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불분명한 저작권, 크툴루 신화 대중화 시킨 장점 됐다
2018.03.16 09:37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 '크툴루 신화' 게임 '아캄 호러' 공식 일러스트 (사진출처: 판타지 플라이트 공식 홈페이지)
게임 좀 해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에 대해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온갖 게임이 '크툴루 신화'나 '러브크래프트식(Lovecraftian)'이라는 태그를 달고 소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당장 스팀에서 '크툴루'나 '러브크래프트'를 검색하면 공포물부터 19금 미소녀 게임까지 수많은 게임이 쏟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크툴루 신화'가 이토록 여러 분야에서 사랑 받는 이유는 물론 특유의 기괴하고 신비한 분위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도 잘 드러나지 않은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으니, 바로 저작권이 불분명한 점이다. '크툴루 신화'는 권리관계를 입증하기가 아주 까다롭다. 덕분에 '크툴루 신화'는 누구든지 쉽게 변용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각양각색의 수많은 게임이 이 세계관을 활용해 제작되어 왔다.
그렇다면 대체 이 기묘하고 정체불명인 세계관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 이번 주에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지만 잘은 모를 세계관, '크툴루 신화'에 대해 간단히 알아본다.
불우한 삶을 산 작가에게서 나온 기괴한 이야기
▲ '크툴루 신화' 원작자 러브크래프트의 생전 사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 '크툴루 신화' 원작자 러브크래프트의 생전 사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크툴루 신화' 저작권이 모호해진 사연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원작자 러브크래프트의 불운한 삶에 대해 조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본디 그는 세계관을 치밀하게 체계화할 생각도 없었고 저작권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상업적인 의도로 기획된 세계관이 아니었던 것이다.
1890년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러브크래프트는 어린 시절부터 불운한 삶을 살았다. 그가 세 살일 때 아버지는 매독으로 인한 정신이상증세를 보이다 정신병동에 수감돼 사망했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심한 우울증을 보였다. 그나마 어린 시절에는 작은 사업을 하던 외조부 덕에 유복한 삶을 살았지만, 14살이 되던 1904년 외조부가 사업에 실패, 사망하며 가세까지 기울어버리고 말았다.
선천적으로 건강하지 못했던 데다, 주변인들의 광기와 사망, 궁핍해진 가계 등 음울한 사건을 겪은 러브크래프트는 극도로 내성적인 인물이 됐다. 그 탓인지 러브크래프트는 외부 활동보다는 문학에 탐닉했다. 외조부는 생전 사업 문제로 유럽에 갔다 올 때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등 다양한 외국 문학을 사와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가공의 이야기들은 당시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린 러브크래프트에게 유일한 도피처가 됐다.
▲ 러브크래프트가 기고했던 펄프 소설 잡지 중 하나인 '아고시' (사진출처: 이베이)
▲ 러브크래프트가 기고했던 펄프 소설 잡지 중 하나인 '아고시' (사진출처: 이베이)
나이가 들자 러브크래프트는 '아고시(Argosy)'를 비롯한 펄프 소설 잡지를 구독했으며, 직접 시와 소설을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타인과 직접 만나 관계를 맺는 데는 서툴렀지만 잡지 기고를 통한 서면 활동 만큼은 왕성했다. 그러던 1914년 그는 작가가 될 생각은 없느냐는 아마추어 작가 협회 제안을 받게 되는데, 이 시기부터 러브크래프트의 본격적인 작품 활동이 시작됐다.
러브크래프트가 집필한 소설은 대부분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소재로 한 기묘한 이야기였다. 작품에 따라 분위기와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반적 흐름은 대체로 비슷하다. 우주에는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오래되고 위험한 괴물들이 있으며, 그 앞에서 인간은 덧없고 무가치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우연한 계기로 괴물에 대한 단서를 얻고 호기심에 조사를 시작하나, 실제로 괴물의 정체를 알고 나면 공포 속에 미치거나 죽어버린다.
특히 그의 소설은 독특한 괴물 디자인으로 유명했다. 꿈틀거리는 살덩이나 점액질이거나, 휘몰아치는 촉수의 덩어리, 혹은 인간과 짐승의 잡종 등, 기존에는 찾아볼 수 없던 것이면서도 불길한 상상을 자극하는 존재들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신적인 존재인 '크툴루'였는데, 이 괴물은 끔찍한 촉수를 늘어뜨린 문어 머리와 용의 날개를 지닌 거인으로 묘사됐다. 그 외에도 소설에는 가장 변태적인 악몽 속에서나 등장할법한 이계의 괴물들이 여럿 등장했다.
▲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 '문 비스트' (사진출처: 화가 조셉 디아즈 개인 홈페이지)
▲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등장하는 괴물 '문 비스트' (사진출처: 화가 조셉 디아즈 개인 홈페이지)
러브크래프트 소설은 문장 구성 완성도가 매우 낮아 당시로도 썩 훌륭한 작품은 아니었다. 다만 특유의 고색창연한 어휘와 불안감 묘사에서 오는 기묘한 분위기는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고, 일부 동료 작가들과 팬들 사이에서 컬트적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일부 작가들은 러브크래프트 소설 설정 일부를 오마쥬 했다. 고전 판타지 소설 '야만인 코난'이나, 영화 '싸이코'의 원작자로 유명한 로버트 블로크의 '벌레의 신비' 등이 러브크래프트 세계관을 반영한 유명 작품들이다.
다만, 러브크래프트 본인은 세계관을 치밀하게 구성하는 데는 무관심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를 묘사하는 데 집중했고 공포의 대상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설명하는 데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브크래프트는 다른 작가와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누군가 2차 창작물을 통해 세계관을 확장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매우 관대했다. 그 자신도 다른 작가의 인물과 괴물을 자기 소설에 자주 등장시키기도 했다.
이처럼 러브크래프트 초기 세계관은 여러 작가가 내키는 대로 조금씩 덧붙어나갔다. 이렇다 보니 각각의 작품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분명했지만, 세계관 저작권이 누구에게 귀속됐는지는 불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러브크래프트 본인도 저작권을 주장한 적이 없었던 데다, 원한다면 세계관 일부만 차용해서 써도 좋다고 언급했던 지라 별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 '코난 엑자일'에도 러브크래프트적 요소가 상당히 반영됐다 (사진출처: 스팀)
▲ '코난 엑자일'에도 러브크래프트적 요소가 상당히 반영됐다 (사진출처: 스팀)
그런데 러브크래프트가 창안한 세계관을 공유하는 일군의 작가 중에는 유달리 설정에 집착하던 어거스트 덜레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러브크래프트와 달리 괴담 자체보다 설정 체계에 더 큰 관심이 있었고, 아예 자신이 나서서 세계관을 정리해주겠다고 했다. 그는 러브크래프트와 친분이 있었기에 동의를 얻을 수 있었는데, 사실 '크툴루 신화'라는 세계관 이름도 그가 붙인 것이다.
'크툴루 신화'는 덜레스에 의해 어느 정도 구체화됐다. 그는 괴물들 사이의 위계질서, 속성 따위를 설정했고, 불분명한 명칭과 모습으로만 묘사되던 괴물들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하고 설정화했다. 이러한 덜레스 행보 덕분에 여러 작가들이 느슨하게 공유하던 설정 모음이던 '크툴루 신화'는 단일한 체계로 통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크툴루 신화'는 선과 악이 대립하거나, 네 가지 원소로 우주가 설명되는 등, 덜레스 본인의 자의적인 해석과 취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덜레스의 자의적 세계관 정리는 러브크래프트 본인이 살아있을 때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가 1937년 만성적 영양실조로 생긴 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러브크래프트가 남긴 유산을 두고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크툴루 신화' 완성한 어거스트 덜레스, 저작권은 독점은 실패
러브크래프트는 유저(遺著) 관리자로 로버트 발로우라는 젊은 작가를 지명했다. 유저 관리자로서 발로우는 러브크래프트 미발표 작품과 저작물을 관리할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 유언에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덜레스는 '크툴루 신화'를 체계화한 자신이 러브크래프트 유산을 관리해야 마땅하다 믿었고, 그 권리를 얻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러브크래프트 사후 덜레스는 동료 작가 도널드 원들레이와 함께 출판사를 세우고 러브크래프트가 잡지에 기고한 출판물을 모아 책으로 간행했다. 이들은 출판사 이름도 러브크래프트가 소설 속에 자주 등장시킨 가상의 마을 '아캄(Arkham)'을 따서 '아캄 하우스(Arkham House)'라고 지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정통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 덜레스는 어떠한 증거도 보여주지 못한 채 '나와 원들레이가 러브크래프트 유산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음은 다들 익히 아는 사실이다'라며 발로우의 권리를 부정했다. 그러나 1941년에 러브크래프트 유산 상속자였던 이모 감웰이 임종을 앞두자, 덜레스는 감웰과 그 상속자들에게 접근했다. 그 결과 덜레스는 감웰의 두 상속자인 모리시와 루이스로부터 러브크래프트 저작물을 출간하고 판매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 아캄 하우스 출판사 공식 로고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 '크툴루 신화' 완성자이자 저작권 논란에 불을 붙인 어거스트 덜레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러브크래프트는 유저(遺著) 관리자로 로버트 발로우라는 젊은 작가를 지명했다. 유저 관리자로서 발로우는 러브크래프트 미발표 작품과 저작물을 관리할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 유언에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덜레스는 '크툴루 신화'를 체계화한 자신이 러브크래프트 유산을 관리해야 마땅하다 믿었고, 그 권리를 얻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러브크래프트 사후 덜레스는 동료 작가 도널드 원들레이와 함께 출판사를 세우고 러브크래프트가 잡지에 기고한 출판물을 모아 책으로 간행했다. 이들은 출판사 이름도 러브크래프트가 소설 속에 자주 등장시킨 가상의 마을 '아캄(Arkham)'을 따서 '아캄 하우스(Arkham House)'라고 지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이 정통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 덜레스는 어떠한 증거도 보여주지 못한 채 '나와 원들레이가 러브크래프트 유산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음은 다들 익히 아는 사실이다'라며 발로우의 권리를 부정했다. 그러나 1941년에 러브크래프트 유산 상속자였던 이모 감웰이 임종을 앞두자, 덜레스는 감웰과 그 상속자들에게 접근했다. 그 결과 덜레스는 감웰의 두 상속자인 모리시와 루이스로부터 러브크래프트 저작물을 출간하고 판매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 아캄 하우스 출판사 공식 로고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이러한 덜레스의 행보에도 발로우는 단호히 대응하지 않았다. 여러 해에 걸친 논쟁 끝에 발로우는 아캄 하우스의 존재를 묵인하고 1943년 멕시코로 이주했으며, 1951년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모리시와 루이스도 러브크래프트 저작권에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덜레스는 무난하게 '크툴루 신화'에 대한 권리를 한동안 독점할 수 있었다.
문제는 모리시와 루이스가 너무 무관심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류에 러브크래프트 저작물을 활용해도 좋다는 의사를 분명히 썼지만, 저작권 자체를 넘기겠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 저작권법상 저작권은 원작자 사망 후 28년이 지날 때까지만 자동으로 유지된다. 그 후에는 반드시 추가 연장 해야 하며, 기한까지 연장하지 않은 저작권은 공공재로 자동 전환된다. 물론, 저작권에 관심이 없던 모리시와 루이스는 따로 연장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에 미국에서는 '크툴루 신화' 저작권이 누구에게 귀속됐는지를 두고 복잡한 분쟁이 계속됐다. 이 중 정점을 찍은 것은 덜레스 사후 아캄 하우스 변호사 하트먼과 원들레이 사이에 벌어진 법적 공방이었다. 원들레이는 덜레스가 사망했으므로 생전 구두계약에 따라 자신이 러브크래프트 저작물과 '크툴루 신화'에 대한 저작권 일체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하트먼은 원들레이에게 자기 지분의 아캄 하우스 재산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반박하던 중, 스스로 모리시와 루이스로부터 얻은 저작권이 갱신되지 않아 공공재로 전환됐다고 주장했다.
▲ 영화 '이블데드 2'에 등장한 '네크로노미콘'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안 그래도 권리관계 입증이 힘들었던 데다, 아캄 하우스 변호사 하트먼이 스스로 저작권 만료를 주장했으므로, 결국 재판이 끝난 1986년 이후 '크툴루 신화'는 권리주체가 불분명해지고 말았다. 그 이전까지는 많은 창작자가 '크툴루 신화'를 쓰기 위해서는 아캄 하우스에게 로열티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아캄 하우스와 계약 관계에 있는 작가 소설과 설정만 피하면, 러브크래프트가 생전에 쓴 설정은 라이선스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크툴루 신화'를 라이선스 비용 없이 활용한 작품들은 재판이 진행되던 시기에 이미 다수가 제작됐다. 예를 들어 공포소설가 스티븐 킹은 1978년 자신이 쓴 작품 '더 스탠드'에 등장한 악당을 '크툴루 신화'의 신적 존재 '니알라토텝'으로 묘사했다. 또한 영화 감독 샘 레이미는 1981년 작품인 '이블 데드'에 '크툴루 신화' 속 마도서 '네크로노미콘'을 중요한 소재로 등장시켰으며, 스튜어트 고든은 1985년 아예 러브크래프의 소설을 영화화한 '리애니메이터'를 제작했다.
그리고 물론, 이러한 변화는 게임업계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게임에도 다양하게 응용되기 시작한 '크툴루 신화'
▲ TRPG '크툴루의 부름' 7판 서적 (사진출처: 카오시움 공식 홈페이지)
게임이 최초로 '크툴루 신화'를 받아들인 것도 1980년대 일이다. TRPG 개발업체 '카오시움(Chaosium)'이 아캄 하우스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1981년 제작한 '크툴루의 부름'이 큰 성공을 거둔 이래, 수많은 보드게임과 비디오게임이 '크툴루 신화'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 '크툴루 신화'를 수용한 게임들은 대체로 원작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 중 첫 번째라 할 수 있는 '크툴루의 부름'은 아예 캐릭터의 비극적인 파멸까지 원작을 반영했다. 이 게임에서 흥미로운 점은 괴물의 본 모습을 목도하면 캐릭터가 이성을 잃고 미치는 '이성(Sanity)'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우연한 계기로 단서를 얻어 괴물을 추적하는 '탐사자' 역할을 맡는데, 대개는 소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전개가 된다.
카오시움은 게임업계에서 선발주자로서 이익을 톡톡히 봤다. 이들은 아캄 하우스와의 라이선스 계약으로 '콜 오브 크툴루'라는 상표권을 확보하고, 소설 속 다양한 괴물을 구체적인 일러스트로 묘사해 자사 저작물로 삼은 것이다. '크툴루 신화' 속 유명한 캐릭터인 '크툴루'나 '니알라토텝'만 해도 대중에게 인식된 이미지는 대부분 카오시움에서 제작한 것이다. 카오시움은 그 외에도 기존 세계관을 응용한 여러 독자 설정들을 제작했는데, 이 또한 모두 카오시움의 저작물이다.
▲ 소설 속 존재들을 생생한 삽화와 구체적 데이터로 묘사한 '크툴루의 부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렇기에 초창기 게임업계는 대부분 카오시움의 눈치를 보았고, 이는 비디오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1992년 인포그램이 제작한 '어둠 속에 나 홀로'는 '크툴루 신화' 설정을 사용하기 위해 카오시움에 접촉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카오시움이 '어둠 속에 나 홀로'가 '크툴루 신화'로 인정하기에는 질이 낮다고 판단해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저작권이 분명하지 않은 '나이트건트'나 '딥 원' 등 일부 괴물은 결국 그대로 등장했다.
▲ '어둠 속에 나 홀로'에 등장한 '나이트건트'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993년에 발매된 '혜성의 그림자'와 1995년 작품인 '얼음의 죄수'는 직접적으로 '크툴루 신화'를 반영한 게임이었다. 다만 1990년대를 넘어서면 라이선스 계약을 맺은 게임은 점차 드물어지는데, 베데스다가 2005년 출시한 '크툴루의 부름: 지구의 음지'와 '엘더 사인' 등 일부 디지털 보드게임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아캄 하우스와 카오시움 라이선스 없이도 차용할 수 있는 '크툴루 신화' 설정도 많았기 때문이다.
▲ 베데스다의 '크툴루의 부름: 지구의 음지' 스크린샷 (사진출처: 스팀)
부분적으로 '크툴루 신화' 세계관을 차용한 게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아틀라스의 '여신전생', 그리고 그 스핀오프인 '페르소나' 시리즈 아닐까 싶다. '여신전생' 초기 작품들과 '페르소나 2'에는 '크툴루 신화'의 가장 중요한 존재 중 하나인 '니알라토텝'이 대놓고 등장한다. 사용하는 기술이나 생김새도 원작 소설에 나오는 것과 대체로 유사하다.
▲ '페르소나 2: 이터널 퍼니시먼트'에 등장한 '니알라토텝'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런가 하면 'X-COM 2: 심해에서 온 공포'도 '크툴루 신화' 세계관으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본래 개발자 줄리안 골롭이 구상한 바에 따르면, 세계 곳곳에서 사교도가 사악한 의식을 치르고, 이를 막지 못하면 심해에 잠들어 있던 사악한 외계신 '크툴루'가 깨어나 세상을 파멸시키는 내용이었다. 비록 결과적으로 '크툴루 신화'와 직접적 연관성은 없는 작품이 됐지만, 여전히 게임에는 심해에 가라앉은 공포스러운 도시, 잠든 채 깨어날 날을 기다리는 사악한 신 등이 등장한다.
▲ 'X-COM 2: 심해에서 온 공포'에도 '크툴루'의 흔적이 존재한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게다가 'X-COM' 시리즈 개발자 줄리안 골롭은 'X-COM 2: 심해에서 온 공포'를 '크툴루 신화'로 만들지 못한 한이 남았는지, 2018년 출시하는 정신적 후계작 '피닉스 포인트'에 러브크래프트적 요소를 잔뜩 담았다. '피닉스 포인트'는 지구와 충돌한 외계운석 '유고스'에서 퍼진 감염성 포자에 의해 지구가 뒤덮인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유고스'는 본래 '크툴루 신화'에 나오는 별로, 여기에는 집게발 달린 포자류 생물 '미고'가 산다. 여러 모로 '크툴루 신화'와 관계가 싶은 셈이다.
악랄한 난이도로 유명한 '다키스트 던전'도 '크툴루 신화'를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개발업체 이름인 '레드훅'부터 러브크래프트 소설 '레드훅의 공포'에서 따온 것이고, 우주와 심해에서 온 흉측한 괴물, 공포와 절망 속에서 이성을 잃고 미치는 주인공, 신체변이 등 '크툴루 신화' 속 핵심요소들이 그대로 반영됐으니 말이다.
▲ 촉수괴물, 정신이상, 변이 등 '크툴루 신화' 소재를 적극 반영한 '다키스트 던전' (사진출처: 스팀)
개중에는 다소 황당한 게임까지 나왔다. 그나마 앞서 소개한 게임들은 원작 특유의 어두운 면을 조금이라도 반영했지만, 일본 성인게임 개발업체 니트로 플러스에서 2003년에 제작한 '참마대성 데몬베인'은 아예 '크툴루 신화'를 미소녀 게임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앞서 언급한 '니알라토텝'을 비롯한 괴물들이 미소녀로 변신해 주인공과 성관계까지 맺는데, 그 탓에 이 게임은 러브크래프트 팬들로부터 원작을 심하게 훼손했다고 강도 높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 카오시움 TRPG '크툴루의 부름'에 묘사된 '니알라토텝' (사진출처: 카오시움 공식 홈페이지)
▲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등장한 '니알라토텝'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 외에도 영향을 받은 작품을 따지면 한도 끝도 없다. 펀컴의 '시크릿 월드', 블리자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등, 수많은 작품이 직간접적으로 '크툴루 신화' 요소를 담았다. 아캄 하우스나 카오시움과의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원작 세계관을 거의 그대로 반영한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저작권이 공공재로 전환된 러브크래프트 원작에 나오는 일부 소재만 차용해 입맛에 맞게 바꾼 작품도 있다.
▲ 카오시움에서 묘사한 '크툴루'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 '시크릿 월드'에 등장한 '우르 드라우그'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렇듯 '크툴루 신화'는 차용 및 수정이 상대적으로 원활했던 덕분에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될 수 있었다. 과거에 러브크래프트 원작 소설은 괴기소설 팬들에게만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오늘날 '크툴루 신화'는 본래의 분위기는 다소 희석됐을지언정, 전세계적으로 폭넓게 사랑 받는 대중문화 반열에 오르게 됐다. 굉장히 극적인 변화인 셈이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참마대성 데몬베인' 예처럼, 대중문화로의 변화에 대한 호불호는 심하게 갈리고 있다. 일부 팬들은 '크툴루 신화'를 과도하게 변질시키는 것은 본래 주제의식과 분위기를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반대측은 러브크래프트도 '크툴루 신화'가 여러 작가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원리주의야 말로 피해야 할 길이라며 맞서고 있다.
앞으로는 나올 '크툴루 신화' 게임, 어떤 게 있나?
▲ 2018년 발매되는 어드벤처 게임 '크툴루의 부름' (사진출처: 포커스 홈 인터랙티브 공식 홈페이지)
팬들의 취향도 이렇게 갈리다 보니 자연 '크툴루 신화' 게임도 두 가지 방향성으로 나뉘고 있다. 하나는 원작 분위기와 주제의식을 살린 정통파이고, 다른 하나는 일부 소재만 차용하는 쪽이다. 단, 공공재로 전환된 설정 외에 아캄 하우스나 카오시움에서 제작한 설정 및 디자인을 사용할 시에는 무조건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야 한다.
대부분의 정통파는 '크툴루 신화' 전체 세계관을 사용하거나, 카오시움에서 제작한 그래픽 자산을 사용하기 위해 라이선스 계약을 맺는다. 이렇게 개발되고 있는 게임 중 가장 주목도 있는 것은 포커스 홈 인터랙티브가 2018년 발매할 어드벤처 게임 '크툴루의 부름'이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사설탐정이 되어 한 예술가의 의뢰를 받게 된다. 그 의뢰란 가족의 죽음 이면에 감춰진 비밀을 조사해 달라는 것으로, 이를 위해 주인공은 어느 외딴 섬의 마을로 향하게 된다.
▲ 2016년 발표된 '더 싱킹 시티' 공식 홍보 이미지 (사진출처: 프로그웨어 공식 홈페이지)
발매를 앞둔 또 다른 정통파 '크툴루 신화' 게임으로는 '더 싱킹 시티'가 있다. 프로그웨어가 준비 중인 이 게임은 '크툴루 신화'를 바탕으로 한 오픈월드 어드벤처 게임으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대홍수를 겪고 있는 미국 메사추세츠 어느 도시를 무대로 삼는다. 여기서도 플레이어는 사설탐정 역할을 맡아 도시를 휩쓸고 있는 공포의 원인을 조사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끔찍한 비밀들과 마주하게 된다.
▲ 동물원 운영에 실패하면 촉수로 처벌 당하는 '디 엘드리치 주키퍼' (사진출처: 스팀)
부분적으로 '크툴루 신화' 소재를 차용한 게임은 많지만, 여기서는 그 중에서도 꽤 독특한 작품을 하나만 소개하겠다. 바로 '크툴루 신화'와 동물원 경영을 섞은 인디게임 '디 엘드리치 주키퍼'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저주를 받아 어쩔 수 없이 괴물 동물원을 운영하게 된다. 예상했겠지만, 여기서는 키우는 동물이란 '크툴루 신화'에 나올법하게 생긴 기괴한 짐승들이다.
괴물들은 수시로 탈출을 감행하는데, 조금만 잘못해도 동물원 경영주인 외계의 신이 차원관문을 열고 촉수를 뻗어 주인공을 응징한다. 게다가 관람객들도 정신이 온전치 못한지 수시로 울타리를 부숴대는 걸 보면, 적어도 '광기'라는 소재 하나는 잘 반영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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