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전] 게임에 생동감을 부여한 '페르시아의 왕자' 조던 메크너
2014.06.09 11:41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카라테카'와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를 개발한 조던 메크너
(사진출처: jordanmechn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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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게임을 보면 실감나는 움직임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배우의 몸에 센서를 붙여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하는 모션 캡쳐는 이미 옛 방식이고, 최근에는 배우의 얼굴 혹은 전신을 3D 스캐너로 읽어 피부와 근육, 시선, 표정의 섬세한 변화를 실시간으로 구현하기도 한다.
조던 메크너는 게임에 현실적인 동작을 반영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캐릭터 이동에 두세 개의 그림만 사용되던 기존의 틀을 깨고, ‘카라테카’와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를 통해 애니메이션과 같은 생동감을 보여줬다. 이로 인해 게임 속 캐릭터들은 단순한 도트가 아니라 스토리 속의 주연 배우가 되었다.
대학 재학 중 만든 ‘카라테카’의 대성공
조던 메크너는 1964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메크너는 어려서부터 애니메이션과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 시절에는 애니매이션 제작자가 되기를 꿈꿨지만, 안타깝게도 만화를 그릴 만큼의 재능은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을 일치감치 깨달은 그는 방향을 바꿔 소설가, 그리고 영화 각본가로 장래 희망을 변경했다. 학창 시절 내내, 그의 꿈은 헐리우드에서 인정받는 스타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메크너는 1979년 애플II 컴퓨터를 선물로 받으면서 게임과 만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게임 개발자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컴퓨터 게임에 순수한 재미를 느꼈고, 종이가 없이도 화면을 통해 간단한 그래픽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게임 산업의 중흥기에 다양한 명작 타이틀을 접하면서 게임에 대한 그의 시선은 서서히 바뀌어갔다. 게임은 영화 못지 않은 예술 매체였고, 영화와 더불어 메크너의 최고 관심사가 된다.
월반을 통해 만 20세에 미국 최고의 명문대 중 하나인 예일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메크너는 대학 시절 반쯤 취미로 여러 개의 게임을 개발했다. 사실 그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자신만의 영화 및 각본이었지만, 영화는 혼자서 만들기엔 어려움이 있었던 반면 게임은 컴퓨터만 있으면 혼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학생 시절의 조던 메크너 (사진출처: 페르시아의 왕자 개발 일지)
메크너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보냈던 1980년대 초, 미국에서는 동양적인 스포츠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종목이 인도의 요가와 일본의 가라테(공수도)였다. 메크너의 가족은 주말을 이용해 동네의 가라테 도장에 다녔다. 비록 며칠 만에 도장을 그만두긴 했지만, 이 때 접한 동양의 무술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감을 끼쳤다.
결국 그는 예일대 재학 중이던 1984년, 가라테를 쓰는 고수 가라테카가 악당 아쿠마에게 붙잡힌 자신의 약혼자 마리코 공주를 되찾기 위해 싸운다는 내용의 ‘카라테카(Karateka)’를 만든다.등장인물의 캐릭터명이나 절벽에 위치한 도장, 도복과 투구 중심의 복장 등 전체적인 느낌을 일본틱하게 구성했다. 여기에 전투 전 상대에게 예를 취하는 등 도장에서 배운 이상적인 무도가의 모습도 담았다. 이러한 장면은 국내에서는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지만,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상당히 이국적이었고 그만큼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카라테카’는 대전 격투 게임의 효시로 불린다. 비록 플레이어 간의 대전(PvP)을 구현하지는 못했지만, 단 두 명의 캐릭터가 일대일 승부를 벌인다는 시스템은 기존까지의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카라테카’에서 선보인 상/중/하단 판정과 킥/펀티에 따른 공격 리치 차이 등은 ‘리얼 쿵푸’를 거쳐 ‘스트리트 파이터’로 이어지며 대전 격투 게임의 기본 시스템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호평을 받은 부분은 캐릭터 애니메이션이었다. 이 때까지의 게임은 캐릭터에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없다시피 했다. 대부분 정지되어 있는 캐릭터가 1~2컷의 동작을 반복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전부였다. 많은 개발자들은 게임의 시스템과 액션에만 집중해 캐릭터의 동작 부분은 등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메크너는 게임 속에서도 애니메이션과 같은 부드러운 움직임을 만들고 싶었다. 그는 ‘카라테카’ 속 인물의 걸음걸이와 달리기, 주먹질, 발차기 등 모든 동작을 프레임 단위로 구현했다. 그가 다니던 가라테 도장 사범과 남동생인 데이비드 메크너가 모델이 되었다. 동생에게 포즈를 잡게 한 뒤 그것을 사진으로 찍은 후, 스케치와 채색 등의 그래픽 과정을 거쳐 게임 내에 구현했다. 이는 ‘로코스코핑(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에서 장면을 캡쳐해 채색과 스케치 등의 과정을 거쳐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술)’이라 불리는 기법으로, 당시 뮤직비디오 등에 시범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기술이었으나 평소 영상에 관심이 많았던 메크너는 이를 곧바로 게임에 응용했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게임 역사상 최초로 모션 캡쳐 기술을 사용한 사례이기도 하다.
▲게임 역사상 최초로 캐릭터 애니메이션을 반영한 게임 ‘카라테카’ (사진출처: 게임메카)
실제 인물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카라테카’는 하나의 동작에도 수 장의 그림이 들어가 1984년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움직임을 구현해냈다. 메크너의 아버지 역시 아들의 작업을 응원하는 의미에서 ‘카라테카’의 BGM을 작곡해 줬다.
그렇게 제작된 ‘카라테카’는 새로운 히트작을 찾아 헤매던 게임 유통사 브로더번드(Brøderbund)를 통해 판매되었고, 출시 직후 빌보드 차트 1위(당시 빌보드 지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판매량이 표기되었다)를 기록했다. 미국 내 총 판매량은 50만 장 이상을 기록했으며, 미국 뿐 아니라 유럽과 일본, 국내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메크너는 이때까지만 해도 게임 제작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의 꿈은 여전히 시나리오 작가였다. ‘카라테카’가 출시되고 예일대를 졸업한 그는 한동안 영화 시나리오 및 대본 집필 작업에 심취했다.
각본가와 게임 제작자 사이에서, 페르시아의 왕자
‘카라테카’의 흥행에 고무된 브로더번드는 메크너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자신들과 힘을 합쳐 ‘카라테카’의 후속작, 혹은 아예 새로운 작품을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브로더번드의 끈질긴 설득에 메크너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게임 개발을 자신의 직업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카라테카’는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는 등 최고 흥행작의 반열에 올랐지만, 정작 발매 초기 3달 간 메크너에게 들어온 돈은 75,000달러에 불과했다. 적은 돈은 아니지만, 미래를 걸기에는 불안한 금액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한 개의 게임만 더 만들자는 생각으로 1986년 브로더번드가 마련해준 사무실로 향한다.
메크너는 ‘카라테카’와 비슷하면서도 더 그럴 듯하고 복잡하며, 유머러스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공책에 끄적거린 세계관이 바로 술탄과 공주, 소년이 등장하는 ‘페르시아의 왕자’다. 이 작품은 영화 ‘인디아나 존스: 레이더스’의 어드벤처 요소와 영화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의 배경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페르시아의 왕자’의 초기 설정은 단순했다. ‘카라테카’에서 호평을 받은 부드러운 움직임과 이국적인 배경을 유지하면서 좀 더 모험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 여기서 그는 ‘아라비안 나이트’를 떠올렸고, 공주를 구하기 위해 페르시아 풍의 궁전에 잠입하는 왕자의 스토리를 창안해냈다. 시간에 쫒기며 궁전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적의 수장인 자파를 물리치고 공주를 구한다는 세계관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여러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페르시아의 왕자’는 순탄히 개발되지 못했다. 가장 큰 원인은 그의 시나리오를 눈여겨 본 헐리웃의 한 에이전트가 영화화를 제안한 것이다. 실제로 그의 시나리오는 일류 감독들에게 소개되었으며, 크랭크 인 직전까지 진행되었다. 그러나 결국 영화 촬영이 계속 미루어졌고, 1988년에 이르러서는 해당 프로젝트가 전면 취소됐다. 이 기간 중 메크너는 각본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게임 개발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그를 괴롭게 한 것은 영화 프로젝트 취소만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홀로 지내는 생활에서 온 향수병, 영화 각본가와 게임 개발자 사이에서의 진로 갈등, 본격적인 게임 개발 시스템에 대한 적응 문제, ‘카라테카 2(결국 제작되진 않았다)’를 놓고 벌어진 브로더번드와의 협상 등 다양한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그를 압박했다. 결국 메크너는 1년 반에 걸친 기나긴 슬럼프와 방황을 겪으며 게임 개발을 포기하려는 생각까지 했다. 실제로 당시의 일기를 보면, 개발 중이던 ‘페르시아의 왕자’ 게임을 ‘완전히 녹슨 엔진이 달린 낡아빠진 자동차’라고 표현하는 등의 내적 고민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수 개월 동안 게임 개발에서 손을 떼고 있던 메크너가 마음을 다잡은 것은 1988년에 이르러서였다. 문득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니 전혀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메크너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그는 영화 각본가로서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 개발에 전념했다. 꼬여 있던 코드를 수정하고, 각종 애니메이션 요소와 퀄리티를 보완했다. 그렇게 ‘카라테카’의 출시로부터 5년 후인 1989년, 조던 메크너의 두 번째 작품인 ‘페르시아의 왕자’가 세상에 선보여졌다.
메크너는 ‘페르시아의 왕자’의 실감나는 동작 녹화를 위해, 뉴욕 본가에 있던 남동생인 데이비드를 LA로 호출했다. 그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주차장에서 동생에게 흰 옷을 입힌 후, 벽을 오르고 점프를 하는 등의 동작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이후 촬영한 영상에서 컷을 추출해 초당 15프레임의 움직임을 게임 내에 구현했다. 참고로 동생에게 흰 옷을 입힌 이유는 당시 디지타이저(아날로그 필름을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해주는 스캐너)가 흰 색과 검은 색만을 인식했기 때문에, 아스팔트 배경을 검은색으로 놓을 경우 동생의 몸은 흰색으로 보이게끔 해야 움직임을 확실히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흰 내복에 흰 머리를 지닌 ‘페르시아의 왕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주차장에서 녹화한 영상을 바탕으로 그래픽을 입혔다(사진출처: 유튜브 캡쳐)
‘페르시아의 왕자’는 발매 초기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발매 첫 달에는 고작 100여 장의 판매고를 올릴 정도였다. 이유는 1989년 당시 미국 PC시장의 유행이 ‘페르시아의 왕자’의 주력 플랫폼이었던 애플II에서 16비트 IBM PC로 넘어가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메크너는 게임 개발에서 손을 놓고 각본가로서의 일에 집중했다. 마침 당시 메크너의 각본 중 ‘어둠을 기다리며(Waiting for Dark)’의 영화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후속작을 개발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 ‘페르시아의 왕자’는 전세계 게임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게임은 바다 건너 유럽과 일본 등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으며 각종 콘솔 플랫폼으로 이식된 데 이어, IBM PC 버전이 출시되며 미국에서도 뒤늦게 돌풍을 일으켰다. 1989년 출시 당시 한 달에 수십 달러밖에 들어오지 않던 로열티는 1991년 1월 56,000 달러로 껑충 뛰었다. 메크너와 브로더번드 역시 이 때부터 ‘페르시아의 왕자’의 가능성을 확신했다.
▲다소 늦긴 했지만 대히트를 기록한 ‘페르시아의 왕자’ (사진출처: 게임메카)
게임 디자이너를 본업으로 삼다
‘페르시아의 왕자’가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자, 브로더번드는 메크너에게 적극적으로 속편 개발을 타진해 왔다. 당시 브로더번드는 주식 분할 이후 ‘페르시아의 왕자’ 효과를 등에 업고 주가가 대폭 상승했기에, 앞으로도 이 게임을 회사의 메인 프로젝트로 삼고 싶어했다. 메크너 역시 ‘페르시아의 왕자’의 실적과 브로더번드의 전폭적인 지원에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메크너는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던 ‘페르시아의 왕자 2’를 실현시키기로 결심했다.
‘페르시아의 왕자 2’의 개발은 전작과는 달리 상당히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회사 안팎의 기대와 지원도 늘어났으며, 메크너 역시 유명 게임 개발자의 반열에 한 발을 들여놓으며 게임 개발에 전념했다. 실제로 ‘페르시아의 왕자 2’의 데모가 시연된 ‘CES 1993’에서 메크너는 거의 주인공에 가까운 셔터 및 인터뷰 세례를 받았다. 메크너는 훗날 “그 해 CES는 굉장했다. 인기인의 삶을 처음 맛본 것 같았다” 라고 회상했다.
브로더번드는 ‘페르시아의 왕자 2’에 자사의 자본과 인력을 대대적으로 투입했다. 덕분에 메크너는 전공이 아니었던 프로그래밍에서 손을 떼고, 게임 디자인과 스토리 구조를 전문으로 짜는 크리에이티브 어드바이저가 되었다. 대신 전작의 프로듀서였던 브라이언 엘러(Brian Eheler)와 셔먼 딕맨(Sherman Dickman)이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전문 인력들이 대거 포진된 결과 ‘페르시아의 왕자 2’의 애니메이션 동작은 당시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개발에 대한 부담을 던 메크너는 전작에서 성 안으로 한정됐던 게임의 무대를 폐허가 된 왕국과 무인도 등으로 대폭 확장했고, 다양한 퍼즐과 스토리 나레이션 등을 추가해 몰입도와 스토리 전달력을 높였다. 전체 시리즈의 틀을 탄탄히 하는 데도 몰두했다. 일단 악당인 ‘자파’는 본격적인 악의 마법사가 되었으며, 주인공인 왕자가 공주를 보고 첫눈에 반해 궁전으로 잠입해 공주를 만난다는 만화영화 같은 장면도 다수 삽입했다. 이는 훗날 디즈니의 장면 애니메이션 ‘알라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의욕에 불타올랐다. ‘페르시아의 왕자’를 만화나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등 다방면으로 전개하려는 생각도 이 때부터였다. 전작에서 부족했던 설정을 충실히 채워넣음과 동시에 작품 후반부에는 속편을 암시하는 장면도 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페르시아의 왕자 2’는 전작에 버금가는 흥행을 거뒀고, 메크너 역시 일약 스타 개발자로 발돋움했다.
▲전작의 명성을 이어받은 ‘페르시아의 왕자 2’ (사진출처: 게임메카)
독립 개발사 설립과 연이은 불운
게임 개발에 자신감이 붙은 메크너는 93년, 샌프란시스코에 자신의 게임 개발사 ‘스모킹 카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새로운 게임을 기획했다. 영화 각본가와 게임 개발자 사이에서 방황하던 메크너는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를 통해 ‘게임 안에서 영화에 버금가는 작품을 구현하겠다’는 목표를 가졌으며, 이러한 의도가 백분 반영된 작품이 바로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다.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파리-이스탄불행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일어나는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한 1인칭 추리 어드벤처 게임이다. 수많은 분기점을 지닌 멀티 엔딩 시스템을 도입했으며, 한 편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실험적이고 세밀한 그래픽을 구현했다. 이 게임 역시 메크너의 전작들과 같은 로토스코핑 기법을 사용했는데, 배우들의 연기를 모두 촬영하는 데만 22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메크너는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를 제작하며 웬만한 영화보다 철저한 고증을 고집했다. 예를 들면 게임 내 대화는 대부분 현대가 아닌 근대 영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양한 국가를 가로지르는 기차를 배경으로 한 게임답게 영어 외에도 러시아어나 프랑스, 세르비아 등 다양한 국가의 언어를 사용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러한 점은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기도 했지만, 국내와 같이 현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국가에서는 철저히 외면받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메크너는 과거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운행 기록을 참고하여 당시의 환경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으며, 세밀한 기차 묘사를 위해 실제 침대차를 구입하기까지 했다.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세밀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려다 보니,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는 5년 이상의 제작 기간과 60명의 제작 인력, 6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이 들어간 대규모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1990년대 중반, 게임 개발에 들어간 투자로써는 최상위 규모였다.
그렇게 1997년 출시된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에 많은 팬과 비평가들은 호평을 보냈다. 그러나 유통사인 브로더번드의 마케팅 실책으로 인해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는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브로더번드는 ‘페르시아의 왕자 2’ 이후 마땅한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며 하향세에 접어들었고,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의 출시를 기다리지 못하고 경영난으로 인해 사내 마케팅 부서를 폐쇄했다. 때문에 이 게임은 어떠한 선행 광고도 없이 출시되었으며, 마니아층을 제외한 일반 유저들에게 그 이름을 제대로 알리지 못했다. 여기에 파트너사였던 소프트뱅크와 브로더번드가 마찰을 겪으면서 플레이스테이션으로의 이식마저 취소되었다. 악운이 겹쳤다.
▲6년 동안 공들여 개발했으나 흥행에 실패한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 (사진출처: 게임메카)
3D로의 부활, 그러나…
메크너는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의 출시 과정과 그 후에 일어난 여러 사업 및 금전적 문제로 인해 스튜디오를 폐쇄하고 게임 개발을 포기했다. 그러던 중, 에이도스가 1996년 발매한 3D 어드벤처 게임 ‘툼 레이더’ 시리즈가 흥행에 성공하는 것을 본 브로더번드의 자회사 레드 오브 엔터테인먼트가 실의에 빠져 있던 메크너에게 ‘페르시아의 왕자’의 3D화를 제안했다. ‘더 라스트 익스프레스’의 실패를 통해 시대의 흐름이 2D에서 3D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던 메크너는 이를 받아들여, ‘페르시아의 왕자 3D’의 게임 디자인 및 스토리 작업 감수 등에 참여했다.
메크너는 일단 3D로 바뀐 게임성에 맞춰 원작의 스토리를 완전히 리셋했다. 주인공이 사실은 자파에게 멸망당한 왕국의 후계자였다거나, 공주를 잡아가려 한 마녀의 계획 등 이전의 설정은 완전히 버렸다. 대신 술탄의 사악한 형제 아산이라는 새로운 악역을 탄생시켰다. 시리즈의 골자를 새로 짜기까지 한 것은 다소 가벼웠던 왕자의 당위성과 세계관을 좀 더 탄탄히 만들어 향후 시리즈를 대비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메크너의 계획은 또 다시 빗나가고 만다. 레드 오브 엔터테인먼트에서 1999년 출시한 ‘페르시아의 왕자 3D’가 흥행에 참패하고 만 것이다. 흥행 실패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개발 도중 레드 오브 엔터테인먼트의 모회사 브로더번드가 1998년 교육용 소프트웨어 업체 러닝 컴퍼니(The Learning Company)에 매각되면서 많은 직원들이 구조조정 된 것이 컸다.
그나마 ‘페르시아의 왕자 3D’ 프로젝트는 그 이름값으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개발 인원과 일정이 크게 축소되고 QA 지원도 거의 되지 않았다. 결국 게임은 미완성에 가까운 채로 출시되었고,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2D 횡스크롤 액션에서 3D 어드벤처로 바뀐 게임성은 전작의 팬층을 흡수하지 못했고, 전반적인 느낌 역시 ‘툼 레이더’가 보여준 그것을 탈피하지 못한 데다, 전체적인 완성도도 낮아 버그가 속출했다. 지금도 이 게임은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 중 최악이라고 불린다.
‘페르시아의 왕자 3D’의 흥행 참패로 인해 유통사인 러닝 컴퍼니는 재정적 위기를 맞았다. 결국 그 해, 러닝 컴퍼니는 장난감 제조업체 마텔(Mattel)에 인수되었다. 그러나 당시 마텔의 질 버라드 CEO는 러닝 컴퍼니 외에도 수많은 사업체를 인수한 상태였고, 러닝 컴퍼니 인수에 42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주가를 대폭 하락시켰다. 결국 질 버라드는 해임되었고, 그가 인수한 러닝 컴퍼니 역시 공중에 붕 떠버렸다.
이러한 시류의 흐름 사이에 낀 메크너의 마음고생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결국 두 번의 연속된 실패로 인해 더 이상 게임 개발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던 메크너는 자신의 꿈이었던 영화 제작으로 돌아간다.
▲악재 속에서 흥행 참패를 기록한 ‘페르시아의 왕자 3D’
유비소프트의 손에서 재탄생한 왕자
메크너는 잠시 게임업계를 떠나 영화 제작에 전념했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차베스 라빈(Chavez Ravine)’이 이 시기에 만들었는데, 메크너는 여기서 감독과 각본 등을 맡았다. 이 영화는 2003년 국제다큐멘터리협회 IDA에서 선정한 최고의 단편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했으며,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도 올랐다.
이렇게 영원히 게임업계를 떠나는가 싶던 메크너에게, 어느 날 프랑스의 게임개발사 유비소프트의 몬트리올 스튜디오 프로듀서 야니스 말럿(Yannis Mallat)이 찾아왔다.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의 팬이기도 했던 말럿은 이 게임의 후속작이 전혀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은 채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IP의 저작권을 소유한 메크너를 찾아와 새로운 ‘페르시아의 왕자’ 게임을 개발하자는 제의를 했다.
메크너는 초반엔 회의적이었으나, 그들이 제작한 데모 그래픽 영상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영상에는 그가 진정 꿈꿨던 3D에서의 왕자가 들어 있었다. 벽을 기어오르고, 달리고, 적과 진검승부를 벌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결국 메크너는 말럿의 제의를 받아들여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에 재시동을 건다.
메크너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실패작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자 3D’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그는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왕자와 공주, 그리고 사악한 수상만 남기고 나머지 부분을 전면 수정했다. 그 결과, 왕자가 이국에서 가져온 시간을 되돌리는 모래시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이야기가 설계되었다. 메크너는 처음에는 시리즈 제작에 대한 조언 정도만 맡는 등 소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점차 자신이 꿈꾸던 ‘페르시아의 왕자’가 3D로 제작되어 가는 것을 보고 생각을 바꿔 2003년엔 아예 식구들과 함께 캐나다 몬트리올로 옮겨가 정식 게임 디자이너로써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유비소프트의 손을 거쳐 2003년 탄생한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는 PC, PS2, Xbox, 게임큐브 등으로 발매되며 10여년 만의 흥행을 기록, 시리즈의 진정한 부활을 선포한다.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는 여러 게임 전문 매체의 ‘올해의 게임상(GOTY)’을 수상하였으며, 속편 개발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3부작으로 진행될 스토리의 가닥이 잡혔으며, 외전격 게임도 기획되었다. 이 때 시작된 ‘페르시아의 왕자 외전’은 훗날 독립해 나와 유비소프트를 대표하는 ‘어쌔신 크리드’로 발전한다.
▲유비소프트에 의해 새롭게 탄생한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 (사진출처: 공식 사이트)
유비소프트의 든든한 지원과 함께 리부트된 ‘페르시아의 왕자’는 메크너가 꿈꿔 왔던 신비로운 판타지를 가득 담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모래시계와 단검, 모래괴물로 변해버린 왕국, 신이 되고자 하는 수상의 음모... 그러나 이후 개발된 ‘페르시아의 왕자: 전사의 길’, ‘페르시아의 왕자: 두 개의 왕좌’는 메크너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말럿은 더 액션성이 높고 어두운 분위기의 게임을 만들기를 원했고, 이에 걸맞게 왕자를 좀 더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크너의 생각과는 다소 달랐다. 그는 왕자가 도적화 되어 가는 것에 반대했고, 언짢은 감정을 공공연히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메크너는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의 감수만을 맡은 채 개발 현업에서 떠났다. 그리고 2004년, 영국 최대 문학출판사인 맥밀런의 편집장이었던 마크 시겔(Mark Siegel)의 요청을 받아들여 ‘페르시아의 왕자’ 그래픽 노블화 작업을 시작했다. 이 그래픽 노블은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가 유비소프트로 넘어가서 리부트되기 전, 89년과 93년 발매된 ‘페르시아의 왕자 1, 2’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었다. 실제로 메크너는 1986년 ‘페르시아의 왕자 1’을 기획할 당시부터 이러한 세계관을 훗날 일러스트와 함께 만화책이나 소설로 만들고 싶어했고, 맥밀런 사는 이러한 메크너의 생각에 적극 동조했다.
한편 메크너의 참여가 최소화된 ‘페르시아의 왕자’ 시리즈는 ‘전사의 길’과 ‘두 개의 왕좌’로 이어지는 3부작을 완결짓고, 외전격인 ‘페르시아의 왕자: 잊혀진 모래’, NDS용 턴제 전략 RPG ‘배틀즈 오브 프린스 오브 페르시아’까지 다방면으로 출시되었다. 이어진 작품들은 흥행 측면에서는 전작보다 성공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큰 호평을 얻지 못했고 상복도 없었다.
▲2010년 발매된 시리즈의 최신작 ‘페르시아의 왕자: 잊혀진 모래’ (사진출처: 공식 사이트)
▲메크너가 집필한 ‘페르시아의 왕자’ 그래픽 노블 (사진출처: jordanmechner.com)
그 사이, 메크너는 ‘페르시아의 왕자’ 그래픽 노블을 마무리짓고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93년부터 접어두었던 영화 각본가로서의 꿈을 다시 쫒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월트 디즈니 픽쳐스가 2007년부터 추진해 온 ‘페르시아의 왕자’ 영화 제작에 각본가로 참여해, 자신이 만든 게임을 블록버스터 급 실사 영상으로 옮겼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으로 유명한 마이크 뉴웰(Mike Newell)이 감독을 맡고, ‘투모로우’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열연을 펼친 제이크 질렌할 (Jake Gyllenhaal)이 왕자 역을 맡은 영화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는 2010년 개봉돼 전세계적인 흥행을 거뒀다. 원작의 매력을 영상으로 잘 구현했다는 평가와 함께 시리즈의 새로운 매력을 선보여 준 이 영화는 흔히들 졸작으로 취급받는 게임 기반 영화들과는 다르게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전세계 3억 6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 수입을 거뒀으며, 국내에서도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총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 3억 6천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한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
이후 그는 ‘페르시아의 왕자’ 그래픽 노블 집필 경험을 살려 오리지널 소설인 ‘템플러(Templer)’를 2010년과 2013년에 걸쳐 출간했으며, 초창기 개발 시절의 일기를 묶은 ‘페르시아의 왕자 개발 일지’ 등도 펴냈다. 여기에 2012년에는 ‘카라테카’의 3D 리메이크에도 참여했고, 자신의 집 대청소 중 발견한 ‘페르시아의 왕자’ 애플II 어셈블리 소스 코드를 복원, 공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메크너에게 게임이란 자신의 판타지를 실현시켜 줄 많은 방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전세계 많은 개발자 및 게이머들이 ‘카라테카’의 물 흐르는 듯 한 움직임을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페르시아의 왕자’라는 마르지 않는 IP를 즐기며 꿈을 꿨다.
앞으로 메크너가 계속해서 게임업계에 남아 있을지 여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결과물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즐거움을 준다. 게임업계 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 업계 전체가 메크너의 다음 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1989년 당시의 ‘페르시아의 왕자’ 소스 코드가 담긴 디스켓(사진출처: jordanmechner.com)
▲전세계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메크너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고 있다(사진출처: jordanmechn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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