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톨킨 소설이 시초다? '오크' 얼마나 아니?
2018.07.10 17:15게임메카 이새벽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누구나 당연하다는 듯 알고 있는 신기한 판타지 종족이 하나 있다. 바로 ‘오크’다. 오크는 본디 판타지 세계관에 등장하는 가상의 종족이지만, 따로 소설이나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도 ‘오크’라는 말을 들으면 금방 ‘인간을 닮았지만 녹색 피부에 큰 엄니가 돋은 흉측한 괴물’을 바로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상상하는 오크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돼지 머리의 미개한 식인 괴물, 용기와 명예를 숭상하는 전사 종족, 전투에 미친 외계인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같지 실제로는 거의 다른 종족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여러 버전의 오크들이 존재하니 말이다.
우리는 익숙한 듯하면서 낯선 종족 오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에, 이번 [세계기행]에서는 게임 속 오크의 계보와 오크가 등장하는 대표적 작품들을 꼽아보았다.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와 바다 괴물부터 야성미 넘치는 섹시한 종족에 이르기까지, 게임 속 오크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왔는지 한 번 확인해보자.
이것도 오크 저것도 오크?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 문학 속 오크
▲ 악마로 왜곡된 ‘오르쿠스’를 묘사한 16세기 그림 ‘아이네이아스의 지옥으로의 하강’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흔히 오크는 최근, 기껏해야 수십년 전 쯤 창작된 종족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오크라는 단어 자체는 최소 11세기 이전부터 괴물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당시만 해도 이 말이 지칭하는 존재에 대한 묘사는 작품마다 크게 차이가 났다.
오크의 유래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는 로마의 저승 신인 ‘오르쿠스(Orcus)’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오르쿠스’는 고대 로마에서 지하와 저승의 신 하데스와 자주 동일시된 존재다. 그리고 오크는 ‘오르쿠스’와 관계된 저승에서 온 악귀로, 그 연관성을 어근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유의해야 할 점은 오크와 ‘오르쿠스’ 사이의 연관성은 추측일 뿐, 이를 확실하게 입증해줄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기원이 분명하지 않다 보니 중세 문학에서 등장하는 오크들은 사악한 괴물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생김새나 특징이 저마다 다르게 묘사됐다. 예를 들어 11세기 서사시 ‘베오울프’에는 ’오크네아스(Orc-neas)’라는 시체 악귀가 언급된다. 그런가 하면 16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쓰인 서사시 ‘광란의 오를란도’에서 오크는 거대한 바다 괴물로 등장한다.
▲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광란의 오를란도’ 속 오크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렇게 작품마다 다르게 묘사되던 오크는 20세기 초 들어서야 비로소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오크의 새로운 표준을 잡아준 인물은 ‘호빗’과 ‘반지의 제왕’ 작가로 유명한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이었다. 그가 집필한 ‘반지의 제왕’은 방대한 세계관을 상세하게 다루어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었고, 이 작품에 나온 수많은 요소는 이후 판타지가 따를 일종의 표준처럼 인식되었다. 거기서 정립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오크였다.
‘톨킨 서신 모음집(The Letters of J.R.R. Tolkien)’에 따르면, 그가 각색한 오크는 ‘베오울프’에 나온 ‘오크네아스’에서 영감을 얻은 창작물이었다. ‘오크네아스’는 시체에 깃든 사악한 영혼 같은 것으로 묘사되는데, 톨킨은 이러한 ‘오크네아스’가 자신이 원하는 사악한 종족 이미지에 부합한다고 판단하여 ‘오크’라는 이름과 몇 가지 특징을 따와 소설 속 오크를 창작했다. 아무래도 저승에서 온 악귀 ‘오크네아스’에서 영향을 받다 보니, 톨킨의 오크도 본질적으로는 마귀 같은 족속이었다.
톨킨은 오크의 기원을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크가 악한 신 ‘멜코르’가 지하의 열기와 점액질로 만든 추한 괴물일 수도, 엘프를 고문하고 변이 시켜 만들어낸 변종일 수도 있다는 등 기원을 불분명하게 묘사했다. 다만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오크가 땅 속에서 수를 불리며, 이내 충분한 수가 모이면 지상으로 올라와 사람을 해치고 식인을 일삼는 잔악한 존재라는 것이다.
▲ 영화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에서 묘사된 오크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톨킨이 묘사한 오크는 인간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작은 체구에, 사지가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지닌 흉물이었다. 또한 이들은 대체로 어두운 피부색에 짧고 구부러진 다리로 뛰어다닌다. 이러한 특징은 오크와 자주 함께 등장하는 괴물인 고블린과도 비슷한데, 사실 ‘호빗’과 ‘반지의 제왕’에서는 오크와 고블린이 같은 종족으로 설정돼 있었다. 같은 괴물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였던 셈이다. 이 두 종족의 분화는 후일 ‘던전 앤 드래곤’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듯 오크는 ‘반지의 제왕’ 이전까지만 해도 ‘괴물’ 정도의 의미를 지닌 고어로 쓰였다. 그러나 톨킨이 ‘베오울프’에서 언급된 사악한 괴물 ‘오크네아스’에서 영감을 얻어 오크의 구체적인 외모와 특성이 묘사한 이래, 그 추하고 잔인한 이미지가 널리 확산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무조건 나쁜 놈! 피에 미친 괴물로 묘사된 초창기 게임 속 오크들
▲ ‘워크래프트 2: 타이드 오브 다크니스’ 매뉴얼에 수록된 오크 일러스트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앞서 확인했듯 따로 놀던 오크의 구체적인 이미지는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립됐다. 초기 게임업계는 이 톨킨의 오크를 거의 그대로 차용했다. 당시만 해도 ‘반지의 제왕’ 정도의 통일성을 갖춘 판타지 세계관은 전무했다. 이에 20세기 후반 제작된 대부분의 판타지 게임이 ‘반지의 제왕’에서 영감을 얻었고, 오크도 톨킨 묘사처럼 흉측한 외모와 뒤틀린 심성을 지닌 사악한 종족으로 그려진 것이다.
오크를 다룬 첫 게임은 1974년에 출시된 TRPG ‘던전 앤 드래곤’였다. ‘던전 앤 드래곤’은 개발자 개리 가이객스가 인터뷰에서 스스로 언급했을 정도로 ‘반지의 제왕’에 강한 영향을 받은 게임이었다. 그렇기에 ‘던전 앤 드래곤’의 오크도 흉측한 외모에 호전적이고 식인을 서슴지 않는 습성을 지니는 등 ‘반지의 제왕’과 비슷하게 묘사됐다. 차이점이라면 ‘던전 앤 드래곤’ 오크는 돼지 같은 코를 지녔다는 것 정도였다.
▲ 2003년 출시된 ‘던전 앤 드래곤 3.5판’의 오크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983년 처음 발매된 미니어처 게임 ‘워해머 판타지’도 톨킨의 오크를 차용한 초창기 작품 중 하나다. 당시에 ‘워해머 판타지’가 오크를 묘사한 모습은 게임 시나리오 ‘오크 드리프트 대학살(Bloodbath at Orc’s Drift)’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 등장한 오크는 녹색 피부에 흉포한 성질을 지닌 학살자 무리로 등장한다. ‘오크 드리프트 대학살’에서 오크는 인간, 엘프, 드워프에 대한 거센 증오심으로 거대한 군대를 일으키고 대학살을 자행한다.
이처럼 1980년대 ‘워해머 판타지’의 오크는 ‘반지의 제왕’이나 ‘던전 앤 드래곤’의 오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훗날 ‘워해머 판타지’는 오크가 실은 포자 생물이며, 싸울수록 크고 강해진다는 등 독특한 설정을 더해 ‘반지의 제왕’에 없던 고유한 설정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오크가 미개하고, 포악하며, 피에 미친 괴물이라는 설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반지의 제왕’이 보여준 ‘사악한 괴물’의 면모를 충실히 지킨 셈이다.
▲ ‘워해머 판타지’ 시나리오 ‘오크 드리프트 대학살’ 표지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TRPG와 미니어처 게임이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영향을 받아 오크를 등장시킨 것처럼, PC게임은 앞서 나온 ‘던전 앤 드래곤’과 ‘워해머 판타지’ 등에서 묘사된 오크 이미지에 영향을 받았다. 초기 게임 개발자 중 다수는 TRPG나 미니어처 게임을 플레이 하며 자란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주로 자신이 ‘던전 앤 드래곤’이나 ‘워해머 판타지’를 플레이 하며 얻은 영감으로 게임을 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오크’라는 소재도 자연스럽게 PC게임 속에 스며든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게임개발업체는 회사 규모가 매우 작았다. 이처럼 적은 인원과 자본으로 게임을 만들 때는 일반적으로 게임 시스템과 그래픽을 향상을 위해 스토리를 포기하게 되는데, 1980년대 초기에 나온 게임들도 그러한 상황 속에서 개발됐다. 이에 개발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던 아트 디자인과 설정을 자체적으로 창작하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던전 앤 드래곤’나 ‘워해머 판타지’의 것을 차용하는 일이 잦았다.
▲ 1994년 ‘엘더 스크롤: 아레나’에 등장한 오크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같은 바탕에서 영감을 얻은 만큼 초창기 PC게임들은 오크를 서로 비슷하게 그려냈다. 예를 들어 1980년의 ‘아칼라베스: 월드 오브 둠’, 1981년의 ‘위저드리: 프로빙 그라운즈 오브 매드 오버로드’, 1986년의 ‘마이트 앤 매직: 더 시크릿 오브 더 이너 생텀’ 등 초창기 PC RPG는 모두 오크를 피에 굶주린 살인마 종족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주로 왕국의 질서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마땅히 오크를 박멸해야 하는 영웅 역할을 맡았다.
그 중에서도 오크의 존재를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은 1994년 출시된 블리자드의 RTS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이었다. 이 게임에서 오크는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사악한 침략자 종족으로, 왕을 시해하고 왕국을 약탈하는 잔악한 행보를 보여주었다.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 리드 프로그래머 패트릭 와이어트는 이러한 오크의 모습이 ‘워해머 판타지’ 아트 디자인에서 영감 받은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녹색 거구에 엄니 등 많은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
▲ ‘워해머 판타지’에서 영감을 얻은 ‘워크래프트: 오크와 인간’의 오크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렇듯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 발매된 게임들은 대체로 ‘반지의 제왕’에서 확립된 ‘사악하고 피에 굶주린’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오크를 새로운 방식으로 묘사하는 시도가 많지 않았다. ‘오크’라는 소재를 새로운 문법으로 재해석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던 것이다.
다만 특기할 점은 게임업계가 처음부터 ‘오크’를 서로 비슷한 모습으로 그린 점이다. 이는 20세기 이전 문학에서 오크를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묘사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되는 일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어느 게임을 하든 비슷하게 나오는 오크를 보며 어느 정도 표준화된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차츰 오크를 친밀하고 익숙한 존재로 느끼기 시작했다.
“오크도 사람이야, 사람!” 사악함 벗어 던진 인간적 오크들
▲ 오크가 일종의 인종으로 취급되는 SF 판타지 게임 ‘섀도우런’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시간이 흐르면서, 게임업계에서는 차츰 오크를 악귀가 아닌 종족으로 묘사하는 시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주로 우락부락한 신체조건이나 험상궂은 외모는 그대로 둔 채 ‘사악함’이라는 부분만 배제하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는 게임이 전보다 복잡하고 무거운 주제를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시작됐다. 과거 많은 게임이 선과 악의 2차원적 대립을 전투로 풀어내는 데 집중했다면, 이제는 가치 중립적 세계에서 플레이어가 내리는 ‘선택’이 콘텐츠가 된 것이다. 이처럼 게임 트렌드가 변화함에 따라 ‘오크’라는 소재도 자연 그 의미와 맥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크를 재해석한 초기 작품 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아마 1989년 나온 ‘섀도우런’이다. TRPG로 시작해 닌텐도 및 PC게임으로도 8번이나 제작된 ‘섀도우런’은 21세기 초 지구에 잠들어있던 마법의 힘이 깨어났다는 독특한 세계관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여기서 오크는 일종의 ‘인종’인 ‘메타휴먼’으로 등장한다. 세상에 마법의 힘이 돌아온 이래 일부 인간은 사춘기에 ‘고블린화’라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이 변화가 끝나면 1세대 오크가 된다는 것이다.
한 번 오크가 된 사람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고, 그가 낳은 자식은 오크로 태어난다. 물론 오크는 보통 사람보다 빨리 성인이 되고, 신체 건장하며, 날카로운 엄니가 있고, 출산율도 매우 높은 등 몇 가지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외 부분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처럼 느끼고, 생각하며, 자신만의 가치관과 욕구에 따라 살아간다. ‘반지의 제왕’이나 ‘던전 앤 드래곤’의 선천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한 오크와는 거리가 먼 셈이다.
▲ 2014년 ‘섀도우런: 드래곤폴’에 등장한 독일계 오크 사회운동가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베데스다 ‘엘더스크롤’도 이러한 흐름에 맞게 오크 설정을 바꾸었다. 본래 시리즈 첫 작품인 ‘엘더스크롤: 아레나’에서 오크는 ‘워해머 판타지’에서처럼 흉한 엄니에 녹색 피부를 지닌 사악한 괴물로 등장했다. 그러나 1996년 발매된 두 번째 작품 ‘엘더스크롤 2: 대거폴’에서 오크는 다소 호전적이긴 해도 대화를 하거나 동맹을 맺는 게 가능할 정도로 지성 있는 종족으로 바뀌었으며, 2002년 나온 세 번째 작품 ‘엘더스크롤 2: 모로윈드’에서는 아예 플레이 가능 종족으로 추가됐다.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에서는 특이하게도 오크가 본래 엘프의 한 일파라는 설정을 제시했다. 이들은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한 면모를 지닌 종족으로, 과거 자신들의 수호신 ‘트리니막’이 사악한 신 ‘보에디아’와 싸워 패배하고 타락했을 때 함께 영향을 받아 추악한 외모를 지니게 됐다고 한다. 그러나 오크들은 이제는 흉측하게 뒤틀린 ‘말라카스’라는 존재가 된 ‘트리니막’을 숭배하며, 함께 다른 종족들의 박해를 버티며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으로 등장한다.
▲ 이후 ‘엘더 스크롤’ 오크는 박해 받는 고고한 소수민족으로 묘사된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처럼 게임 속 오크의 입지가 1990년을 전후로 달라지게 된 이유는 뭘까? 당시에는 다양한 선택지를 바탕으로 한 멀티-엔딩 및 샌드박스 게임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게임들은 플레이어가 게임 속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을 핵심 묘미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 시기의 게임들은 보다 흥미로운 고민을 끌어낼 수 있는 소재를 원했고, 그 과정에서 오크도 ‘마땅히 퇴치해야 할 괴물’이 아닌 양가적 종족으로 재해석되었을 수 있다.
어쨌거나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오크는 ‘천성적으로 사악한 괴물’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오크는 악할 수도, 혹은 악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지성과 감정을 지닌 종족으로 등장했다. 다만 오크 문화는 나름 납득할 수는 있을지언정, 여전히 호전적이고 난폭한 것으로 묘사됐다. 이를 테면 포악한 식인종에서 포악한 깡패 정도로 개선된 셈이었다. 이렇듯 시간이 지날수록 오크는 조금씩 인간적에 가까운 종족으로 묘사됐지만, 그 흉포한 천성만은 그대로 유지됐다.
선량하고 용맹하고 섹시한, 이제는 주인공 자리까지 꿰찬 오크
▲ 오크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버린 캐릭터 ‘스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오크에 대한 인식은 이후에도 계속 개선되어, 최근에는 아예 선하고 의로운 오크 주인공이 등장하는 게임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있다. 오크가 본래 사악하고 불길한 괴물을 뜻하던 단어임을 감안하면, 아예 그 의미가 달라진 셈이다.
‘주인공 오크’의 계보는 블리자드의 미완성 프로젝트인 ‘워크래프트 어드벤처: 로드 오브 더 클랜’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워크래프트’ 시리즈는 본디 오크를 피에 굶주린 사악한 약탈자 무리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워크래프트 2: 어둠의 파도’ 출시 이후 블리자드는 세계관 확장을 위해 오크를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고 싶어했고, 그렇게 준비된 작품이 바로 ‘워크래프트 어드벤처: 로드 오브 더 클랜’이었다.
처음부터 ‘워크래프트 어드벤처: 로드 오브 더 클랜’은 젊은 오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어드벤처 게임으로 기획됐다. 이 게임의 주인공 ‘스랄’은 ‘워크래프트 2: 타이드 오브 다크니스’에서 오크가 인간에게 패배했을 때 인간 군대의 간부 ‘블랙무어’에게 주워진 오크 아이였다. 이후 ‘블랙무어’는 오크 아이에게 노예라는 뜻에서 ‘스랄’이라는 이름을 붙여 검투사로 기르지만, 훗날 ‘스랄’은 자기 뿌리를 찾아 탈출하고 다시 한 번 오크를 규합한다는 것이 이 게임의 줄거리였다.
▲ 공개된 ‘워크래프트 어드벤처: 로드 오브 더 클랜’ 스크린샷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워크래프트 어드벤처: 로드 오브 더 클랜’은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돌연 프로젝트가 취소됐다. 블리자드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작품 완성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거의 완성된 작품이었던 만큼 해당 스토리는 다소 각색되어 ‘워크래프트’ 소설인 ‘로드 오브 더 클랜’에 반영됐고, 후일담이 ‘워크래프트 3: 레인 오브 케이어스’에서 이어지는 등 이후 시리즈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워크래프트 3: 레인 오브 케이어스’는 오크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작품이었다. 전작인 ‘워크래프트: 오크 앤 맨’과 ‘워크래프트 2: 타이드 오브 다크니스’에서 오크는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의 화신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워크래프트 3: 레인 오브 케이어스’에서는 이러한 오크의 사악함이 실은 악마들에 의한 타락 때문이며, 본래 오크는 용맹하고 명예로운 종족이었던 것으로 설정이 달라진 것이다.
이후 ‘워크래프트’ 시리즈는 긍지를 잃고 악마들의 노예가 된 오크를 주인공 ‘스랄’이 구원한다는 줄거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워크래프트’ 세계관으로 제작된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가 큰 성공을 거두며 ‘스랄’로 대표되는 ‘선한 오크’ 이미지는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고, 그 뒤를 이어 다른 게임 개발업체도 오크 주인공으로 내세운 게임을 하나 둘 출시하기 시작했다. ‘반지의 제왕’이 확립한 오크의 표준이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 셈이다.
▲ 사악한 용 ‘데스윙’으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오크 ‘스랄’의 모습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용맹하고 명예로운 오크 주인공’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게임이 바로 ‘오브 오크 앤 맨’이다. 2012년 사이나이드가 출시한 이 게임은 호전적이지만 올곧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오크 전사 ‘아르카일’이 다른 종족을 탄압하고 노예로 삼는 인간 제국에 맞서 복수의 길을 걷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물론 다소 충동적이고 흉포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악랄한 인간 제국의 횡포를 보면 곧 그에 맞서는 오크가 정의롭게 느껴지게 된다.
▲ 멋지고 의리 있고 다정다감한 사나이로 나온 오크 ‘아르카일’ (사진출처: 스팀)
그런가 하면 엔씨소프트 ‘리니지 2’는 아예 오크 생김새까지 크게 바꾸었다. ‘워크래프트 3: 레인 오브 케이어스’에서도 오크는 여전히 무섭고 흉포한 인상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리니지 2’ 오크는 피부만 녹색일 뿐 매끈한 피부에 날카로운 턱 선을 지닌 섹시한 캐릭터로 묘사됐다. 이처럼 극적인 미화 때문인지 ‘리니지 2’ 오크는 출시 당시 국내외를 막론하고 화제가 됐고, 아직도 역대 최고의 미모를 지닌 오크로 꼽히고 있다.
▲ 육감적인 몸매로 모두를 놀라게 한 ‘리니지 2’ 오크 (사진출처: ‘리니지 2’ 공식 홈페이지)
‘리니지 2’를 기반으로 제작된 모바일게임 ‘리니지 2 레볼루션’도 최근 ‘멋진 오크’ 대열에 합류한 작품이다. 이 게임의 오크 역시 나름 준수한 외모를 자랑하는데, 정성스럽게 땋은 레게 헤어 스타일과 고른 치열은 전통적인 오크의 이미지와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반지의 제왕’ 속 오크가 추하게 일그러지고 뒤틀린 외모의 소유자로써 수십년 동안 게임업계에서 통용돼 온 것을 감안하면, 국산 게임들이 오크를 멋진 외관으로 재구성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 ‘리니지 2: 레볼루션’도 준수한 외모의 오크를 신규 캐릭터로 내세웠다 (사진출처: 넷마블 공식 홈페이지)
오크의 변화, 어디까지 계속될까?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괴물’ 정도의 모호한 단어에서 유래된 오크는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확립시켰고, 게임산업의 태동과 맞물리며 다양한 게임에 차용돼 대중에게 친밀하고 익숙한 판타지 요소로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오크는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 다시 한 번 변화를 준비 중이다. ‘반지의 제왕’이 실체가 불분명했던 오크를 재해석해 오늘날 이미지를 구축했던 것처럼, 이제는 ‘워크래프트’나 ‘리니지’ 같은 게임들이 오크라는 종족의 맥락과 의미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앞으로도 오크는 어디까지 재해석된 색다른 모습을 보여줄까? 피에 굶주린 흉측한 식인종이 녹색 피부의 성자와 매끈한 섹시 캐릭터로 변모한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변화해 나갈 게임 속 오크의 모습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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