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고래기름으로 발전한 '웨일펑크', 디스아너드
2017.09.21 18:51 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 '디스아너드'에 등장한 '고래 트롤선'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위키피디아)
사이버네틱스와 정보화 기술을 중심으로 한 가상세계를 그린 '사이버펑크' 이래, 특정 기술을 중심으로 한 가상세계를 그리는 유행은 점차 다양화됐다. 증기기술을 소재로 삼는 '스팀펑크', 디젤엔진과 화석연료를 다룬 '디젤펑크',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한 '바이오펑크' 등은 국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처럼 '펑크'류 세계관 자체는 이미 우리에게 꽤 익숙하게 느껴지는 장르가 됐다.
그런데 이러한 '펑크'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에너지를 소재로 한 세계관 게임이 하나 있다. 아케인 스튜디오 액션 어드벤처 '디스아너드'다. 이 게임 속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바로 '고래기름 기술'이다. 전구, 난방, 기차, 총기류 등 거의 모든 것이 고래기름을 연료로 써 움직인다. 심지어 마법도 고래를 통해서 사용할 정도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웨일펑크' 세계관이라 불러도 손색 없게 느껴진다.
이렇듯 고래기름이라는 독특한 자원을 중심소재로 삼은 '디스아너드' 세계관, 과연 고래가 어떻게 쓰이길래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일까?
모든 것이 고래기름으로 작동하는 '웨일펑크'
▲ '군도 제국'은 고래기름 기술을 중심으로 산업 발달을 이루어왔다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위키피디아)
'디스아너드'는 거대한 네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 제국'을 무대로 한다. 이곳은 몇 개의 큰 섬들이 뭉친 영국을 연상시키는 국가다. 의복이나 건축 양식 등을 보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시키는 면이 많다. 주목할 점은 '군도 제국'에서도 19세기 영국처럼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특이한 점이 하나 있으니, 이곳에서는 석탄과 증기를 이용한 기술이 아닌 고래기름을 주된 연료로 사용한다.
'군도 제국'의 고래기름 기술은 에스몬드 로즈버로우라는 자연과학자에 의해 우연히 개발됐다. 가난한 과학자였던 그는 사회적으로 실패하고 부두를 전전하다가 우연히 빈민들이 고래기름으로 불을 피우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고래기름은 장작이나 석탄보다 훨씬 강한 불꽃을 만들어냈다. 로즈버로우는 이 모습을 보고 고래기름을 연구, 전기적으로 가공하면 훨씬 순도 높은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고래기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에스몬드 로즈버로우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공식 단편 애니메이션 유튜브 영상 갈무리)
로즈버로우는 고래기름 기술을 기반으로 자기 이름을 딴 기업 '로즈버로우 산업'을 설립, 막대한 부를 쌓았다.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군도 제국'의 모든 것이 고래기름 기술로 대체됐다. 조명과 난방은 물론, 기차, 선박, 자동으로 움직이는 '시계태엽 병사'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상상도 못하던 수준의 기계들이 연달아 발명된 것이다. 이 모든 발명은 엄청난 에너지를 내는 새로운 연료 '정제 고래기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도 제국'은 고래기름으로 마법 같은 기술을 발전시켰다. 특히나 게임 중 중요인물로 등장하는 소콜로프는 고래기름을 무기기술에도 도입했는데, 실제로 게임 곳곳에 등장하는 적과 장애물은 정제된 고래기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 '디스아너드'의 '거신 기병'은 다리가 긴 기계 갑옷을 입은 정예 병사인데, 이들이 입은 갑옷의 후면에는 정제 고래기름이 담긴 연료통과 모터가 달린 것을 볼 수 있다.
▲ 고래기름을 연료로 움직이는 외골격 갑주병 '거신 기병'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위키피디아)
▲ 고래기름은 폭발성 탄환에도 사용된다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위키피디아)
고래기름은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고래기름 기술을 중심으로 산업체계가 재구성된 것이다. 고래잡이는 차세대 자원개발 산업으로 유래 없는 번창을 누리게 됐다. 고래 해체를 전담하는 기업이 생겨났고, 고래를 손상 없이 항구로 운송하기 위한 고래 예인업도 나타났다.
부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고래기름 기술이 작업능률을 향상시킴에 따라 직접 노동의 가치가 감소하고 빈민이 늘어난 것이다. 그 탓에 게임 시작 시점의 '군도 제국'은 빈부격차가 심하게 벌어지고 사회적 혼란이 끊이지 않는다. 게임 속 많은 사건들은 이처럼 여러 문제가 곪은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문제가 겹치며 터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고래기름 기술로 인해 중첩된 사회적 문제에, 특별한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발생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 '디스아너드'에서 정제 고래기름이 시설 연료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위키피디아)
마법에도 사용되는 고래기름과 고래뼈
그렇다면 '디스아너드'의 고래는 어떻게 이처럼 고에너지 기름을 체내에 축적하는 걸까?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게임 내에서는 그 이유를 암시하는 흥미로운 단서들이 등장한다. 이 세계에 사는 고래는 사실 마법 생물이라는 것이다.
'디스아너드' 세계에는 기본적으로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마법적인 힘은 모두 '공허'라는 외계에서 흘러 드는 힘이다. '공허'는 혼돈스러운 원초적인 힘이 모인 공간으로, 모든 것이 계속 새로 생성되고, 변하고, 소멸하는 곳이다. '디스아너드' 세계 사람들이 쓰는 마법은 이러한 '공허'의 기운을 응용한 기술이다. 그러나 물질세계와 '공허' 사이를 넘나드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게임 내에서도 '공허'는 주인공을 비롯한 극소수 인물만 직접 들어갈 수 있다.
▲ '공허' 속을 떠다니는 고래 (좌), '공허'의 신적 존재 '방관자' (우)
(사진출처: 게임 내 영상 갈무리)
그런데 물질세계에는 유독 '공허'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생물이 있다. 바로 고래다. 그 원리는 알 수 없지만 고래는 기본적으로 '공허'와 연결되어 있다. 제작자인 하비 스미스가 전하는 설정에 따르면, 고래는 물질세계와 '공허' 두 세계에 동시에 존재한다. 실제로 게임 '디스아너드 2'에서는 주인공이 '공허'에 들어갔을 때 거대한 고래가 허공을 떠다니며 헤엄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이는 고래가 마법의 고향인 '공허'와 관계된 초자연적 생물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러한 고래의 '공허'와의 연결은 죽은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대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죽은 고래의 뼈를 가공해 '공허'의 힘을 불러내는 '룬'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주술을 사용해왔다. '공허'의 기운을 자신에게 전달해줄 매개체로 고래뼈를 사용한 것이다. 이후 인골 주술도구와 '룬'을 만들어내는 방법도 개발되지만, 게임 시점에도 가장 순수한 '룬'은 여전히 고래뼈로 만들어진다.
▲ '디스아너드 2'에 등장하는 고래뼈 '룬' (사진출처: 게임 내 영상 갈무리)
고래를 숭배하는 신앙도 오래 전부터 성행했다. 게임 시작 시점에는 '만인의 수도원'이라는 신앙이 있지만, 그 이전에는 고래에 비유되는 여러 신들을 섬겨온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어서 '디스아너드'에 등장하는 '넝마 할멈' 전투에서는 고래뼈 장신구를 들고 "위대한 레비아탄의 뼈야, 나를 보호해라!"라고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레비아탄'은 고래를 뜻하는 말인 동시에 신적 존재인 '방관자'를 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만인의 수도원' 성직자는 '방관자'가 어떻게 생겼냐는 신도의 질문에 "고래처럼 생겼을 것"이라 답변해준다. 어느 쪽이든 신적 존재와 고래를 어느 정도 동일시한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고래기름은 단순한 고효율 에너지원이 아닌, 마법적인 에너지원일 가능이 높다. 즉 '디스아너드'에서는 '방관자' 같은 신적인 존재의 접촉을 받지 않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고래의 신체를 과학적으로 가공해 마법적 혜택을 누리는 셈이다.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고래, 차기작에서 중요성 높아질까
이처럼 고래기름은 '디스아너드' 시리즈 곳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무대가 되는 '군도 제국'이 고래기름으로 성장한 만큼, 게임 내에서도 주인공은 고래 해체작업장, 고래기름 정제소, 고래 실험소 등 고래에 관계된 다양한 장소들을 방문하게 된다.
다만 기존 작품에서 고래는 어디까지나 설정상으로만 중요하고 메인 스토리에서 크게 비중 있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고래가 '디스아너드' 세계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임은 사실이지만, 주인공의 목적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 고래는 잔인하게 사냥 당한 모습으로 '디스아너드' 시리즈 곳곳에 등장한다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위키피디아)
그러나 향후 '디스아너드' 시리즈에서는 고래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기존에 '디스아너드'의 인간을 '공허'와 연결시켜주던 신적 존재인 '방관자'가 최신작 '디스아너드: 방관자의 죽음'에서 큰 변화를 겪게 됐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결말은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크게 다르지만, 어느 선택지든 한 가지는 동일하다. 개발자 하비 스미스가 발매 전부터 암시했던 대로 '방관자'는 더 이상 인간에게 '공허'의 힘을 줄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의 시리즈에서 '방관자'는 '공허'와 연결된 신적인 존재로, 자기 흥미에 따라서 인간에게 마법적인 힘을 부여해왔다.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이 초자연적인 권능을 행사한 것은 '방관자'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방관자'가 인간에게 '공허'의 힘을 줄 수 없게 됨에 따라, 앞으로 '디스아너드' 인간이 '공허'와 접촉할 방법은 하나만 남았다. 바로 고래다. 초자연적 힘을 얻기 위한 방법이 고래 하나로 압축된 것이다.
▲ '디스아너드: 방관자의 죽음' 에서 등장한 '공허'를 날아다니는 고래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위키피디아)
게다가 전작들에서 언급된 고래에 대한 흥미로운 단서들도 많이 남아있다. '디스아너드' 등장인물 '피에로 조플린'은 "판디시아 대륙 깊은 곳에는 땅으로 간 고래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으며, '디스아너드: 방관자의 죽음'에 나오는 '방관자' 숭배자들은 가만히 있으면 고래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디스아너드'는 시리즈 대대로 고래의 영적 신비함과 중요성이 계속 암시되어 왔다. 고래가 '디스아너드' 세계에 남은 마지막 '공허'와의 접점인 점, 그리고 시리즈 내내 계속 중요성이 암시된 점을 감안하면, 차기작에서는 더욱 중요한 소재로 부각될 듯 하다. 하비 스미스가 언급했듯, 고래는 '디스아너드' 세계관의 아주 중요한 부분과 연결된 존재들이니 말이다.
▲ '디스아너드: 던월의 검'에서 묘사된 고래도살장 (사진출처: '디스아너드'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