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용단] 험난했던 스타크래프트 한국 입성기
2008.04.04 16:52게임메카 나민우 기자
우리 곁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존재하는 ‘스타크래프트’. 하지만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 발을 들이지 못할 뻔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거두절미'하고 ‘스타크래프트’가 어떤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들어오게 됐는지 그 뒷이야기를 알아보자.
스타크래프트에 올인(all in)
‘스타크래프트’ 한국 입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한빛소프트 김영만 회장이다. 그의 용단(勇斷)이 없었다면 우리는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몰랐을 수도 있다. 지금은 옆집 아저씨 같은 편안한(?) 외모를 소유하고 있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나름 핸섬한 LG맨이었다. 그와 ‘스타크래프트’의 첫 만남은 96년 이루어졌다.
당시 LG소프트 컨텐츠사업부에 근무하던 김 회장은 E3(Electronic Entertainment Expo) 행사장에서 블리자드에 근무하던 빌로퍼(現 플래그십 스튜디오 대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스타크래프트’의 가능성을 감지하게 된다.
[OX퀴즈 그것이 알고 싶다] 빌로퍼는 ‘스타크래프트’ 개발자였다? 정답: O. 빌로퍼는 ‘스타크래프트’ 개발자였다. 빌로퍼는 ‘스타크래프트’ 개발을 총괄하며 스트라이크팀을 만들어 게임의 최종검수 및 밸런싱 조절을 담당했다. 스트라이크 팀은 QA(Quality Assurance) 전문 조직으로 빌로퍼에 의해 만들어졌다. 당시 소규모 개발사였던 블리자드의 크기를 생각하면 과감한 투자였는데, 이를 이끌어낸 인물이 빌로퍼다. |
당시 LG소프트는 해외 RTS게임 ‘다크레인(Dark Reign)’을 약 3만 5천장 판매 대박을 치면서 RTS게임 장르에 주목한다. 김 회장은 ‘다크레인’이 높은 판매량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로 네트워크 플레이를 지목했다. 그런데 E3에서 만난 본 ‘스타크래프트’는 ‘다크레인’보다 뛰어난 멀티플레이 시스템인 배틀넷을 탑재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스타크래프트’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당시 ‘스타크래프트’의
퍼블리셔였던 미국의 센던트사(社) 계약을 추진한다. 김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국내에서 다크레인은 3만 5천장 정도 팔렸습니다.
LG소프트에서 유통한 게임 중 가장 많이 팔린 게임이었죠. 성공 요인
중 하나가 바로 플레이어들이 서로 대전을 펼칠 수 있는 네트워크 플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크레인의 네트워크 플레이는 한계가 있었고,
스타크래프트는 거기서 한 차원 발전한 배틀넷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어요. 매력적이었습니다. 또 당시 인기를 끌었던 ‘디아블로’가 배틀넷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
|
▲ LG소프트 재직 당시의 김영만 회장(사진 하단) |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센던트가 무리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그 조건은 바로 4만 장의 커밋먼트(commitment). 커밋먼트란 최소 판매량에 대한 의무를 지는 계약조건이다. 이 경우 판매량이 4만장 미만이라 하더라도 4만장 판매량에 해당하는 로열티를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칫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힐 수도 있는 상황이다.
센던트의 이런
조건에 당연히 LG소프트 경영진은 부담스러워했고 분위기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급 반전됐다. 자신들이 가장
높은 매출을 올렸던 ‘다크레인’의 판매장수는 3만 5천장. ‘스타크래프트’는
그보다 5천 장을 더 팔아야 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에선 PC패키지게임이
1만 장 이상 판매되면 대박인 시기였다. 게다가 게임 역시 당시 유행하던 3D도 아닌 2D 그래픽이었다. |
▲ LG소프트에서 유통한 RTS게임 '다크레인' |
개발사인 블리자드 역시 ‘디아블로’와 ‘워크래프트’로 유명하긴 했지만 EA나 액티비전과 같은 메이저 회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스타크래프트’ 계약을 강하게 밀어 붙였다.
“동시 발매는 아니더라도 97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타깃으로 출시하기 위해 한시라도 계약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더 이상 미룰 순 없다고 생각했죠. 힘겹게 임원진을 설득했지만, 끝내 데드라인이 다 되도록 결재를 받지 못 했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토요일, 서울 인근에 나가 있던 임원진을 찾아가 억지로라도 결재를 받았습니다.”
결국 임원진의 최종 승인이 떨어졌다. ‘스타크래프트’의 판매량이 저조하면 책임은 모두 김 회장이 뒤집어 쓸 상황. 그의 입장에선 상당히 위험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 십년지기 김영만 회장과 플래그십 스튜디오 빌로퍼 대표 |
다음날, 당시 김 회장의 상사였던 성용택 전 한빛소프트 본부장과 마케팅팀 사원이던 한정원(현 블리자드코리아 대표)씨가 미국으로 출발했고 계약은 성사됐다.
하지만 결국 결재가 늦어진 탓에 당초 계획했던 97년 크리스마스 시즌은 놓쳐버렸다.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LG소프트는 98년 4월, ‘스타크래프트’를 한국에 출시를 하게 된다.
쉽진 않았지만 ‘스타크래프트’ 신화가 태동한 순간이었다. |
한빛소프트 창업과 스타크래프트 신화
당시 게임 심의 기관이었던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 기록에 따르면 ‘스타크래프는 ‘연소자이용불가(현재의 청소년이용불가)’ 등급을 받은 것이 98년 4월 7일이었다.그런데 출시 후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당초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출시 8개월 만에 11만장이 팔려나갔다.
그러나 이미 97년 말부터 시작된 IMF구제금융조치의 영향으로 게임계 전반에 걸쳐 먹구름이 드리워진 시기였다. IMF로 인해 불어 닥친 구조조정의 여파는 LG그룹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시 LG소프트는 크게 반도체 사업 부문과 콘텐츠 사업 부문으로 나눠져 있었다. IMF이 후 반도체 사업 부문은 현대전자와의 빅딜을 통해 지금의 하이닉스로, 콘텐츠 사업 부문은 LG필립스LCD로 이름을 바꾸고 LCD 관련 사업에 주력하게 된다. 즉, LG소프트는 조각나 버린 것이다.
김 회장은 LCD사업에 주력으로 하게 된 회사구조 속에선 게임 사업을 지속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는 당시 PC방 붐과 함께 인기가 치솟고 있던 ‘스타크래프트’ 가능성에 올인(All in)하기로 마음먹는다.
▲ 한빛소프트는 중견 퍼블리셔로서 자리를 굳혔다 |
“며칠을 지새며
제안서를 만들었죠. 콘텐츠 사업부를 독립시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가 더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확신했고,
게임산업의 가능성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김 회장은 98년 12월 8일, LG필립스LCD 측에 제안서를 제출했다. 제안서 내용 중에는 ‘스타크래프트’를 30만장 이상 판매하겠다는 조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그는 ‘스타크래프트’가 30만장 이상 판매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서약한 것이다. |
99년 1월 6일 김 회장은 뜻을 같이 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지금의 한빛소프트를 창업한다. 그 와중에도 ‘스타크래프트’는 신화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스타크래프트’ 신화. 한 연구기관에 따르면 ‘스타크래프트’는 한국에서 1조 1400억원의 경제적 효과를 유발시켰다고 한다. 2001년 1월에는 100만장을 넘어서다니 2008년 현재 450만 장이 팔렸다. 또 e스포츠의 효시가 되었으며, PC방 붐(Boom)과 전용선 보급의 주역이다. ‘스타크래프트’의 게임성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분명 ‘스타크래프트’는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