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전] 기술적 선구자, 토탈 어나이얼레이션 크리스 테일러
2014.10.13 11:17게임메카 김미희 기자
가스 파워드 게임즈를 설립한 크리스 테일러는 북미의 네임드 개발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의 첫 대표작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커맨드 앤 퀀커’와 ‘워크래프트’로 점철되어 있던 RTS에 새로운 돌풍을 일으켰다. 이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의 계승작인 ‘슈프림 커맨더’는 유닛 1000기가 동시에 맞붙는 대규모 교전을 앞세웠다.
테일러의 또 다른 대표작 ‘던전 시즈’는 기존 RPG의 복잡한 룰을 벗어 던지고, 명쾌한 액션과 전략적인 전투를 무기로 삼았다. 이러한 테일러의 무기는 기술력이다. 그의 대표작인 ‘토탈 어나이얼레이션’과 ‘던전 시즈’ 그리고 ‘슈프림 커맨더’는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기술 영역을 열며 게이머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다. 더욱 눈여겨볼 점은 높은 기술력을 게임과 접목해 기존과는 다른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 가스 파워드 게임즈의 크리스 테일러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산전수전 다 겪은 초기 시절
크리스 테일러는 캐나다의 브리티쉬 콜롬비아 주 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테일러는 특별한 선물을 받는다. 아버지가 개인용 PC ‘TRS-80’을 사준 것이다. ‘TRS-80’은 게임을 비롯해 간단한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었다. 테일러 역시 이러한 점을 십분 활용해 어린 시절부터 ‘프로그래밍’에 푹 빠져들었다. 테일러의 프로그래밍 능력은 나날이 발전했다. 고등학생 때, 학교에서 개최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어워드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였다. 본인의 능력을 인정받은 테일러는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나만의 게임을 만들어보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리고 꿈을 이룰 시기는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플라스틱 하수 파이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던 테일러는 격무에 시달리는 와중, 공장 관리자가 다른 직원에게 ‘이토록 나를 화내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라고 숙덕이는 것을 들었다. 관리자의 태도에 실망한 그는 그 날로 공장을 그만두고 지역신문을 뒤지며 프로그래머를 찾는 구인광고를 살펴봤다. 이후, 그는 벤쿠버에 있는 게임 개발사, 디스틴티브 소프트웨어(Distinctive Software)에 입사하며, 개발자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그의 첫 작품은 1989년에 출시된 야구게임, ‘하드볼 2’다. 야구게임의 원조 격인 ‘하드볼 1’은 당시에도 최고의 스포츠게임 중 하나로 평가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여기에 ‘하드볼 2’는 구속이나 주루, 타율 등, 주요 데이터를 사실적으로 활용해 전략적인 야구를 구현해냈다는 평을 얻어 전작보다 더욱 큰 성공을 거뒀다. 테일러가 참여한 ‘하드볼 2’는 국내 게이머들 사이에서도 ‘추억의 야구게임’ 중 하나로 손꼽힌다.
‘하드볼 2’ 이후에도 테일러는 야구 게임만 3개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MVP 베이스볼’의 모태가 된 ‘트리플 플레이 베이스볼’도 있었다. 또한 복싱 게임 ‘4-D 복싱’도 사실적인 모델링으로 좋은 평가를 얻었다. 훗날 RTS 대가로 이름을 알린 크리스 테일러가 스포츠게임으로 먼저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의외다.
▲ 크리스 테일러가 만든 스포츠게임, ‘하드볼 2’와 ‘4-D 복싱’
그러나 정작 테일러 본인은 스포츠게임에 매너리즘을 느꼈다. ‘앞으로 절대 스포츠게임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하기 싫은 것을 고르라면 단연 야구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테일러가 꿈꿔온 게임은 어린 시절에 즐겼던 ‘아스테로이드’나 ‘스페이드 인베이더’ 같은 작품이었다.
스포츠게임 개발자에게 찾아온 미지의 프로젝트 – 토탈 어나이얼레이션
테일러는 매우 부지런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짬을 내어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의 초기 콘셉을 생각한 시점도 디스틴티브 소프트웨어에서 근무하던 중이었다. 당시 그가 주목한 게임은 웨스트우드의 ‘커맨드 앤 퀀커(이하 C&C)’였다. ‘C&C’는 테일러가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모든 것이 들어있는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작품이었다. 이에 테일러는 ‘커맨드 앤 퀀커’ 같은 게임을 만들되, 지형과 유닛을 모두 3D로 구현해보자고 결심했다. 2D에 머물렀던 RTS에 3D 시대를 열며, 가장 장대한 전투를 표현해보자는 것이었다.
이후 크리스 테일러는 ‘원숭이 섬의 비밀’을 만든 론 길버트에게 같이 3D RTS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휴멍거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아동용 게임을 만들고 있던 론은 이제 곧 하드코어 게임 시대가 열릴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에 론 길버트는 테일러와 함께 이 게임을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캐나다에는 테일러의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인 회사가 없었다. 이에 테일러는 고향인 캐나다를 떠나 미국 시애틀로 자리를 옮겼다. 집과 차를 팔고, 심지어 아내와도 헤어지며 미국에 온 테일러의 머릿속에는 꿈을 이루자는 생각밖에 없었다.
테일러는 1996년 1월, 휴멍거스 엔터테인먼트가 설립한 독립부서, 케이브독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해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의 디자이너 겸 프로젝트 리더를 맡는다. 회사에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매우 멋진 전쟁게임(The Really Cool Wargame)’이라는 타이틀을 붙였을 정도로 그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러나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는 결정적인 결함을 발견한다. 당대 PC로 지형과 유닛 모두를 완벽한 3D로 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플레이에 영향을 줄 정도로 프레임 레이트(화면에 데이터를 표시하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려졌다.
이에 테일러는 차선책을 찾았다. 우선 배경을 2D로 프리 랜더링하고, 그 위에 3D로 구현된 세부적인 지형과 유닛을 얹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평평한 판을 먼저 불러놓고, 그 위에 언덕이나 나무 등을 배치해 맵을 구현하고 그 위에 건물, 유닛을 올리는 방식이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가 초기 설계만큼이 중요하게 여기는 작업은 바로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것이다. 작은 요인이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소프트웨어’인만큼 완성 수준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해 살펴봐야 완제품을 실수 없이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선 것이다.
▲ 3D RTS 시대를 연 ‘토탈 어나이얼레이션’
일련의 과정을 거쳐 크리스 테일러와 그의 개발팀은 3D 지형이 구현된 RTS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당대에 3D RTS가 없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혁신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이것만으로는 쟁쟁한 경쟁작이 버티고 있는 RTS에서 돋보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른 게임에는 없는 게임플레이 요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이에 테일러는 에너지와 메탈, 2가지 자원을 토대로 듀얼 자원 시스템을 채택했다. 메탈은 건물 건설과 유닛 생산, 에너지는 건물을 돌리거나 일부 유닛의 공격에 소모된다. 또한 기존 RTS와 달리 자원을 무한대로 제공해, 유저가 게임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도록 설계했다.
1997년 봄에 언론에 첫 공개되며 눈을 사로잡은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같은 해 9월 19일에 출시됐다. 3D로 구현된 첫 RTS인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비주얼은 물론 게임성에서도 차별화를 꾀했다.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린 ‘메탈’과 ‘에너지’, 2가지 자원 체계는 ‘자원과 물량 싸움’으로 한정된 기존 RTS에 자원과 병력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색다른 ‘경제관념’을 제시했다.
▲ 색다른 게임성으로 호평을 얻은 ‘토탈 어나이얼레이션’
3D를 적극 활용한 점 역시 차별화 요소로 통했다. 언덕을 오를 때는 느려지고, 내려올 때는 빨라지는 세밀한 부분까지 구현됐다. 여기에 언덕의 높낮이가 유닛의 시야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외에도 기계병기들의 막강한 화력과 엄청난 규모의 물량전, 게임음악계 거장, 제레미 소울의 웅장한 사운드 등을 바탕으로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당대 최고의 RTS 중 하나로 손꼽혔다.
3개 국어, 14개국에 출시된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8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달성했으며, 1998년에 진행된 각종 어워드에서 총 57개의 상을 휩쓸었다. 이와 동시에 크리스 테일러 역시 RTS계에서 주목해야 할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이러한 그가 RTS가 아닌 RPG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RTS 베테랑이 처음 만든 수준급 RPG, 던전 시즈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을 성공시킨 크리스 테일러는 1998년에 게임의 확장팩 ‘토탈 어나이얼레이션: 코어의 반란’을 내놓았다. 게임 개발자로서 큰 성공을 맛본 테일러에게는 다음 목표가 생겼다. 바로 나만의 게임회사를 설립하는 것이다. 마침 그는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을 만들던 동료들과 색다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바로 3D 액션 RPG를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로딩 없이 이어지는 맵을 구축해, 보다 사실적인 ‘게임 세계’를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이에 테일러는 케이브독에서 함께 일하고 있던 동료들과 함께 ‘가스 파워드 게임즈’를 설립했다.
1998년 5월에 ‘가스 파워드 게임즈’는 문을 열었다. 당시 테일러를 비롯한 개발팀의 두 손에는 ‘던전 시즈’에 대한 풀 버전 기획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전 시즈’는 약 4년 간의 개발 기간을 거쳐 2002년에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 20개월, 1년 8개월 만에 완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개발 기간이 소요됐음을 알 수 있다.
▲ 가스 파워드 게임즈 로고
테일러가 ‘던전 시즈’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시장분석이었다. 그 결과 기존 RPG의 플레이 요소를 가져오되, 보다 재미있고 쉬운 게임을 만들어보자는 판단이 섰다. 당시 RPG는 초보자가 배우기 까다로운 장르로 통했다. 특히 TRPG의 경우, 두꺼운 룰 북을 옆에 끼고 하나씩 맞춰가며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 물론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복잡한 규칙’도 재미요소로 통했으나, RPG를 해보지 않은 게이머 입장에서는 어렵다. 이에 테일러는 별도 매뉴얼이나 복잡한 규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게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으며, 전투 자체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타이틀을 만들자고 생각한 것이다.
‘로딩 없는 맵’으로 대표되는 고도의 기술력과 누구나 배우기 쉬운 간결한 게임성, 이것이 ‘던전 시즈’의 아이덴티티로 자리잡았다. 여기에 RTS 요소를 결합해 전술적인 재미를 강화했다. 이런 면모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전투다. ‘던전 시즈’는 RTS처럼 파티 내 캐릭터의 진영을 따로 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근접 전투 캐릭터인 ‘파이터’ 계열은 앞에 원거리 공격이 강한 ‘마법사’나 ‘궁수’는 후방에 두는 식으로 진영을 짜면 위치적인 이점을 노릴 수 있다. AI 캐릭터의 행동을 미리 지정할 수 있는 ‘필드 커맨드’와 이동경로를 지정하는 ‘웨이 포인트’도 적용됐다. 여기에 RTS의 UI를 응용해, 많은 캐릭터로 구성된 파티를 쉽고,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발상은 크리스 테일러를 비롯한 개발진이 이전에 RTS인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을 제작한 경험이 있다는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 고도의 기술력과 간결한 게임성이 만난 ‘던전 시즈’
테일러는 ‘던전 시즈’를 만들며 매우 정력적으로 일했다. 홀로 여러 가지 일을 해내는 추진력 있는 모습으로 팀을 이끌었다. 계약직 없이 전 직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했으며, 누구나 본인의 의견을 낼 수 있는 수평적인 사내 분위기를 조성한 점은 게임 개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테일러 본인을 합쳐 12명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팀 내에 RPG를 만들어본 경험자가 단 한 명도 없었던 힘든 상황에서도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끊임 없이 개발이 진행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항상 열정이 넘쳤던 팀 분위기였다. 처음에 너무 욕심을 부려 비대해진 게임에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실제도 사용되지도 않은 기술 개발에 열을 올리는 등, 많은 시행착오 끝에 ‘던전 시즈’는 마침내 완성됐다.
2002년 4월에 출시된 ‘던전 시즈’는 북미 RPG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디아블로’ 스타일의 속도감 있는 액션에 원하는 대로 파티를 구성하고, 나만의 전략을 펼칠 수 있는 요소가 절묘하게 맞물려 신선한 재미를 주었다. 전체 월드를 작은 맵으로 나누고, 플레이어가 있는 지역을 제외한 다른 곳은 계산하지 않는 방식으로 단 1초의 로딩도 없는 풀 3D ‘심리스’ 월드를 구현한 점 역시 높이 평가된다. 여기에 캐릭터와 몬스터는 물론, 마법, 던전 등 다양한 요소를 임의대로 조정할 수 있는 ‘시즈 에디터’는 ‘던전 시즈’의 묘미로 통했다.
▲ 색다른 RPG를 제시한 ‘던전 시즈’
3년 뒤인 2005년에 출시된 ‘던전 시즈 2’는 전작에서 아쉬운 점으로 손꼽힌 멀티플레이 요소를 강화했다. ‘던전 시즈’는 멀티플레이 시, 캐릭터 정보를 서버가 아닌 PC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는 방식을 했다. 직접적인 비교 상대였던 '디아블로 2'가 독자적인 멀티플레이 시스템, 배틀넷으로 유저들을 끌어들였다는 부분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테일러는 '던전 시즈 2'에 멀티플레이 전용 서버를 마련하고, 여기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여기에 보다 세밀해진 캐릭터 육성과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재미가 살아 있는 스토리라인, 더욱 강력해진 스킬을 특징으로 삼았다.
가스 파워드 게임즈의 ‘던전 시즈’ 시리즈는 복잡한 룰을 탈피하고, 색다른 요소를 접목해 RPG의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얻었다. 또한 훗날 게임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을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확보했다. 그러나 ‘던전 시즈 2’에 이어 확장팩 ‘브로큰 월드’까지 만든 그는 다시 본거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잠겼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의 뒤를 잇는 정신적인 후속작 ‘슈프림 커맨더’를 만들자는 결심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스케일에 테크닉을 붙이다 – 슈프림 커맨더
테일러가 ‘슈프림 커맨더’를 만들자고 결심한 시점은 ‘던전 시즈 2’를 출시한 직후다. 당시 그는 본인 스스로가 RTS에서 어느 정도의 정점에 올라설 수 있나를 알아보고 싶었다. 여기에 게임이라는 분야에서 가장 깊이 있는 전략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다. ‘슈프림 커맨더’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로, 세로 81km 규모의 거대한 맵과 유닛 수백 기가 동시에 격돌하는 대규모 교전이다. 그러나 테일러는 단순히 ‘스케일’만으로는 색다른 RTS를 만들 수 없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스케일은 본인이 만든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에서도 보여줬기 때문에 유저들을 끌어들일 색다른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테일러는 ‘스타크래프트’ 등 기존 RTS의 정석으로 통하는 종족간 상성, ‘가위바위보’ 개념을 탈피했다. 이 점은 ‘슈프림 커맨더’의 거대한 맵 크기에서 비롯된다. ‘최고의 사령관’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슈프림 커맨더’의 플레이는 야전 사령관과 같다. 유닛 하나하나를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움직임을 읽고, 병력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에 집중한 것이다. 게임 중 마우스 휠을 돌려 줌 아웃하면 마치 거대한 지도가 펼쳐진 듯한 화면이 뜨며, 이를 통해 아군은 물론 적군의 위치와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즉, 아군과 적군이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도 위에 모형을 두며 작전을 짜는 사령관과 같은 플레이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 더욱 거대해진 스케일로 승부한 ‘슈프림 커맨더’
여기에 수륙양용탱크와 같이 2가지 이상의 전투 스타일을 소화할 수 있는 유닛을 넣어 전술적인 면을 강화했다. 또한 지형 고저차에 따른 어드밴티지를 부여한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의 특징은 ‘슈프림 커맨더’에서 더욱 강화됐다. ‘슈프림 커맨더’는 독자적인 전술 물리엔진을 도입해, 유닛의 공격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지형을 표현했다. 앞에 있던 언덕이 폭파되어 평지로 변하거나, 지나가던 거대 유닛에 밟혀 소형 유닛이 터지는 상황까지도 사실적으로 연출됐다. 부대가 움직일 때마다 전투 상황에 맞춰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환경은 또 다른 전술적인 변수로 통했다.
‘슈프림 커맨더’는 2008년 6월에 출시됐다. E3에서 최고의 전략게임으로 선정됐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은 ‘슈프림 커맨더’는 명성에 비해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우선 지나치게 사양이 높았다. 게임을 만들며 제작진은 ‘우리의 역사적인 도전’을 뒷받침할 최고의 RTS 엔진을 개발하자며 의기투합했다. 엔진은 완성됐으나, 문제는 당대 최고 PC가 아니면 돌아가지 않을 수준으로 사양이 높았다는 것이다. 테일러 스스로도 “게임을 만드는데 3년이나 걸리지 않았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을지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다. 풀이하자면 3년 동안 상용 PC의 기술력이 함께 발전하며, 사양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뜻이다.
▲ 비운의 RTS 명작, ‘슈프림 커맨더’
이 외에도 지나치게 느린 게임 진행과 전제적인 구조와 유닛 간 상성을 파악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 등이 ‘슈프림 커맨더’의 패인으로 작용했다. 전략게임 마니아에게는 어필하는 부분이 있었으나, 대중적으로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다.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탓일까? ‘슈프림 커맨더’는 독자적인 게임성을 구축했으나, 대중의 선택은 받지 못한 ‘비운의 명작’으로 기록됐다.
트랜드에 새로운 기술을 더하다, 테일러의 혁신을 창조하는 방법
‘슈프림 커맨더’ 시리즈가 예상 외의 부진을 기록하며 가스 파워드 게임즈 역시 힘든 시기를 보낸다. 2008년에 출시된 ‘슈프림 커맨더 2’는 전작의 문제점을 개선했다는 것 외에는 전작과 다른 점이 없다는 평이 뒤따랐다. ‘던전 시즈’의 우주 버전으로 알려진 ‘스페이스 시즈’는 반복적인 플레이와 상투적인 스토리, 식상한 SF 설정과 캐릭터 디자인 등으로 평균 이하로 평가됐다. 신의 자리에 도전하는 반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데미갓’ 역시 당대 유행하던 ‘워크래프트 3’ 유즈맵, ‘도타’와 유사한데다가 독창성도 없다는 혹평을 듣는다.
급기야 자사의 대표작인 ‘던전 시즈 3’는 개발사가 옵시디언 엔터테인먼트로 넘어가고, 크리스 테일러가 ‘개발 자문’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2013년에 킥스타터를 통해 공개된 신작 ‘와일드맨’ 역시 ‘던전 시즈’와 ‘슈프림 커맨더’의 요소를 조합한 RPG+RTS 타이틀로 눈길을 끌었으나, 제작 도중 취소됐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과 ‘던전 시즈’, 게임 2종으로 업계 모두가 본인을 돌아보게 할 정도의 영향력을 과시한 전성기 때와 비교하면 다소 초라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혹평을 면치 못한 ‘데미갓(상)’과 도중에 개발이 취소된 ‘와일드맨(하)’
그러나 크리스 테일러의 행보는 아직 진행 중이다. ‘와일드맨’을 중단한 직후, 가스 파워드 게임즈는 ‘월드 오브 탱크’로 유명한 워게이밍에 인수됐다. 그리고 E3 2014를 통해 현재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워게이밍의 설명에 따르면, 가스 파워드 게임즈의 새 타이틀은 팀플레이 기반의 프리 투 플레이 타이틀이며, 테일러 특유의 강렬한 전투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게임 개발자로서 크리스 테일러는 당대 트랜드에 신 기술을 붙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대표작인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C&C’나 ‘워크래프트’, ‘던전 시즈’는 핵앤슬래쉬 RPG의 서막을 연 ‘디아블로’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아류로 전락하지 않은 이유는 당대에 없던 신 기술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은 3D RTS의 시대를 열었으며, ‘던전 시즈’는 로딩 없이 이어지는 맵을 구현해 게이머들에게 놀라운 경험을 제공했다. ‘슈프림 커맨더’에서는 당대 PC의 한계에 도전하는 막강한 기술력을 보여줬다.
▲ 크리스 테일러의 행보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실제로 크리스 테일러는 업계에서 ‘기술적인 선구자’로 평가된다. 여기에 기술을 단지 ‘테크’ 영역에 두지 않고 새로운 게임 플레이를 찾아내는데 적극 활용했다. 3D로 맵을 구현한 뒤, 지형을 전술적인 변수로 활용한 ‘토탈 어나이얼레이션’이 대표적인 예다. 다시 말해 크리스 테일러는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트랜드에 기술을 더해, 기존에 없던 게임을 뽑아내는 안목과 이를 현실화할 능력을 모두 갖춘 진정한 개척자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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