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개발이 취소된, 페리아 연대기가 의미하는 것
2019.08.29 10:31 게임메카 김미희 기자
지난 27일, 게임업계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2011년부터 9년 간 개발된 ‘페리아 연대기’ 개발이 끝내 중단된 것이다. 게임사에서 신작을 만들다가 접는 경우는 다반사지만 ‘페리아 연대기’는 무게감이 다르다. ‘페리아 연대기’는 ‘바람의나라’, ‘어둠의 전설’ 등 넥슨 초창기 게임 개발을 주도한 정상원 부사장이 세운 띵소프트가 ‘세상에 없는 게임을 보여주겠다’며 10년 가까이 준비해온 기대작이다.
아울러 지난 지스타 프리뷰에는 넥슨 이정헌 대표가 관련 질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페리아 연대기’ 개발 현황을 전할 정도로 내부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아 연대기’는 지난 5월에 진행한 첫 테스트를 끝으로,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페리아 연대기’의 종말이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게임 하나가 생명을 잃었다’로 끝나지 않는다. 그 의미를 크게 6가지로 정리했다.
1. 9년 기다린 게임이 개발 중단, 팬들의 신뢰 잃었다
‘페리아 연대기’ 개발 중단에 가장 충격을 받은 쪽은 팬들이다. 개발 중단 소식을 접한 팬들은 큰 아쉬움을 전했다. 동화풍 그래픽에, 아기자기한 콘텐츠를 더한 게임성에 기대감을 가진 유저도 있었으나, 9년 동안 기다려온 게임을 만나지 못한다는 허탈한 감정을 털어놓는 사람도 있었다. 개발이 예상보다 많이 늦어지며 팬들 입장에서도 ‘못 나올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볼 수 있지만, 짐작만 하는 것과 개발 중단이라는 사실을 목격한 이후의 감정은 그 격차가 상당하다.
아울러 ‘페리아 연대기’ 개발 중단은 그 여파가 게임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근 10년 간 투자한 게임도 한 순간에 접어버리는 것을 보았기에 작년 지스타에서 인기를 모았던 ‘마비노기 모바일’과 같은 넥슨 신작을 기다리는 게이머도 ‘안 나오는 것 아닌가’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 서비스 중인 게임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전설’을 비롯한 클래식 RPG 유저들은 매각 이슈가 터졌을 때부터 ‘서비스 종료’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으며, ‘페리아 연대기’ 개발 중단은 커뮤니티를 더 크게 뒤흔들 수 있다.
2. 9년 간 들인 투자금을 잃었다
‘페리아 연대기’ 개발 중단과 함께 생각해볼 부분은 투자금이다. ‘페리아 연대기’를 준비하던 띵소프트는 2010년에 문을 열었다. 이후 2013년에 네오플이 띵소프트 지분 100%를 인수하며 자회사로 편입됐다. 그리고 네오플은 넥슨 자회사다. 넥슨->네오플->띵소프트 순으로 지배구조가 형성된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네오플이 띵소프트에 투자한 금액은 총 638억 원이다. 작년 2월과 올해 6월에도 각각 유상증자를 통해 66억 원, 20억 원이 띵소프트에 투입됐다.
물론 이 자금이 100% ‘페리아 연대기’에 투입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띵소프트는 2016년과 2017년에 각각 출시된 모바일게임 ‘삼국지 조조전 Online’과 ‘탱고파이브’를 개발했다. 하지만 넥슨은 모바일게임 2종을 기대하며 네오플을 통해 띵소프트에 60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한 것이 아니다. 가장 큰 목표는 ‘페리아 연대기’ 개발과 출시였으나, 제작 도중 프로젝트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600억을 넘게 투자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지 못한 것이다.
3. 게임 하나를 10년이나 붙들고 있어도 되는 개발조직, 문제 없나?
띵소프트는 2013년부터 5년 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작년에도 영업손실 79억 원을 기록했다. 다른 게임사라면 비상이 걸릴만한 실적악화에도 게임 하나를 근 10년 간 붙들고 있었다. 이를 반대로 생각하면 10년 동안 게임을 내지 않아도 내부적으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개발 조직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단 띵소프트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넥슨 전체적으로 근 10년 간 자체 히트작이 없음에도, 출시나 흥행에 대한 압박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듀랑고’다. ‘듀랑고’는 속도가 중요한 모바일게임임에도 5년 반이나 걸렸다. 한때 ‘NDC용 게임’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공개되는 내용은 많은데, 출시는 요원한 대표적인 게임이었다. 5년을 넘게 만든 ‘듀랑고’는 결과적으로 흥행에 실패했다. 출시 직후에는 구글 매출 4위에 오르며 기대를 모았으나, 장기적으로는 상위권을 유지하지 못했고 현재는 100위 밖으로 밀려 있다. 넥슨 전체적으로 개발 기간이 늘어지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페리아 연대기’는 그 대표주자다.
4. 근 10년이면 게임 트랜드도 여러 번 바뀐다
사실 10년 동안 게임 하나를 만들어도 대박만 나면 괜찮다. 하지만 게임 시장은 더 이상 ‘긴 개발 기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국내만 따져봐도 신작 다수가 쏟아지는 대세 장르가 바뀌는 시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다. 실제로 ‘리그 오브 레전드’가 흥행한 후 AOS 신작이 우르르 쏟아지던 시기는 5년 정도였으며, ‘배틀그라운드’가 촉발시킨 배틀로얄 시대는 2년 만에 식었다. 올해 초부터는 ‘오토체스’ 류가 뜨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발 기간이 지나치게 늘어질 경우 시장 흐름을 타지 못하는 게임이 될 우려가 높다. 아무리 잘해야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명작’이 되어버린다.
아울러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게임 하나를 10년 가까이 만드는 경우는 드물다. 옛날에는 뜸들이기로 유명했던 블리자드도 ‘하스스톤’은 15명이 4년 간 만들어 시장에 내놨으며, ‘오버워치’는 ‘프로젝트 타이탄’이라는 전신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래도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간 후 3년 만에 나와서 전세계 시장을 강타했다. 넥슨도 업계 전체적으로 개발 기간을 짧아지고 있다는 점을 실감해야 한다.
5. 페리아 연대기 중단과 함께 죽어버린 넥슨의 ‘개발 DNA’
넥슨이 2014년에 강조했던 것 중 하나는 ‘개발 DNA’를 회복하겠다는 것이었다. 넥슨은 지난 10년 간 자체 신작의 성공보다는 네오플, 넥슨지티, 엔도어즈 등 외부 개발사를 인수하며 몸집을 키워왔고, 지금도 회사를 책임지고 있는 게임은 ‘던전앤파이터’,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등 예전 게임이다. 이정헌 대표도 ‘제 2의 던전앤파이터’를 찾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고, ‘페리아 연대기’는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
하지만 개발 DNA는 살아나지 않고 있다. 특히 ‘메이플스토리 2’, ‘서든어택 2’ 등 주요 기대작이 참패하며 자체 개발작 출시에 더 소극적으로 변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는 말처럼 게임사가 성공을 맛보고 싶다면, 계속 게임을 내보고, 실패 원인을 찾아서 다음 게임에 반영하고, 이를 바탕으로 점점 흥행 가능성을 높여가야 한다. 개발 DNA를 살리고 싶었다면 여러 게임을 내며 시장과 직접 몸으로 부딪쳤어야 한다. 잠든 개발 DNA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넥슨 내부에 있다.
6. 게임 하나를 근 10년 간 붙들고 있던 사람이 넥슨 개발 총괄이었다
정상원 부사장은 넥슨 초창기 성장을 이끈 스타 개발자였다. 아울러 넥슨을 떠난 이후에도 네오위즈에서 ‘피파 온라인’을 흥행시키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2013년에 넥슨 개발 총괄로 자리한 후에는 기대했던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표작 ‘페리아 연대기’도 결국 완성하지 못했고, 넥슨의 답답함을 뚫어줄 걸출한 ‘자체 개발작’을 빚어내지도 못했다. 개발 총괄이라는 직책을 생각하면 결과물이 미진했다.
그리고 정 부사장은 넥슨을 떠날 예정이다. 개발 수장이 만들던 대표작도 접히고, 당사자도 나간다. 내부 개발진 입장에서는 ‘이러다가 우리 게임도 접히는 것 아니야’라는 걱정에 휩싸이기 딱 좋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넥슨 자체도 혼란스럽다. 올해 초에 매물로 나왔다가 매각이 불발됐으며, 김정주 대표가 조직쇄신을 위해 네오플을 창업한 원더홀딩스 허민 대표 영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개발 총괄이 기대했던 성과도 보여주지 못하고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내부 개발 조직도 크게 흔들릴 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