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캐릭터 유명한 그랜드체이스, 스토리 아시나요?
2017.11.23 18:33 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자체 IP가 드문 국내 게임업계에서 유독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 중인 세계관이 하나 있다. 바로 KOG가 2003년 첫 작품을 내놓은 '그랜드체이스' 시리즈다. '그랜드체이스'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IP 가치를 이어왔고, 아직도 다양한 프랜차이즈 게임이 출시되고 있다.
그런데 막상 '그랜드체이스'에 뭐가 있나 생각해보면 조금 오묘한 느낌이 든다. '엘리시스', '아르메', '지크하트' 등 캐릭터는 떠오르지만, 정작 그들이 무슨 동기와 목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캐릭터만 있고 스토리가 없다는 느낌이다.
▲ 뮤지컬도 나왔던 '그랜드체이스'지만, 어째 스토리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사진출처: 인터파크)
사실 이러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랜드체이스'는 지금까지 메인 스토리 전개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랜드체이스'는 2003년에 나온 초기 스토리를 2015년 서비스 종료일까지도 제대로 완결하지 않은 채 흐지부지 이어갔다.
그렇다면 '그랜드체이스'는 왜 스토리를 등한시한 것일까? 그리고 정말로 스토리가 부실하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그렇게 많은 프랜차이즈 게임이 나올 수 있던 것일까? '그랜드체이스' 세계관의 허와 실을 간략히 살펴보자.
두 여성왕국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다루었던 초기 세계관
▲ '그랜드체이스' 초기 홍보 이미지 (사진제공: KOG)
처음부터 '그랜드체이스'가 부실한 스토리였던 것은 아니다. 사실 서비스 초기 '그랜드체이스'는 나름대로 독특하고 고유한 세계관과 스토리를 갖추고 있었다.
2003년 처음 서비스를 시작한 초기 '그랜드체이스'는 오늘날의 귀엽고 순진무구한 분위기와 크게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에 '그랜드체이스'는 여성들이 다스리는 두 왕국의 전쟁과 증오라는, 지금 관점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내용을 다루었다.
초창기 '그랜드체이스'의 줄거리는 이러했다. 검과 마법이 존재하는 환상의 세계인 '에르나스'에는 카나반과 세르딘이라는 여성들이 다스리는 두 왕국이 존재했다. 두 왕국은 친밀하지는 않았을지언정 적대적이지도 않았고, 서로간에 묘한 공존을 이루며 살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사악한 어둠의 여왕 '카제아제'가 나타나며 끝이 났다.
▲ 세르딘 여왕, '카제아제', 카나반 여왕 (사진출처: KOG 공식 블로그)
악마적 존재인 '카제아제'는 카나반 여왕의 측근을 살해한 후 그 모습으로 변신해 은밀히 여왕을 세뇌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며 점점 사악한 기운 아래 놓인 카나반 여왕은 결국 '카제아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세르딘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오랜 세월 공존해온 두 왕국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게 됐다.
비공개 테스트 때만 해도 두 왕국은 전쟁 끝에 끔찍한 운명을 맞았다. 세르딘 여왕은 전쟁 도중 사망한다. 자신이 세뇌를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카나반 여왕은 카제아제를 물리치지만, 이미 괴물 같은 존재로 타락한 자기 자신에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후 카나반에 영토 대부분을 빼앗긴 세르딘 군대는 소수정예의 영웅들이 모여 게릴라전을 벌이기로 하고, 이 조직이 바로 '그랜드체이스'라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암울하기 짝이 없는 설정은 너무 접근성이 낮다고 판단했는지 정식 서비스 때는 내용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두 왕국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맞지만, 카나반 여왕에게 정체를 들킨 '카제아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이에 세르딘은 왕국은 전쟁의 흑막인 '카제아제'를 찾아서 복수하기 위해 '그랜드체이스'라는 정예 추적부대를 조직한다. 즉, 주인공의 목적이 카나반에 대한 반격이 아니라 도망친 마왕을 찾아 처단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각 캐릭터가 '카제아제'를 쫓아야 하는 목표도 나름대로 명확했다. 예를 들어 '그랜드체이스' 대표 캐릭터 '엘리시스'는 '카제아제'를 물리치기 위해 떠났다가 실종된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이 집단에 합류했다는 설정이었다. 또한 '리르'는 천성적으로 선량하고 혼란을 싫어하는 고대종족인 엘프로, '카제아제'가 세상에 퍼뜨린 악과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외딴 섬에서 나왔다. 천재 마법사 '아르메'는 '카제아제'의 마법에 호기심을 느껴 그를 만나고자 '그랜드체이스'에 합류했다.
▲ 2003년 비공개 테스트 당시 공개된 '리르' (사진제공: KOG)
▲ 2003년 정식 서비스 이후 공개된 '리르' 월페이퍼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처럼 '그랜드체이스' 초기 설정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러나 게임이 오래되고 캐릭터가 하나씩 추가됨에 따라 '그랜드체이스' 이야기는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주인공 캐릭터들 공동의 목표도 차츰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신규 캐릭터 추가에만 집중한 '그랜드체이스', 스토리는 점점 산으로 가
▲ 캐릭터는 빠르게 늘어났만, 세계관과 스토리 확장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사진출처: KOG 공식 블로그)
앞서 언급했듯 처음 '그랜드체이스'는 '카제아제'를 찾아 처단하기 위한 추적부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후 개발사는 기존 줄거리 및 분위기와 맞지 않는 캐릭터들을 대거 추가했고, 나중에는 이들이 왜 함께 모여 활동하는지에 대한 이유도 모호해지고 말았다.
첫 큰 변화는 2005년 9월 일어났다. '라스 리졸렛'이라는 '그랜드체이스' 사상 첫 남성 캐릭터가 등장한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관상 남성이 존재하긴 했지만, 주요 인물은 모두 여성이었다. 플레이어 캐릭터 세 명도 모두 여성이었고 이름이 언급된 기타 캐릭터도 두 여왕과 카제아제 등 여성만 있었다. 그러나 '라스'를 시작으로 플레이어 캐릭터인 '라이언 우드가드', '로난 에루돈' 등 남성이 차츰 추가되며 '여성왕국'이라는 설정은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 최초로 추가된 남성 캐릭터 '라스' (사진제공: KOG)
그래도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문제는 이처럼 설정이 조금씩 계속 바뀌고 있는 와중에도 개발사가 세계관을 정리하기보다는 새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한 데 있었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는 신규 캐릭터 추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07년까지도 1년에 캐릭터 하나 정도 추가될 따름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랜드체이스'는 빠르게 캐릭터를 양산해내기 시작했다.
신규 캐릭터 공개 주기는 2008년부터 약 6개월로 단축됐다. 급기야 2011년 12월부터 2012년 7월 8개월 동안에는 신규 캐릭터가 4명이 추가됐다. 2개월에 한 명 꼴로 만들어낸 셈이다. 안타깝게도 '그랜드체이스' 세계관과 스토리는 이처럼 빠른 속도로 추가되는 캐릭터에 맞춰 확장되지 못했다. 새로운 캐릭터가 추가될 때는 그에 따른 스토리와 설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랜드체이스'는 빠른 속도로 추가되는 캐릭터에 맞춰 세계관을 확장하지 못했다.
나중에 추가된 캐릭터들은 별다른 이유나 접점도 없이, 작위적으로 '그랜드체이스'에 합류하는 것으로 설정됐다. 예를 들어 무술가 '진'은 '실버랜드'를 수호하는 '실버나이트' 마지막 생존자로, '카제아제'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그랜드체이스'가 자신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자신이 지켜야 할 '실버랜드'를 방치한 채 함께 모험을 떠나버린다. 여기에 또 다른 무술가 '아신'은 '진' 사제라는 이유로 따라온다. 그 외도 길을 잃고 헤매다 '그랜드체이스'를 만나서 일원이 되는 '라임' 등 여러 캐릭터가 납득하기 힘든 작위적인 이유로 '그랜드체이스'에 합류한다.
▲ '그랜드체이스' 합류 이유가 불분명한 대표적 캐릭터 '루퍼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제대로 된 동기와 목적이 없는 캐릭터들이 많아지다 보니 스토리의 밀도는 갈수록 옅어지게 됐다. 본디 '그랜드체이스'는 '카제아제'를 물리치고 세상에 안정을 되찾는다는 공통 목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이었고, 게임 스토리는 이러한 '그랜드체이스'의 모험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카제아제'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인물들이 불분명한 이유로 함께 활동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죽은 자들의 세상 '명계'에서 도망친 원혼을 쫓는 현상금 사냥꾼 '루퍼스'는 '그랜드체이스' 일원 '라스'의 이복형인데, 동생한테 흥미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본업은 내팽개치고 은근슬쩍 '그랜드체이스'와 동행한다.
이후 '그랜드체이스' 스토리는 신규 캐릭터가 등장할 때마다 중구난방으로 흘러갔다. 신규 캐릭터 '린' 업데이트 시에는 이전까지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던 고대 여신의 환생자가 갑자기 중요하게 부각됐다가, 다음 업데이트부터는 스토리상 다시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신규 캐릭터 '라임' 업데이트 때는 그가 소속된 조직 '루즈 성 기사단'이 마족에 대항하여 성전을 벌이고 있다는 설정이 추가됐지만,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카제아제' 스토리가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악당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카제아제'를 쫓던 도중 신이 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당 '바르디나르'를 물리치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카제아제'에게 힘을 준 흑막에 대한 복선도 등장했지만, 서비스가 종료된 2015년 12월까지도 '카제아제' 스토리는 결말이 나지 않았다. 2003년 시작한 스토리를 12년 동안이나 완결하지 않았던 셈이다. 서비스 종류 후 '그랜드체이스 온리전' 행사에서 KOG가 비하인드 스토리를 일부 공개하기는 했지만, 이는 게임만 해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 후속작에서는 스토리를 잘 정리해보겠다는 개발사 입장 (사진출처: KOG 공식 블로그)
'그랜드체이스'가 남긴 사생아들
이처럼 '그랜드체이스'는 세계관과 스토리 차원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캐릭터만은 귀여운 일러스트와 뛰어난 성우들로 규모 있는 팬덤을 이루었다. 이에 개발사 KOG는 이후로도 '그랜드체이스'와 설정을 크로스오버한 게임들을 다수 내놓았다. 다만, 이 중 모바일 RPG '그랜드체이스 for Kakao'를 빼면 나머지는 세계관이 아니라 캐릭터들만 공유한다고 봐야 할 정도로 접점이 적다.
▲ '엘소드'에 등장한 '엘리시스' (사진출처: KOG 공식 블로그)
'그랜드체이스' 세계관과 연결된 KOG의 첫 번째 작품은 아직도 넥슨에서 서비스 중인 온라인 RPG '엘소드'다. 사실, 정식 서비스 이전 '엘소드'는 '그랜드체이스' 후속작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러나 막상 발매된 '엘소드'는 '엘리시스' 등 일부 캐릭터만 '그랜드체이스'에서 따왔을 뿐, 사실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이나 다름 없었다.
▲ '아이마'에 등장한 '로난' (사진제공: KOG)
또 다른 KOG 게임 '아이마'도 '그랜드체이스'의 캐릭터들을 차용한 작품이었다. '아이마'는 서비스 전 홍보영상에서도 '그랜드체이스' 캐릭터 '로난'을 등장시키며 관심을 모았고, 게임 내에 '그랜드체이스' 보스 몬스터 '가도센'의 이름을 딴 지역이 존재하기도 했다.
▲ '커츠펠'에 등장한 '리르' (사진출처: '커츠펠' 공식 유튜브 영상 갈무리)
여기에 2017년 지스타에서 최초로 공개된 '커츠펠'도 '그랜드체이스'의 평행세계를 무대로 한다는 설정이다. 공개된 캐릭터 중 활을 사용한 원거리 클래스 '윈드 오브 댄스'의 이름은 '리르'로, 이는 '그랜드체이스'의 '리르'를 따온 것이다. 외모 또한 긴 금발에 녹색 눈, 흰색과 녹색이 조합된 의상 색 등 거의 같은 모습이다. 실제로 '커츠펠' 개발 총괄 권오당 디렉터는 '지스타 2017' 인터뷰 중 "커츠펠은 '그랜드체이스' 세계관을 재해석한 게임이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기 있는 캐릭터와 달리 스토리는 조금 부실했기 때문인지, '그랜드체이스' 세계관을 정식 계승한 작품은 거의 없다. 사실상 '그랜드체이스'의 적통은 아직 출시 준비 중인 '그랜드체이스 for Kakao'뿐이다.
▲ 스토리 재개에 중점을 뒀다는 '그랜드체이스 for Kakao'를 기다려보자 (사진출처: 게임메카 촬영)
'그랜드체이스 for Kakao'는 원작 최종 던전 '소멸의 탑'에서 '카제아제'와 일전을 벌인 주인공들이 차원의 틈에 휘말린 끝에 '크릭트리아'라는 다른 차원에 떨어진 이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비록 원작 무대 '에르나스'를 떠나기는 했지만, '엘리시스', '아르메', '카제아제' 등의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해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개발사가 '그랜드체이스' 세계관을 계승한정식 후속작이라고 언급한 만큼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