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이들이 2006년 4월, 어느덧 2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되어 우리 눈앞에 앉아 있었다.
프로게이머란 존재는 누군가에게는 스타지만,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전혀 존재감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든지 한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들에게 ‘프로’의 칭호를 붙이는 것은 아깝지 않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5명의 1세대 프로게이머들. 앞으로 그들에겐 지금보다 더 치열한 삶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그 삶 속에서 프로게이머였던 지난 몇 년간의 시간이 영원히 그들의 삶 속에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