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안이함으로 침몰한 세계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019.03.03 09:23게임메카 이새벽
대한민국 RPG 역사에서 이정표로 기억되는 작품이 있다. 바로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다. 많은 게이머의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기억될 이 게임은 ‘포가튼 사가’를 비롯한 일군의 작품들로 이어지며 일가를 이루고 ‘국산 패키지 시장의 전설’로까지 치켜세워진 바 있다. 헌데 조금 이상한 일이 있다. 막상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세계관이 어땠는지 떠올리니 생각나는 게 딱히 없으니 말이다. 분명 스토리 좋은 게임이었던 것 같은데 배경이 되는 무대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세계관이 잘 생각나지 않는 이유는, 세계관이라고 부를 만한 체계적인 세계 설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리즈 첫 작품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1993년 나오고 마지막 작품 ‘어스토니시아 스토리VS’가 2014년 출시됐으니 브랜드 역사만 21년이지만, 놀랍게도 이 시리즈는 통일된 세계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명분상으로는 시리즈가 모두 동일한 세계관이나, 게임 내에서 같은 세계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연출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국내 게이머들의 ‘스토리에 대한 갈증’ 풀어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1990년대 초반은 국산 RPG의 태동기였다. 1987년 작품 ‘신검의 전설’을 필두로 개발되기 시작한 국산 RPG는 차츰 다양한 작품으로 이어지게 됐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1993년 제작된 손노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였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국산 턴 기반 SRPG의 계보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에 나온 작품 중 하나로, 발매 초기 이러한 선발주자의 이득을 톡톡히 보았다. 덕분에 아직도 많은 국내 게이머들에게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발매 후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좋은 추억 속에 기억되는 이유는 당시 국내에서는 즐기기 드물었던 시나리오 요소를 보여준 데 있었다. 아직 국산 RPG는 물론이고 한국어화되어 수입되는 외국 게임도 적었던 시절에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한국어로 대사와 지문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RPG 중 하나였다. 여기에 방대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읽는 재미’를 내세운 점은 이 게임이 흥행하게 해준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세계관은 개략적으로 이러하다. ‘어스토니시아’라는 가상의 대륙이 있다. 이곳에는 ‘페라린’이라는 엘프들의 왕국이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어떤 재앙에 의해서 엘프들의 수명과 관계된 ‘생명의 나무’가 말라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엘프들의 여왕이자 강대한 마법사인 ‘브륌휠트’는 자신의 젊음과 힘을 희생하여 ‘생명의 나무’를 되살리나, 이로 인해 쇠약해진 나머지 인간들의 ‘라테인’ 제국을 막지 못하고 국토를 유린 당하고 만다.
결국 ‘브륌휠트’는 이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분노와, 잃어버린 젊음과 힘을 꼭 되찾겠다는 집착을 품게 됐다. 광기에 사로잡힌 ‘브륌휠트’는 엘프를 죽이고 노예로 사로잡는 ‘라테인’ 제국에 맞설 힘을 찾지만 마땅한 방법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국에 복수하고자 하던 엘프 여왕 ‘브륌휠트’는 마침내 악마적 존재 ‘드라이덴’의 설득에 넘어가고, 과거 봉인된 파괴신 ‘렐카’를 깨울 음모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게임은 ‘라테인’ 제국의 기사인 주인공 ‘로이드’가 ‘브륌휠트’의 맹목적인 복수극에 휘말리며 시작된다. ‘라테인’ 제국은 신의 힘이 깃든 성스러운 유물 ‘카이난의 지팡이’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유물을 모종의 이유로 제국에 소속된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이송할 일이 생기고, 주인공 ‘로이드’는 ‘카이난의 지팡이’를 호위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마침 이 유물은 ‘렐카’의 부활 의식에 필요한 도구 중 하나였고, 이를 ‘브륌휠트’의 하수인들이 강탈하며 문제가 시작된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가까스로 ‘브륌휠트’ 부하들의 기습에서 살아남은 ‘로이드’가 동료를 모아 ‘카이난의 지팡이’ 행방을 찾고, 마침내 미친 엘프 여왕의 음모를 막아내는 과정을 다뤘다. 그 과정에서 ‘로이드’는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브륌휠트’의 동기와 목적을 파악하고, 마침내 강림 직전에 이른 ‘렐카’ 부활 의식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게임은 ‘브륌휠트’와 그 측근이 제거되고 파괴신 강림도 무위로 돌아가는 것으로 정리된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시나리오는 당시 기준으로 자못 독특한 구성이었다. 사악한 자들의 손에 빼앗긴 유물을 되찾는 모험에 나선 용사 이야기 자체는 진부했지만, 적이 주인공의 모국에 의해 멸망 위기에 처한 엘프들이라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발매된 시절 엘프는 신비롭고 고결하며 선량한 종족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러한 엘프가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 손에 파멸하여 뒤틀리고 타락했다는 파격적인 시나리오는 뭇 게이머들을 매혹시켰다.
이렇듯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성스러운 유물 되찾기’라는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서의 엘프를 악당으로 내세우는 변주를 더한 스토리 중심 게임이었다. 이는 당시 국내 게이머의 스토리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했고, 덕분에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방대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로 인기를 끈 소프트맥스의 ‘창세기전’과 더불어 1990년대 국산 RPG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었으니, 실제 게임에 반영되지 않은 설정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었다. 게임 설명서를 보면 일견 대륙에 여러 국가가 존재하고 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중 게임에 실제 등장하는 것은 약 절반 정도이며, 그나마도 설명서에 나온 것과 별로 상관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설정상 존재하는 각 지역이 어떤 분위기와 특징을 지니는지 제대로 보여주고, 이러한 요소를 게임 내러티브로 엮어내는 데는 다소 미진했던 셈이다.
레일로드를 벗어나 자유도를 택한 후속작 ‘포가튼 사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국내에 스토리 중심 RPG 보급이 낮던 시절 출시돼 선발주자의 혜택을 톡톡히 본 작품이었다. 이처럼 스토리 요소로 재미를 본 개발업체 손노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정해진 시나리오를 일방적으로 따라가며 감상하는 ‘레일로드(Railroad)’ 방식을 탈피하고, 당시 서양에서 유행한 요소인 ‘비선형성(Nonlinearity)’를 추구하기로 한 것이다. 쉽게 말해 자유도 높은 게임을 지향한 셈이었다.
1997년 발매된 ‘포가튼 사가’는 이처럼 자유도 높은 RPG를 지향한 개발의 결과물이었다. 이 게임 또한 기본적으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같은 턴 기반 SRPG였으며, 세계관도 동일했다. 설정상 ‘포가튼 사가’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사건이 벌어질 때와 거의 비슷한 시간대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 일들을 다룬 외전이었다. 그러나 ‘포가튼 사가’는 전작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크게 다른 특징이 하나 있었으나, 바로 ‘프리 시나리오 시스템’이었다.
‘포가튼 사가’의 ‘프리 시나리오 시스템’은 비선형적 스토리를 추구한 시스템이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로이드’라는 고정 주인공으로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를 따라가는 방식이었다면, 외전 ‘포가튼 사가’는 주인공부터 플레이어가 직접 이름과 성별, 클래스 등을 직접 고를 수 있었다. 또 진행 중 어떤 동료를 영입하느냐, 특정 분기점에 도달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소요됐느냐 등 여러 요인에 따라 다른 이벤트가 발생하는 방식이었다.
다만 ‘프리 시나리오 시스템’이라는 독자적인 명칭을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본질적으로 이미 서양 RPG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던 비선형적 진행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토리 노드를 잘게 나누고, 어떤 요인들이 작용했는지 여부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게 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폴아웃’과 ‘발더스 게이트’ 등 해외 유명 RPG들이 널리 보급되기 전인 1997년만 해도 국내 게이머들에게는 매우 참신한 시스템으로 각광받았다.
스토리상으로 ‘포가튼 사가’는 큰 줄기의 주된 스토리를 따라가면서도, 세부적으로 다른 이벤트가 비선형적으로 발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넓게 볼 때 ‘포가튼 사가’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라테인 제국’이 혼란한 틈을 타 ‘뉴브로이어’ 주에서 벌어지는 음모를 다루었다. 이곳 영주 ‘제커슨’은 부패한 제국 관료제에 환멸을 느껴 반역을 마음을 품고, 이를 위해 고대에 봉인된 사악한 존재 ‘부사’를 해방시켜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게임은 모종의 사건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 주인공이 ‘뉴브로이어’ 곳곳을 떠돌며 동료를 모으고, 마침내 ‘제커슨’과 ‘부사’에 맞서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스토리의 큰 줄기는 봉인된 사악한 존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악당과 싸운다는 점에서는 전작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부 이벤트가 매번 달라지는 비선형적 요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덕분에 ‘포가튼 사가’는 14만 장 이상 판매라는 당시 국내 게임 기준으로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
다만 ‘가로린’ 등 특정 몬스터를 제외하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이 잘 부각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물론 전작과 연동되는 일부 사건이 언급되거나, 한두 명의 전작 인물이 NPC로 짧게 등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크게 보면 세계관에 있어 일관된 분위기나 특징을 느끼게 할 요소는 다소 부족했다.
더 이상 새로움은 없었다, 안이함 속에 침몰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이렇듯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포가튼 사가’는 방대한 텍스트와 자유도 두 가지 요소를 내세워 손노리를 명실상부 ‘국산 게임의 명가’ 반열에 들게 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두 작품이 성공한 데는 한 가지 공통적인 상황이 작용했다. 두 작품은 모두 당시 국내에서 생소했던 요소인 ‘방대한 텍스트 기반의 스토리’와 ‘비선형성’이라는 특징을 들고 나왔다.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했던 재미 요소를 먼저 도입해 선발주자의 이득을 본 ‘얼리 어댑터’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후 발매된 작품들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나 ‘포가튼 사가’와 달리 ‘얼리 어댑터’ 면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세계관을 공유하는 후속작은 대부분 안일하게 제작된 리메이크였고, 야심에 찬 시도였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와 ‘포가튼 사가 2’, ‘어스토니시아VS’도 잇따라 고배를 마시며 결국 손노리도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1990년대 국산 RPG의 양대산맥이자 패키지 시장의 전설로 치켜세워지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허망한 결말이었다.
‘포가튼 사가’ 이후로도 손노리는 한동안 계속 ‘어스토니시아’ 세계관을 이어나갈 계획이었다. 그 시작은 2002년 국산 휴대용 게임기 Game Park 32bit용으로 개발된 ‘어스토니시아 스토리R’이었다. 이 작품은 향상된 픽셀 그래픽과 버그 배치, 약간의 밸런스 조정을 한 리메이크 버전으로, 내용 자체는 1993년 발매된 원작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다르지 않았다. ‘카이난의 지팡이’를 되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로이드’의 이야기를 그대로 다루었던 셈이다.
물론 ‘어스토니시아 스토리R’은 리메이크 작품이므로, 원작과 동일한 스토리가 되풀이 되는 것이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도 손노리는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리메이크를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이어서 2004년에는 모바일 버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R’이 나왔고, 그 이듬해인 2005년에는 PSP 버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R’이 출시됐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3년에 걸쳐서 1993년에 나온 게임 스토리를 되풀이 하는 데 팬들은 슬슬 질릴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손노리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향수에 기대 리메이크판만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즈음, 드디어 정식 후속작이 발매됐다. 긴 기다림 끝에 2008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가 마침내 출시된 것이다. 하지만 발매 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는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처참한 반응에 직면해야 했다. 문제는 스토리였다. 지금까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시리즈가 스토리로 흥한 것과 대비되게도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는 노골적으로 허술한 스토리 탓에 팬들에게 외면을 당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의 이야기는 간단히 설명해 이러하다. 전작으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세상에는 ‘사념석’이라고 하는 강대한 힘을 지닌 마법의 돌 여섯 개가 등장한다. 이 돌은 모두 모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그 탓에 전 대륙의 강자들이 저마다 소망을 이루기 위해 이 돌을 찾아 나서게 된다. 우수한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한 신참 성기사인 주인공 ‘킬리안’은 우연한 사건을 통해 사념석과 엮이게 되며, 결국은 그 자신도 돌을 모으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여기까지 보면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도 고대 마법 유물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통속적인 구조다. 그러나 문제는 디테일이었다. 전체적인 구상은 이해할 수 있으나, 세부적인 내용에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초반에 가게 되는 ‘망자의 기둥’ 던전은 쉽게 들어가거나 나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가까스로 던전을 탈출하고 보면, 던전에 갇혀있던 NPC 성직자가 아무 설명도 없이 일행보다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전개가 잦았다. 심지어 결말조차 찝찝하게 마무리돼 미완성 논란까지 낳았다.
그렇다고 전작들처럼 아직 국내에 생소하던 재미 요소를 찾아 도입한 것도 없었다. 게임 시스템상 고전적 턴 기반 전투 대신 반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액티브 타임 배틀’을 도입하고, 캐릭터간 연계를 통해 강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등 변화는 많았다. 그러나 이는 이미 국내에서도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로 익숙한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2’가 발매된 시점에는 이미 수많은 스토리 중심 게임들이 나와 있었기에 더 이상 선발주자의 이득도 누릴 수 없었다.
온라인으로 개발된 ‘어스토니시아’ 세계관 게임들도 실망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2001년 서비스를 시작한 ‘포가튼 사가 2’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MMORPG였다. 그러나 개발 단계의 발표와 달리 부족한 콘텐츠와 잦은 버그로 몸살을 앓았고, 여기에 더해 성급한 유료화 전환으로 이용자들이 대거 이탈하며 결국 몇 년 후인 2007년 초 서비스 중단에 이르렀다.
마지막 ‘어스토니시아 온라인’ 프로젝트는 2007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2013년까지 도합 6년이라는 시간을 끌었으나, 이 또한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난황을 겪은 끝에 2013년 개발 방향을 완전히 바꿔 모바일 대전게임 ‘어스토니시아VS’로 전환된 것이다. 사실상 MMORPG로서의 개발은 취소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온 ‘어스토니시아VS’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서비스가 종료됨에 따라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계보는 사실상 끊기고 말았다. 세계관이나 스토리가 발전할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름뿐인 전작 명성에 기댄, 내실 없던 세계관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와 ‘포가튼 사가’가 1990년대 국산 RPG 시장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시리즈가 하나의 브랜드로서 어떠한 정체성을 확립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오랜 명맥을 이어온 게임 시리즈는 대개 자체적인 세계관에서 오는 고유한 분위기와 내러티브가 있다. 그러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시리즈는 확고한 세계관을 갖추고 이를 게임에서 풀어내지 못한 채 이름뿐인 브랜드를 내세웠다.
첫 두 작품 성공 이후 손노리는 매번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뒤를 잇는 작품이라며 새로운 게임을 홍보했다. 그러나 과연 ‘어스토니시아’ 세계관은 어떤 곳인가? 20년이 넘도록 이어온 브랜드지만 대체 이 게임의 무대가 되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명확히 떠올릴 수 없다. 그저 검과 마법이 있는 서양 중세풍 판타지라는 막연한 이미지가 전부다. 결국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시리즈는 말로만 같은 세계관이라고 할 뿐, 정말 같은 세계라고 느끼게 해줄 연출에는 너무나도 소홀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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