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줍는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한 디아블로 4
2023.05.31 01:00게임메카 김인호 기자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12년 5월,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왕십리 광장 앞에 줄을 섰다. 물, 간식, 의자를 가져온 사람부터, 텐트를 설치한 사람까지 아주 다양했다. 이미 하루를 넘게 기다려 지칠 법도 했지만, 모두 열정으로 가득 찬 눈빛을 띄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단 하나, 바로 디아블로 3 한정판을 구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2023년 6월 6일. 그 후속작인 디아블로 4가 정식 출시된다. 물론 지난 3월 사전 테스트로 이미 많은 이들이 디아블로 4를 즐기고 여러 리뷰와 분석을 남기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체험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테스트이다 보니 1막 스토리와 더불어 최대 25레벨까지만 육성할 수 있었고, 탈 것이나 고유 등급 아이템 등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는 이런 궁금증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과연 디아블로 4는 전작과 어떤 점이 다를까?’
사전 체험 기회를 통해 모든 콘텐츠를 충분히 즐겨본 디아블로 4는 확실히 독자적인 색이 느껴졌다. 디아블로 2의 그래픽에 디아블로 3의 콘텐츠를 섞은 그런 개념을 떠나서 말이다. 다만, 단 한가지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으니, 바로 장비 파밍의 즐거움이 게임의 근간을 지탱한다는 점이다. 과연 디아블로 4는 어떤 게임이었는지, 그 후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강화된 액션 ↔ 약화된 핵앤슬래시
지난 3월 사전 테스트 당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답답함이었다. 전작들에서 몬스터를 마구잡이로 쓸어버리며 느꼈던 시원함은 온데간데없고, 하나하나 공들여 잡느라 애를 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스킬을 다 찍지도 않았고 아이템도 갖춰지지 않았던 시점이었던 만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번 사전 체험에서는 25레벨의 벽을 넘어 더 많은 스킬을 배우고, 아이템을 업그레이드하고, 드루이드의 공물 시스템 같은 부가적인 요소들을 통해 능력치를 더 올렸다. 그러나, 답답한 느낌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잘한 몬스터조차 기본 공격으로 잡기 힘들어 영력(마나)을 소모하는 핵심 기술을 사용해야 했으며, 던전에서 정예 몬스터라도 등장하는 순간에는 한참을 때려야 다음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결국 전설 아이템으로 장비창이 거의 다 채워졌을 때쯤 깨닫았다. 디아블로 4는 핵앤슬래시 특유의 호쾌한 맛을 줄이고 액션을 강조한 게임이라는 것을 말이다. 쿨타임이 길기 때문에 스킬 한 방 한 방의 중요도가 높고, 궁극기 타격감도 확실하게 신경 쓴 느낌이 났다. 전작들 같이 마구잡이로 스킬을 난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구조라는 의미다. 이 부분을 확실히 이해하고 게임을 즐기는 편을 추천한다.
강화된 액션이 드러나는 보스전
강화된 액션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곳은 던전이나 필드가 아닌 보스전이다. 그냥 주구장창 때리기만 하면 되는 샌드백이 아니라, 패턴을 눈에 익히고 캐릭터의 스킬을 온전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 방식이었다. 스킬의 후딜과 사거리를 고려하는 것이나 보스가 패턴 시전 후 얼마나 딜타임을 주는지 등을 계산하며 플레이해야 했는데, 추가된 회피기(스페이스 바로 발동)가 이런 점들과 어우러지며 액션성을 확실히 돋보이게 만들었다.
스토리 보스전의 난이도 역시 상당한 편이었다. 기자는 '어려움' 난이도로 플레이 했는데, 보스전 중 꽤 빈번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디아블로 3에서 몇몇 주요 패턴을 제외하면 가만히 서서 공격하기만 해도 클리어 할 수 있던 것과 상반된 부분이다. 물론 자기 빌드에 맞는 좋은 위상(전설 옵션)을 획득한다면 난이도가 상당히 줄어들기는 한다. 실제로 게임 중 획득했던 한 위상은 늑대 동료 기술의 공격력을 대폭 강화해줬는데, 이를 얻고 난 후 보스전에서 죽는 일이 꽤 줄었다.
한편에서는 근거리 스킬이 원거리 스킬에 비해 불합리하다고 느낄 만한 부분도 종종 있었다. 보스가 가까운 주위를 공격하는 패턴이 많이 있는데, 원거리는 이를 따로 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정감이 높았다. 이 간격을 메우려면 근거리 스킬이 더 강력해야 하지만, 딱히 눈에 띌 만큼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울러 보스와 1 대 1로 서있을 때 소서리스의 연쇄 번개 같은 스킬은 대미지 누수가 거의 없는데, 드루이드의 칼날 발톱 같은 스킬은 보스가 이동할 때마다 회피하게 돼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도 묘한 기분을 줬다.
폐지줍는 재미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디아블로 시리즈 핵심 재미인 장비 파밍, 소위 ‘폐지줍기’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전설 아이템은 드롭될 때마다 설레는 기분을 주고, 원하는 옵션이 들어가 있을 때는 환호하게 된다. 여기에 새로 추가된 고유 등급 장비와 위상은 파밍의 재미를 더욱 극대화한다. 게임 중 고유 등급 아이템을 처음 획득했을 때는 불그스름한 테두리 빛깔과 좋은 옵션에 감탄하기도 했다.
정해진 시간 동안 던전 클리어, 지역 몬스터 처치, 구역 정화를 해야 하는 망자의 속삭임, 디아블로 3 대균열이 떠오르는 악몽 던전, 그 외 지옥물결이나 야외우두머리까지 모두 이러한 장비 파밍 과정을 보다 다채롭게 한다. 특히 망자의 속삭임은 시간 제한이 걸려 있기 때문에 은근한 긴장감 마저 느껴졌고, 보상받을 부위 선택이 가능하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곰 형태 궁극기를 늑대인간 형태로 바꾸는 등 수 없이 많은 여러 위상들은 파밍 과정의 자유도를 더욱 극대화한다. 이로 인해 나만의 독특한 빌드를 구상하고 완성해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데, 이는 교복화됐던 디아블로 3와는 확실히 다른 부분이다.
사전 테스트에 비해 감소된 전설 장비 드롭률도 게임 초반에는 크게 느껴지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완화되는 구조다. 물론, 그렇다고 파밍 과정이 절대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옵션 종류가 워낙 많은 만큼, 자신이 구상한 세팅을 완성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이번 작품에서 희귀 등급 장비까지 유저 간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도 이 부분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폐지줍기 외 도전 콘텐츠를 기대한 이들은 아쉬울 수도
다만, 앞서 소개한 모든 콘텐츠는 결국 장비 파밍을 돕는 것일 뿐이다. 망자의 속삭임 보상 선택지에 전설이 등장하는 등 무작위 요소를 가미해 약화시킨 점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보면 같은 작업의 반복이기 때문에 언젠가 지루함을 느낄 가능성이 존재한다.
디아블로 4 외 다른 RPG들도 비슷한 고민을 겪는 만큼, 나름의 답을 선보이고 있다. 로스트아크는 군단장 레이드를 통해, 원신은 방대한 이벤트 콘텐츠를 통해 해답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디아블로 4가 내놓은 답은 뭘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호하다. 개인적으로는 야외 우두머리가 타 게임의 보스전만큼 다양한 패턴과 완성도를 갖추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지난 3월 테스트는 물론 정식 출시 버전에서도 그렇지는 못했다. 100레벨 달성 시 도전할 수 있는 보스 콘텐츠가 이 공백을 메울 만큼 완성도가 높은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결국 증오의 전장(PvP) 외에는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는 셈인데, 문제는 PvP라서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이다. 개발진도 이를 고려해 증오의 전장에서 획득할 수 있는 주요 보상은 탈것이나 치장성 아이템으로 구성했고, 장비로 교환하는 부분은 효율이 떨어지도록 설계했다. 아울러 증오의 전장은 '전문 PvP 콘텐츠가 아닌 오픈월드 난투 개념이며, 명예 보다는 살육을 즐기기 위한 공간'이라고 설명한 만큼 파밍 외 도전 콘텐츠를 기대한 이들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론적으로 디아블로 4는 세계관의 잔혹함이 묻어나는 월드 표현, 액션이 강조된 전투, 다양한 빌드를 구상하고 완성하는 즐거움 등 뭐 하나 부족한 부분을 찾기 힘들다. 다만, 추가 콘텐츠 면에서 전작과는 다른 디아블로 4만의 새로운 답을 기대한 유저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출시는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집중하는 부분 중 하나는 게임을 출시한 후에도 활발한 업데이트를 제공하는 것이다”라는 개발진의 말처럼, 디아블로 4는 지금보다 더 다채로워질 모습을 기대해 볼만한 게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