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전] 삼국지와 대항해시대, 코에이 창립자 에리카와 요이치
2014.10.27 09:30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2000년, 일본 코에이의 PS2용 신작 ‘결전’ 발표회장. ‘삼국지’ 시리즈를 총괄한 프로듀서 ‘시부사와 코우’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부사와 코우는 1980년부터 게임 개발을 시작해 코에이를 세계 유수의 게임 개발사로 만든 유명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대외적인 활동이 거의 없던 ‘얼굴 없는 개발자’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시부사와 코우가 등장한다는 말에 기자들의 카메라가 한 곳으로 집중됐다. 그러나, 무대에 오른 사람은 코에이의 전 사장이자 지난 해 회장으로 취임한 기업가 ‘에리카와 요이치’였다. 태연한 모습으로 프로듀서석에 앉은 그는 의아해 하는 기자들 앞에서 폭탄 발언을 했다. “제가 바로 ‘삼국지’와 ‘신장의 야망’을 만든 시부사와 코우 입니다.”
‘시부사와 코우’라는 가명을 썼던 에리카와 요이치. 그는 코에이를 창립해 세계 유수의 게임 개발사로 만든 기업가이지만, 한편으로는 ‘삼국지’와 ‘신장의 야망(일본명: 노부나가의 야망)’으로 대표되는 게임을 개발한 역사 시뮬레이션 장르의 선구자다. 위 일화에서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게임 개발에 힘써 왔고, 회장직에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개발 최전선으로 돌아온 괴짜이기도 하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게임 제작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발견한 순도 100% 게임개발자, 에리카와 요이치는 어떤 인물일까?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 [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 코에이 창립자이자 ‘삼국지’, ‘대항해시대’의 개발자 에리카와 요이치
(사진출처: trendy.nikkeibp.co.jp)
망해가는 염료 도매상 주인, 게임에서 길을 찾다
요이치는 1950년 일본 토치기현 아시카가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수학 과목에 관심이 많았지만, 시대적 특성상 컴퓨터는 한 번도 접하지 못했다. 대신 농구나 재즈 밴드 등에 몰두했고, 고교 시절에는 역사 선생님에게 영향을 받아 역사에 빠져들었다. 요이치를 지도한 역사 선생님은 단순 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과거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의 일대기와 시대적 흐름을 통해 역사를 즐기는 법을 가르쳤다. 이 때부터 요이치는 국내 역사소설은 물론, '삼국지연의' 등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지식을 쌓았다.
요이치의 가문은 대대로 염료 도매업을 해 왔다. 요이치 역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가업을 잇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명문대인 게이오대학 상업학부를 졸업하고 오사카에서 염료판매업을 배운 후 27세에 고향인 아시카가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아버지가 경영해 오던 염료 도매상은 경영 악화로 문을 닫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요이치는 자신이 가업을 되살리겠다는 각오로 코에이(光營)를 창업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섬유업계는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었다. 섬유업계를 기반으로 한 염료 도매업계에서도 제 살 깎아먹기 식의 경쟁이 계속됐다. 요이치는 2년 동안 온 힘을 다해 회사를 경영했지만, 1명밖에 없는 직원 월급을 주고 나면 부인과 둘이 먹고 살 생활비조차 마련하기 어려운 나날이 계속됐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요이치는 날로 피폐해져 갔다. 경영자의 자질이 없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고, 결국엔 살아갈 의욕조차 잃어버렸다. 그러던 와중,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PC 잡지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컴퓨터는 경영에 필요한 재고나 판매 및 지출관리는 물론, 교육과 쇼핑, 게임에까지 골고루 활용 가능한 마법 상자였다. 그러나, 이제 막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이 시작될 무렵이었기에 컴퓨터는 30만 엔이나 하는 고가였다. 수익은 고사하고 처가의 유산까지 처분해 가며 염료상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컴퓨터를 구입하는 것은 그야말로 꿈에 가까웠다.
그러나, 실의에 빠져 있는 요이치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요이치의 아내 에리카와 케이코였다. 케이코는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로해주기 위해 어렵사리 모은 적금을 깨 요이치의 30세 생일 선물로 컴퓨터를 선물했다. 요이치는 뛸 듯이 기뻐했고, 독학을 통해 프로그래밍을 배워 업무에 도움이 되는 재고와 판매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요이치에게 있어 컴퓨터란 고달픈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는 일종의 도피처에 가까웠다.
▲ 요이치(우)와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준 케이코(좌) (사진출처: 코에이테크모 공식 홈페이지)
그러나 프로그램 도입과 별개로 여전히 장사는 잘 되지 않았고, 남는 시간에는 취미 삼아 게임을 만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게임 제작이었지만, 이는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인기를 끌던 ‘스페이스 인베이더’나 ‘팩맨’ 등은 반사 신경과 감에 의존하는 액션 장르였다. 당시에도 깊은 사고를 요하는 게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다수가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30세였던 그에겐 어린애 장난 같았다.
그래서 요이치는 부인 케이코가 좋아하는 주식 투자를 테마로 한 게임을 제작했다. 바로 ‘투자 게임(1980)’과 ‘가와나카지마의 함전(1982)’이었다. 즉각적인 반사 신경보다는 깊은 생각과 판단을 중요시 하는 이 게임들은 성인들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특히 ‘야마나카시마의 함전’은 ‘신장의 야망’에 앞서 세계 최초로 상용화(극히 제한적이었지만)된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으로도 평가 받는다.
초기에만 해도 자신과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기려고 만든 아마추어 작품이었지만, 게임이 예상보다 잘 만들어지자 요이치는 생활비에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로 당시 유행하던 PC 잡지에 광고를 냈다. 잡지를 통해 자신의 게임을 소개하고, 관심 있는 사람이 전화로 연락을 하면 게임이 담긴 카세트를 우편으로 부쳐 주는 방식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요이치는 게임 개발을 본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리차드 게리엇이 세계 최초로 ‘아칼라베스’ 게임을 상용화한 것이 불과 1년 전인 1979년이었고, 일본에서는 PC게임 소프트웨어 제작/판매업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없었다.
그러나, 요이치의 첫 작품인 ‘투자 게임’은 PC 동호인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대량생산이 불가능해 장당 5만 엔이라는 다소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었지만, 인기는 나날이 늘어 갔다. 밀려드는 주문에 요이치는 하루 종일 게임 포장과 배송에 매달려야 했고, 얼마 안 가 게임 판매 수익이 본업인 염료 도매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요이치는 전율했다. 어려운 생활에 생각지 못했던 큰 수익이 들어온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의 호응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염료 도매업에서 삶의 보람을 찾지 못했던 그에게 게임 개발은 ‘제 2의 인생’과도 같았다.
“돈을 벌지 못하는 장사를 하고 있어 괴로웠던 시절이므로 돈이 들어오자 춤을 추었습니다만,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고객으로부터 반응이 있다는 것이 더 기뻤습니다. 재미있었다든가, 밤을 새워 했다든가 하는 고객으로부터의 편지와 전화가 쇄도했습니다. 지금까지 일에서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때 ‘일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통감했으며 보람을 느꼈습니다.” -에리카와 요이치 |
▲ 요이치의 초기 작품 ‘투자 게임’과 ‘가와나카지마의 함전’
게임산업 초창기였기에 별다른 타이틀 이미지가 없었다 (사진출처: geocities.co.jp)
본격적인 게임 제작 시작, ‘신장의 야망’과 ‘삼국지’의 신화
첫 작품의 흥행에 힘입은 요이치는 게임 제작을 더욱 본격화한다. 그는 본업인 염료 도매상을 접고, 코에이 사업 분야를 PC게임 제작/판매업으로 바꿨다. 그는 가게 한 켠에서 컴퓨터 관련 물품을 판매함과 동시에, 뒤쪽에서는 개발 스튜디오를 지휘하며 수많은 게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고 다양한 고객 반응을 보기 위해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1983년에는 성인 게임 분야에도 뛰어들어 일본 최초의 성인 게임이라 불리는 ‘나이트 라이프’를 시작으로, ‘코에이 스트로베리 포르노’라 불리우는 ‘단지처의 유혹’, ‘네덜란드 부인은 전기뱀장어 꿈을 꾸는가?’와 같은 타이틀을 다수 출시했다. 비록 코나미는 주식 상장을 위한 기업공개를 앞둔 시점에서 기업 이미지 관리 상 성인물 업계에서 손을 뗐지만, 그 뒤를 이어 스퀘어, 에닉스, 팔콤 등 다수의 게임 개발사가 성인 게임을 제작하는 등 업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코에이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성인용 게임이 아니라 요이치가 제작한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신장의 야망(일본명: 노부나가의 야망, 1983)’과 ‘삼국지(1985)’였다.
‘신장의 야망’은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일본의 유명 다이묘(군주) 중 하나를 선택해 무장을 영입하고 국가를 다스리며 전일본을 통일하는 게임이다. 국내에도 유명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수많은 실존/가상 무장이 등장하는데, 국내에서는 왜색이라 평가 받으며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지만 일본에서는 교육 콘텐츠로까지 평가 받는 등 큰 인기를 모았다.
이 게임에 사용된 게임 엔진과 시스템을 확대 적용시킨 것이 바로 ‘삼국지’다. ‘신장의 야망’과 달리 ‘삼국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고전소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고, 훗날 발매되는 삼국지 배경 게임은 모두 코에이 ‘삼국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국내에서는 2편부터 정식 발매되었고, 3편에서 범국민적인 인기를 끌며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 코에이의 첫 히트작 ‘신장의 야망’ (사진출처: retroprograms.com)
▲ ‘신장의 야망’ 엔진을 활용해 만든 ‘삼국지’ (사진출처: parknatu.tistory.com)
80년대 일본 내에 퍼스널 컴퓨터가 보급되던 시기에 맞춰, 코에이는 시대의 물살을 타고 급격히 성장해 나갔다. 1984년에는 요코하마로 본사를 이전했고, 1988년에는 미국 법인까지 설립했다. 요이치는 ‘삼국지’ 이후에도 몽골 제국 시대를 다룬 ‘푸른 늑대와 흰 사슴-징기스칸’, 중국 고전소설 수호지를 배경으로 한 ‘수호전’, 초한지를 배경으로 한 ‘향유기’, 일본 헤이안 시대 말을 배경으로 한 ‘원평합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대기를 다룬 ‘태합입지전’ 등 역사를 소재로 한 게임을 다수 출시하며 코에이를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의 대가로 올려놓았다.
이러한 무수한 역사 게임을 만드는 와중에도, 요이치가 제작한 게임은 꾸준히 인기를 모았다. 단순히 시대와 배경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요소를 강조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는 항상 새로운 역사는 새롭게 접근해야 하며, 추구하는 재미 또한 이에 맞춰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항해시대’는 이러한 요이치의 게임 개발 철학이 열매를 맺은 게임이다. ‘삼국지’나 ‘신장의 야망’, ‘징기스칸’ 등은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배경이 명확히 한정된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국가(도시)를 점차 넓히고, 주변 세력을 정복하거나 설득하며 세계(전국)를 정복하는 엔딩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대항해시대’는 달랐다. 16세기 유럽에서 시작해 전세계 해양을 모험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전쟁과 정복, 통치로는 풀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요이치는 앞서 출시된 ‘시드 마이어의 해적’을 참고해 어드벤처 타입의 교역을 주 콘텐츠로 삼았다. 초기에는 ‘해적’의 확대 재해석에 가까웠지만, 시리즈를 거듭하며 기존 역사 시뮬레이션이나 ‘해적’과는 전혀 다른 재미를 일궈냈다. 첫 작품으로주터 3년 뒤 출시된 2편에서는 ‘해적’을 뛰어넘는 게임이라는 평을 들으며 일본 및 국내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 탐험 어드벤처를 테마로 삼은 ‘대항해시대’ (사진출처: uncharted.com.ne.kr)
▲ 국내와 일본 등에서 많은 인기를 누린 ‘대항해시대 2’ (사진출처: i868.photobucket)
요이치의 대표작은 ‘삼국지’와 ‘대항해시대’, ‘신장의 야망’ 등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이지만, 그는 한편으로 탈(脫) 시뮬레이션 게임을 추구하며 액션, 연애 시뮬레이션, 경마 게임까지 수많은 장르에서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중국 고전소설 ‘봉신연의’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동명의 SRPG, 삼국지를 장수의 시점에서 재해석한 1대 다수의 강렬한 액션을 그려낸 ‘진삼국무쌍’, 서러브레드 경마 게임 ‘위닝 포스트’ 시리즈 등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모든 시도가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전작인 ‘삼국무쌍’은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출시된 대전 격투 게임이지만, 전세계 13만 장만 판매되며 흥행에 실패했다. 그러나 요이치는 ‘삼국무쌍’ 시리즈의 패인을 분석하고 액션성을 집중 강화해 ‘진삼국무쌍’으로 재탄생 시켰고, 이는 시리즈 당 150만 장 이상 판매되는 코에이의 새로운 동력원으로 자리잡았다.
기존 인기 타이틀 역시 계속해서 새로운 재미를 담으려 한다. ‘신장의 야망’ 시리즈의 경우 신작을 낼 때마다 시스템이나 연출이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으며, ‘삼국지’ 시리즈를 다른 방향으로 재해석한 ‘삼국지 영걸전’, ‘공명전’, ‘조조전’ 등의 SRPG도 만들었다. 역사를 코에이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일명 ‘리코에이션(Re+Koei+tion)이다. 이러한 요이치의 개발 철학은 코에이 전체로 확산되었고, 90년대 들어 코에이는 일본을 대표하는 게임 개발사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 전략 시뮬레이션에서 대전 액션으로 변신을 시도한 ‘삼국무쌍’ (사진출처: homegamer.com)
▲ 전작의 실패를 딛고 무쌍 액션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한 ‘진삼국무쌍’ 시리즈
(사진은 PS4로 출시된 ‘진삼국무쌍 7 맹장전’)
게임 개발은 내 존재 의의, 평생 현역 개발자로 남고 싶다
에리카와 요이치의 별명은 ‘일본의 시드 마이어’다. 실제로 시드 마이어와 요이치의 개발 인생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게임 개발에 뛰어든 점부터, 시뮬레이션 게임의 대가라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요이치와 시드 마이어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개발자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문명’ 시리즈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명성을 알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실제로 ‘신장의 야망’이나 ‘삼국지’ 시리즈의 초기작 스탭롤을 보면 에리카와 요이치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시부사와 코우’라는 이름이 총 제작자 및 스튜디오 총 지휘자 이름으로 올라와 있을 뿐이다. 게임업계에서 에리카와 요이치라는 이름은 단순한 코에이의 창립자이자 경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게임 제작자로서 요이치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코에이가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대기업이 된 2000년이었다. 그는 외부적으로 코에이 사장으로 주로 활동했고, 1999년에 아내 케이코에게 코에이 사장직을 넘겨주고 회장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신작 ‘결전’ 발표회에서 그는 자신이 코에이 대표작 ‘삼국지’와 ‘신장의 야망’, ‘대항해시대’ 등을 만든 ‘시부사와 코우’임을 고백했다.
▲코에이 게임 타이틀에만 노출되던 얼굴 없는 개발자 ‘시부카와 코우’는 에리카와 요이치였다
요이치가 극구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은, 삶의 보람을 느낀 게임 개발자의 본연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개발에 참여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회사 경영과 게임 개발을 번갈아 해 왔으나, 코에이가 세계 유수의 게임기업으로 급격히 성장함에 따라 점차 개발에 참여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것이 못내 아쉬웠던 요이치는 회사 경영을 부인에게 맡기고 게임 개발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그의 나이 51세, 개발자 인생의 2막이었다.
이후 그는 코에이 최고 고문 겸 제너럴 매니저를 맡아 현역 개발자로 자유롭게 활동했다. 대표적인 업적 중 하나는 액션 게임 ‘진삼국무쌍’의 ‘무쌍’이라는 콘셉을 다방면으로 확대시켜 ‘건담’, ‘북두의 권’, ‘원피스’, ‘젤다’ 등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며 코에이의 새로운 원동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코에이의 무대를 PC와 콘솔뿐 아니라 모바일, 웹 소셜 게임 등으로 확대시키며 시대 변화에 뒤쳐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원피스’, ‘젤다의 전설’ 등 인기 콘텐츠와 콜라보레이션을 활발하게 진행 중인 ‘무쌍’ 시리즈
요이치의 복귀 이후 코에이는 다양한 RPG, 액션, 스포츠, 퍼즐 게임은 물론, 여성&어린이용 게임과 책, 음악, 캐릭터용품 등 사업 분야를 확장했으며, 2008년에는 액션 게임으로 유명한 테크모를 흡수 합병해 ‘코에이테크모게임즈’로 거듭났다. 회사가 눈에 띄게 성장해나가는 와중에도, 요이치는 오로지 게임 개발에 몰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개발에 몰두해서일까, 요이치의 얼굴은 6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생기가 넘친다.
2010년 말 코에이테크모의 경영 악화를 이유로 마츠바라 켄지 대표가 물러난 후 요이치는 주변의 권유에 의해 다시 사장 자리에 재취임했으나, 여전히 제너럴 프로듀서를 겸임하며 코에이의 핵심 타이틀 개발 방향을 선두 지휘하고 있다. 나아가 전일본 시뮬레이션&게이밍 학회 고문을 맡아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요이치의 이념은 ‘창조와 공헌’이다. 고객이 좋아할 게임을 만들기 위해선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것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에이 역사 게임을 통해 역사에 흥미를 가졌다는 팬들을 볼 때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는 게임의 역할은 즐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게임 개발을 즐기며 최전선에 앉아 있을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Mr.코에이’ 에리카와 요이치가 아닐까 싶다.
▲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활발한 개발 활동을 하는 에리카와 요이치
(사진은 2013년 신장의 야망 30주년 최신작 발표회, 사진출처: ascii.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