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선택의 자유 고집한 장인 라리안, 그리고 '디비니티'
2020.01.30 18:18게임메카 이새벽
올해 발매를 앞둔 대작 중, 유독 고전 RPG 팬들이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 하나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 최신작 '발더스 게이트 3'다. 워낙 오랜만에 돌아온 대형 브랜드인지라 덩달아 누가 이 게임을 만드는 지도 화제에 올랐는데, 라리안 스튜디오라는 다소 낯선 이름이 나왔다.
아마 디비니티 시리즈를 만든 스튜디오라고 하면 감을 잡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그것도 RPG 마니아 이야기. 여전히 많은 게이머가 이 라리안 스튜디오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몇 해 전 화제가 된 디비니티는 정확히 어떤 게임인지에 대해 자세히 모르고 있다. 이에 이번 주에는 발더스 게이트 3 개발을 맡게 된 라리안 스튜디오와, 지금까지 이들의 간판 타이틀로 자리매김해온 디비니티 시리즈가 대체 어떤 게임인지 알아보자. 아마 이들이 개발 중인 발더스 게이트 3의 방향성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감이 잡힐 것이다.
6년 방황, 3번 개명… 그 끝에 간신히 출시된 ‘디바인 디비니티’
라리안 스튜디오 하면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의 성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얼핏 승승장구 중인 개발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라리안은 그리 순탄치 않은 세월을 겪어 온 뿌리깊은 중견 개발업체다. 이런 라리안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이름을 날릴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단연 이들의 간판 시리즈 디비니티가 있었으니… 사실상 디비니티의 역사가 라리안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짐작했겠지만 디비니티는 결코 순탄하게 탄생한 시리즈가 아니다. 라리안 스튜디오는 1996년 벨기에의 스벤 빈케(Swen Vincke)라는 개발자에 의해 설립됐다. 어린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게임 만드는 것을 취미로 삼던 그는 회사 설립 당시에도 이미 혼자 몇 개의 게임을 만든 독립 개발자였다. 그는 울티마 5의 높은 자유도에서 영감을 얻어 ‘언리스: 더 트레처리 오브 데스(Unless: the Treachery of Death)’라는 RPG를 구상했고, 이를 제작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다만 애석하게도 이 게임은 재정적 문제로 실제 개발까지 진행되지 못했다. 많은 신생 개발업체가 흔히 겪는 것처럼, 라리안 스튜디오도 게임 개발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해줄 유통사를 찾아다녔다. 당초 유통사로는 아타리가 물망에 올랐고 계약 체결을 앞둔 상태였지만, 당시 이미 아타리는 몰락하는 중이었다. 결국 아타리는 계약서 서명 며칠 전, 돌연 PC플랫폼에서 손을 떼겠다 선언했고 투자를 백지화시켰다.
이후로도 라리안 스튜디오는 자신들에게 투자해줄 유통사를 찾아 헤맸다. 그 결과 독일 개발업체인 애틱 엔터테인먼트 소프트웨어와 공동 개발하는 조건으로 ‘언리스: 더 트레처리 오브 데스’를 계속 개발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게임 이름은 ‘더 레이디, 더 메이지 앤 더 나이트(The Lady, the Mage and the Knight)’로 바뀌었다. 여기에 독일 TRPG ‘더 다크 아이즈’ IP를 사용하는 등 많은 외부 개입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더 레이디, 더 메이지, 더 나이트’ 역시 중도에 유통사의 불화로 개발이 취소되고 말았다. 1997년 출시된 블리자드의 디아블로가 큰 성공을 거두자, 독일 개발업체와 유통사가 게임을 디아블로처럼 다시 만들자고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게임을 처음부터 다시 개발할 여유가 없던 라리안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이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프로젝트는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결국 라리안 스튜디오는 직원들 월급이라도 챙겨주기 위해 당장 돈이 될 만한 소규모 게임이나 교육 소프트웨어를 만들며 버텼다. 그러던 1999년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서든 스트라이크를 유통해 큰 돈을 쥔 CDV라는 독일 회사와 연락이 닿은 것이다. 다만 ‘더 레이디, 더 메이지, 더 나이트’ 라는 이름은 브랜드 권리 문제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에 또 한 번 게임 이름을 바꾸어야 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바로 ‘디비니티: 더 소드 오브 라이즈(Divinity: the Sword of Lies)’였다.
그러나 CDV 역시 라리안에게 그리 우호적인 파트너는 아니었다. 이들도 게임 개발과 홍보에 있어 여러 황당한 요구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CDV는 서든 스트라이크가 ‘S.S.’로 불린 것처럼 똑 같은 앞 글자 두 개가 이어지는 게임 이름을 원했고, 게임 이름을 ‘디바인 디비니티’로 바꾸길 원했다. ‘D.D.’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또한 CDV는 홍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유로 게임과 상관없는 헐벗은 금발 여성 캐릭터를 내세우기도 했다.
철저한 을이었던 라리안은 이러한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실 이 정도는 약과였다. 적절한 투자를 받지 못해 개발 도중에 정리해고까지 단행해야 했던 것이다. 30명으로 시작한 디바인 디비니티 개발팀은 스벤 빈케 본인을 포함해 3명으로 확 줄어들었다. 그 와중에 CDV는 게임을 예정보다 6개월이나 빨리 출시하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해외 웹진 게임인포머와의 인터뷰에서 빈케는 그 시기가 가장 끔찍했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벤 빈케와 단 두 명 남은 개발자는 악전고투 끝에 게임을 완성했다. 그렇게 디바인 디비니티는 세 번 기획이 바뀌고 유통사도 바뀌는 고난 끝에 2002년 간신히 출시될 수 있었다. 빈케는 디바인 디비니티가 언리스: 더 트레처리 오브 데스와 더 레이디, 더 메이지 앤 더 나이트를 계승한다고 했으니, 사실상 6년의 방황 끝에 만들어진 게임인 셈이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기에 출시 직후 빈케는 게임 개발을 그만 두고 회사 문을 닫을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게임은 출시됐고 어느 정도 수입도 나왔다. 여유가 생기자 스벤 빈케는 더 나은 게임을 만들고 싶어졌다. 사실 디바인 디비니티는 금전적인 문제로 오랜 세월 방황한 끝에 많은 제약 속에서 급히 만들어낸 게임이었다. 보다 안정된 상황에서라면 훨씬 더 완성도 높고 그럴 듯한 게임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그는 추가로 개발자를 채용해 11명으로 구성된 팀을 만들었고, 디비니티 시리즈 제작을 본격화했다.
디비니티 시리즈 첫 세 게임, 전부 장르가 다르다?
앞서 디비니티 시리즈가 어떤 배경 속에서 시작됐는지를 간단하게 짚어보았으니, 이번에는 이 시리즈가 어떤 내용인지 확인해보자. 시리즈 첫 게임 디바인 디비니티가 제작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게임은 라리안 입장에서 썩 만족스러운 작품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라리안은 후속 게임들을 계속 다른 장르로 만들며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그 결과 디비니티 시리즈의 처음 세 게임은 전부 다른 장르로 제작되는 묘한 결과가 나왔다.
첫 게임인 디바인 디비니티는 디아블로 2와 비슷해 보이는 아이소메트릭 시점과 인터페이스 탓에 출시 당시 디아블로 아류라는 오해를 받았다. 하필 이 게임이 출시된 2002년이 디아블로 2: 파괴의 군주가 RPG 시장을 거의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간의 인식과 달리 디바인 디비니티는 디아블로 시리즈와 큰 차이가 몇 개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전투와 아이템 수집에 중점을 둔 디아블로와 달리, 선택지와 퀘스트 수행 방식에 따라 스토리가 바뀐다는 점이었다.
디바인 디비니티의 스토리는 상대적으로 단순하다. 게임은 ‘리벨론’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시작한다. 이 세계는 과거 사악한 흑마술사에 의해 악마에게 팔아 넘겨질 뻔했지만, 이른바 ‘칠인회’라는 이들이 나타나 스스로를 희생해 구원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게임 시작 시점에는 다시 한 번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무명의 주인공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억을 잃은 채 한 마을에서 깨어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와 정치적 음모 등을 몇 번 거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실은 자신이 리벨론을 다시금 악마에게서 구하기 위해 지상에 강림한 신성한 반신적 존재 ‘디바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이미 인간들의 배후에서 암약 중인 ‘거짓의 악마’가 광신도들을 모아 디바인에 대적할 최강의 악마 군주 ‘케이어스’를 소환할 준비를 하고 있음도 확인한다. 결국 주인공은 새 칠인회의 도움을 받아 디바인으로 각성하고, 숙적 거짓의 악마와 일전을 치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디바인 디비니티 줄거리는 전통적이라면 전통적이고, 범상하다면 범상한 이야기다. 다만 이 게임의 강점은 메인 스토리가 아니라 다양한 서브 스토리에 있다. 서브 퀘스트마다 다양한 선택지가 제공될 뿐 아니라 같은 퀘스트도 전투, 대화, 도둑질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사실 디아블로 보다는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전체적인 완성도는 약간 낮았지만, 디아블로 느낌 전투 시스템과 발더스 게이트를 연상시키는 방대한 퀘스트 선택지를 조합한 구성은 차츰 컬트적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에 라리안 스튜디오는 회사의 세를 가다듬고 2004년 확장팩 ‘비욘드 디비니티’를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 게임은 전작에서 20년 후 한 성기사가 사악한 마법사를 쫓다 악마의 저주를 받아 죽음의 기사가 되고, 이 저주를 풀기 위해 또 다른 성기사와 함께 모험에 나서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디바인 디비니티와 비욘드 디비니티는 둘 다 메타크리틱스 기준 70~80점에 해당하는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시간이 흐르며 이 게임은 디아블로 아류라는 오명을 조금 벗어내며 나름 팬층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를 발판으로 라리안 스튜디오는 2009년, 후속작 ‘디바인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를 출시했다. 디바인 디비니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원만한 과정 속에서 제작한 게임이었다.
그런데, 디바인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는 전작과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었다. 디아블로와 발더스 게이트를 떠올리게 했던 데 반해, 이 게임은 마치 위쳐나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에 가까워 보였다. 카메라 시점이나 인터페이스는 물론이고, 게임 구성도 크게 변화해 전작 팬들은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면 전작으로부터 수십 년 후를 배경으로 한다. 전작 주인공은 악마 군주 케이어스가 강림할 그릇으로 선택된 아기인 데미안을 구해 아들처럼 키웠다. 그러나 악마를 섬기는 광신도 ‘검은 결사’는 매혹적인 여성 마법사 ‘이그레인’을 보내 데미안을 유혹해 내면의 악을 깨우고자 했다. 이에 디바인은 이그레인을 붙잡아 참수했지만, 이로 인해 데미안은 디바인에게 직접 대적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리벨론의 여러 왕국은 반신 디바인과 악마 군주의 숙주 데미안 파벌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고대 드래곤의 힘을 받은 ‘드래곤 나이트’들은 처음에는 디바인 측에 가세했지만, 이후 디바인을 배신해 암살하는 죄를 저질렀다. 이로 인해 게임 시작 시점에 드래곤 나이트들은 디바인의 충실한 성기사로 이루어진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사냥 당해 거의 전멸한 상태다.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의 주인공은 바로 이 신입 드래곤 슬레이어다.
그러나 게임이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주인공은 심한 부상을 입은 최후의 드래곤 나이트를 만나고, 우연한 과정을 통해 그 드래곤 나이트의 힘을 흡수하게 된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드래곤 나이트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 탓에 주인공은 동료들에게 쫓기며 자신이 드래곤 나이트가 되어야 했던 이유와, 과거 드래곤 나이트들에게 씌워진 음모를 파악하고, 외차원에 감금된 전작 주인공 디바인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오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는 전작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다양한 스토리 선택지와 퀘스트 수행 방식을 진화시켜 계승했다. 선택지에 따라 메인 스토리까지 다소 다르게 진행되는 등,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실제 게임 플레이가 달라지도록 해 플레이어가 게임 스토리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보다 확대했다.
이후, 2013년 나온 세 번째 게임은 또 장르가 바뀌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RPG조차 아니라 아예 RTS가 됐다. 디비니티 시리즈의 세 번째 게임인 디비니티: 드래곤 커맨더는 디바인 디비니티로부터 약 8,000년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 문명을 배경으로 삼았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악마의 음모로 황제가 서거하고 여러 후계자들에게 찢겨 나가는 중인 제국에서, 황제의 마지막 사생아이자 드래곤의 피가 섞인 영웅이 되어 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황제가 되어야 했다.
독특한 점은 게임 장르가 RTS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이 게임 스토리에 반영되는 시스템을 또다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드래곤 커맨더는 전투 시작 전에 몇 번 정치적 단계를 거친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여러 종족, 왕국, 조직에서 온 특사나 동맹들과 대화하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자원 및 기술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 다음 어느 지역을 놓고 누구와 싸울지를 턴 기반 전략 게임처럼 정한 후에 비로소 RTS 전투가 시작되는 식이었다. 정치, 영토전, RTS를 잘 섞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방식으로 나름 주목받은 디비니티: 드래곤 커맨더지만, 큰 상업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디비니티 3부작을 거치며 라리안 스튜디오의 명성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어떤 게임을 내놔도 준수한 게임성을 보장하고, 플레이어 선택이 흥미로운 게임 시스템을 통해 스토리에 반영되게 한다는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라리안은 착실히 회사 규모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라리안 스튜디오는 슬슬 디비니티 시리즈가 아닌 다른 게임을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벤 빈케가 새로운 사업 모델을 찾으면서, 라리안은 지금까지 쌓아온 디비니티의 명성을 계속 이어 가기로 했다. 그 모델은 바로 크라우드펀딩이었다.
크라우드펀딩으로 개화한 라리안 스튜디오의 잠재성, 그리고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북미와 유럽에서는 이미 2010년대 초반부터 킥스타터를 필두로 한 크라우드펀딩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크라우드펀딩은 창작자가 거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끔 해주는 후원 플랫폼의 역할을 한다. 옛날부터 자본 문제로 고통받아온 독립 개발자 스벤 빈케가 크라우드펀딩을 주목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본래 라리안 스튜디오는 디비니티: 드래곤 커맨더 이후 슬슬 새로운 브랜드를 개척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크라우드펀딩으로 자금을 모은다면 거대 유통사에 휘둘리지 않고 진정 자신들이 원하는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들자, 라리안은 다시 한 번 디비니티를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쌓은 디비니티의 명성과 신뢰도라면 충분히 크라우드펀딩으로 돈을 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그렇게 라리안은 2013년 3월 시작된 킥스타터 크라우드펀딩으로 신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개발 비용 일부에 대한 모금을 시작했다. 당초 라리안은 40만 달러를 모금할 예정이었지만, 한 달 간 그 두 배를 훌쩍 넘은 95만 달러가 모였다. 킥스타터가 아닌 별개 후원도 들어와 최종 모금액은 1백만 달러(약 12억 원)에 달했다. 이에 고무된 라리안은 즉시 개발에 착수, 이듬해인 2015년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출시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은 지난 시리즈가 대체로 그러했듯, 전작과의 연계성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게임은 디비니티: 드래곤 커맨더와 디바인 디비니티 사이의 어느 시점이지만, 줄거리상 주요 소재가 되는 원초적 힘인 ‘근원(Source)’은 거의 새로 조명된 설정이었다. 본래 ‘근원’은 리벨론을 창조했던 태초의 힘이지만 어떤 외계의 존재가 침략할 때 오염됐고, 이제는 ‘근원’를 끌어내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위험한 인물로 간주돼 사냥 당하게 됐다는 것이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의 주인공은 이러한 ‘근원술사’를 사냥하는 두 명의 ‘근원 사냥꾼’이다. 게임이 시작할 때 플레이어는 두 주인공의 상세 사항을 설정할 수 있고, 실제 게임도 이 두 주인공이 주요 분기점에서 서로 대화하며 쌓은 관계에 따라 스토리와 결말이 달라진다. 시놉시스는 근원술사들이 일으킨 사건을 두 근원 사냥꾼이 쫓아 전말을 파헤친다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세부 스토리는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내러티브가 달라진다.
이 게임은 초기에만 해도 많은 버그와 크라우드펀딩 당시 언급한 일부 요소 미구현으로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몇 해에 걸친 피드백과 패치로 해결하고 풍부한 읽을 거리와 선택지를 통해 훌륭한 스토리텔링을 제공하는 RPG로 극찬받았다. 라리안의 신뢰도 역시 더욱 높아졌다. 공식 발표에 따르면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은 2019년까지 250만 장이 판매됐고, 이 수익으로 라리안은 오랜 빚더미에서 해방됐다.
라리안은 이 기세를 몰아 바로 다음 작품 제작에 돌입했다. 2014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2015년 킥스타터 크라우드펀딩을 개시한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가 그 주인공이었다. 다만 이 게임도 시리즈 전통대로 전작인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과 깊은 관계가 있지는 않았다. ‘근원’이라는 소재를 이야기 중심에 두었을 뿐, 줄거리는 시리즈 첫 작품 디바인 디비니티와 더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게임성 면에서 전작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대신 게임 플레이를 더욱 풍부하게 해줄 다양한 요소가 추가되고 그래픽과 오디오에서 큰 향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게임에서 각 캐릭터는 자신의 기원(Origin)을 정할 수 있는데, 그에 따라 게임 곳곳에서 자기 과거와 관계된 NPC들을 만나고 고유한 이벤트가 발생한다. 또한 캐릭터 동기와 목표도 저마다 기본적으로 다르게 설정됐기에 플레이어가 이입해 즐길 여지도 더욱 늘어났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디바인 디비니티 주인공이 반신이 되어 검은 결사의 음모를 막은 후 일어나는 일을 다뤘다. 시기상 디바인 디비니티 2: 에고 드라코니스 이전이기 때문에 디바인은 드래곤 나이트에게 암살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친자인 알렉산더’가 주교가 된 상황이다. 디바인의 사망 이후 리벨론에는 여러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가장 큰 문제는 ‘근원’의 힘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에 알렉산더는 각지의 근원술사를 모두 잡아들이도록 지시한다.
게임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알렉산더 휘하 병사들에게 체포된 네 근원술사를 주인공으로 한다. 즉 이번에는 주인공이 네 명인 셈이다. 게임이 진행되며 주인공들은 죄수를 호송하던 배가 공허의 괴물에게 난파당해 가까스로 탈출하게 되며, 이후 세상에서 ‘근원’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는 물론 신들이 힘을 잃고 있다는 비밀까지 알게 된다. 종국에 주인공들은 신들을 대신해 ‘리벨론’의 운명을 영원히 결정하게 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전작에 비해 한층 더 흥미진진해진 줄거리에 더해서, 캐릭터에게 이입하게 해주는 각종 시스템을 다수 추가해 높은 인기를 얻었다. 전문가들도 이 게임을 우수한 퀘스트 디자인과 풍부한 선택지 덕에 여러 번 다시 플레이 할 가치가 있다고 극찬했는데, 이는 다양한 요소와 선택의 중첩이 기하급수적으로 다양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였다. 그 결과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다수의 ‘최고 내러티브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이 게임은 상업적으로도 여태껏 라리안 스튜디오가 경험해보지 못한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 2019년까지 약 300만 장 이상 판매됐는데, 이는 기존 최고 수익을 올린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을 훨씬 앞지른 수치였다. 이에 라리안은 또 한 번 디비니티를 제작할 계획이었고, 아예 ‘디비니티: 폴른 히어로즈’라는 이름까지 정해 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예상치 못한 제안이 들어와 이 게임은 개발이 취소된다. 다름아닌 발더스 게이트 3 제작을 맡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라리안 스튜디오와 디비니티 시리즈가 걸어온 길: 다양한 장르, 한 가지 철학
사실 디비니티 시리즈를 한 마디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앞서 본 것처럼 시작은 실시간 ARPG였고, 그 다음은 위쳐 스타일로 제작됐으며, 턴 기반 RPG나 복합적 RTS 장르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니 디비니티 시리즈를 장르나 게임 형식에 따라 정의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시리즈를 관통하는 철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스토리와 시스템의 조화다.
스벤 빈케는 게임 웹진 록 페이퍼 샷건과의 인터뷰에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행한 행동이 게임 내에서 의미를 띄게 된 것을 깨달을 될 때 보상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스토리 중심 게임들이 스토리 전개를 위해 플레이어의 선택이나 존재를 옆으로 미뤄두는 경우가 많다. 디비니티 시리즈는 이러한 방식을 거부했다. 이 시리즈가 보여준 지향점은 늘 플레이어가 스토리에 뛰어들어 이입하고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플레이어를 스토리에 뛰어들게 만들 수 있을까? 위와 같은 인터뷰에서, 스벤 빈케는 그 해답이 게임 시스템에 있다고 말했다.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정밀하고 상세히 만들고, 다양한 행동 지시가 가능하고, 여러 선택지가 있을수록, 그리고 그 행동들이 게임 내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수록 자유도가 높아지고 몰입도도 증대된다는 이야기다. 지금껏 디비니티 시리즈는 그러한 기준에 늘 완벽히 부응해온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지향점으로 삼아왔다고 한다.
이러한 철학 덕에 디비니티 시리즈는 ‘작은 벨기에 회사에서 만든 디아블로 아류 게임’이라는 오명을 벗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리고 라리안 스튜디오의 이러한 철학은 이들을 발더스 게이트 3 제작사로 선정되게 하기도 했다. [세계기행] 다음 편에서는 발더스 게이트에 대해 다루며, 이들의 어떤 점이 발더스 게이트라는 브랜드와 맞아떨어진 것인지 확인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