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신, 외국인이 그려냈다고 믿기지 않는 조선시대 풍경
2022.04.21 10:27 게임메카 류효훈 기자
고스트 오브 쓰시마, 토탈 워: 삼국지 등 일본이나 중국을 소재로 한 해외 게임들은 많지만, 한국을 배경으로 한 해외 게임은 거의 없는 편이다. 최근 캐릭터나 맵 등에 한국인과 한국 지역이 포함된 게임은 종종 나오고 있지만, 게임 전체가 한국적 요소를 띈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와중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해외 게임이 지난 14일 스팀에 등장했다. 프랑스 인디게임 개발사 노 모어 500(No More 500)이 제작한 수호신이다. 이 게임을 개발한 노 모어 500 알란 대표는 오랫동안 좋아했던 한국 문화를 다른 게이머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게임을 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조선시대를 소재로 게임을 제작했다고 한다. 한국인 개발자가 한 명 포함돼 있긴 하지만,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인에게도 낯설 수 있는 조선시대 풍경을 그려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 과연 이들이 그려낸 조선시대는 어떤 모습일지 살펴봤다.
조선시대로 회귀한 듯한 배경 재현도
비주얼 노벨은 게임을 이끌어 감에 있어 이야기와 배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다. 특히나 사극에서는 고증이 틀리면 흥이 깨지는 경우가 많다. 삼국 시대 무장이 고려 말~조선 초기에나 등장한 갑옷을 입고 있다거나 하면 보는 내내 불편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관계없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모탈 컴뱃 시리즈에 등장하는 라이덴은 베트남식 삿갓을 쓰고 등장하는데, 이 삿갓이 베트남 현지에서는 여성용으로 쓰이는데 남성 캐릭터가 쓰고 나온 점이 지적받은 바 있다. 지금은 설정으로 얼버무렸지만, 당시 개발진의 동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온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수호신은 한국인이 봐도 어색한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조선시대를 구체적으로 담아냈다. 물론 복식이나 시대 전문가가 본다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사극이나 영화 등으로 해당 시대를 접해 온 일반 게이머 입장에서는 전혀 불편한 점이 없다. 예를 들어 양반이 사는 집은 서민 가정에 비해 담벼락이 높은 편이다. 이는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게 하기 위함인데, 게임에서도 잘 구현되어 있다. 게임 내 등장하는 양반촌에서는 돌과 흙으로 지은 담벼락에 기와가 얹어져 있어, 평민들의 담벼락보다 높게 쌓아올려졌다.
조선 하면 빠질 수 없는 공간인 주막도 제대로 구현됐다. 마당에 펼쳐진 평상 위에 음식상이 차려져 있고, 주점을 뜻하는 등불인 주등도 한자로 표기돼 달렸다. 사또 집무실도 시대상에 맞게 잘 재현했다. 보통 집무실에는 마을 이름이 달린 현판이 달려있기 마련인데, 여기에 새겨진 글자 위치도 시대적 배경에 맞춰 세로쓰기나 우→좌 쓰기가 반영됐다. 실제로 게임 속 배경이 되는 마을의 이름은 '양동'인데, 현판의 한자 표기는 왼쪽부터 ‘동양’ 순으로 쓰여 있다.
사극 등에서 잘 다뤄지지 않아 한국인에게도 다소 낯선 부분까지도 잘 표현했다. 토지와 마을을 지키는 성황신을 모셔놓은 신당인 성황당의 경우 돌무더기와 커다란 수목, 끝부분이 묶여있는 오색띠 등으로 신성하면서도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바로 옆에 위치한 무당집에는 무당이 신을 모셔놓은 제단도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마을 입구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이 세워져 있고, 시장 저잣거리 모습, 절경관 등도 세세하게 그려냈다. 이러한 배경 묘사는 흡사 실제 조선시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줬고, 게임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줬다.
세심한 신경을 느낀 부분은 배경만이 아니다. 게임 중간에 등장하는 지명에서도 고증을 위해 노력한 결과가 보였다. 예를 들어 게임 중간에 '동래'로 원조를 부탁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사실 외국인 뿐 아니라 한국인들도 동래라는 지명은 웬만해선 알기 힘들거나 파전으로 유명한 부산 내 지역구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선시대엔 현재 부산 지역의 지명이 동래였으며, 부산은 동래부에 포함된 하나의 포구지역이었다. 이러한 명칭은 일제시대에 접어들면서 동래군이 부산에 편입되고 차차 지명이 역전되며 현재의 부산으로 굳어지게 됐다. 단어 사용에 있어서도 역사적 고증을 챙긴 점이 놀라울 따름이다.
배경에 이은 섬세한 캐릭터 묘사
수호신의 섬세한 묘사는 배경 뿐 아니라 캐릭터 묘사에서도 이어졌다. 예를 들면 '답호'가 있다. 남자 캐릭터 일부에서 일상복 겉에 덧입은 '답호'가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답호는 드라마에서도 많이 활용하는 의복으로, 반소매나 민소매에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높은 신분의 경우엔 이 답호에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자연스레 신분을 짐작케 해 준다.
신분에 맞는 디자인 요소는 이뿐만이 아니다. 유나, 은서 아씨 같은 경우는 양반가 자제이기에 입고 있는 비단치마나 머리끈, 저고리에 꽃무늬를 넣어 평민인 수아와 신분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냈다. 머리에 쓰는 갓도 신분에 맞게 달리 씌웠다. 예를 들어 김 대감에게는 일반 갓이 아닌 양반들이 평소 쓰는 정자관을 씌워 그가 조선 시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식이다. 갓의 경우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통해 널리 소개되며 조선시대 모자 문화를 알린 공신이기도 한데, 수호신 역시 스님 등 일부 캐릭터를 제외한 대부분의 남성이 모두 다른 형태의 갓을 쓰고 있는 점이 보인다.
한국인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무당 캐릭터까지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 실제 제석굿에 쓰이는 무복에 방울 무구를 활용했고, 흔히 등장하는 여자 무당이 아닌 남자 박수무당이 등장해 특별함을 더했다.
각종 게임 내 소품들 역시 한국적 색채를 살렸다. 예를 들면 한국적 액세서리인 '노리개'는 주인공 유리와 친구 수아의 관계를 묘사해 주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이 둘은 고아원에서 같이 자라 지금까지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데, 같은 디자인 노리개를 달고 있어 둘의 사이를 짐작케 한다.
스토리에도 자연스레 녹아든 한국적 요소
수호신은 무과 과거 급제 후 고향으로 3년 만에 돌아오자마자 생긴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청년 유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얼핏 조선 시대 추리물처럼 보이던 전개는 한국의 대표적인 오컬트 요소 중 하나인 구미호가 더해지면서 흐름이 급변한다. 사람 간이나 심장을 빼먹어 생명을 유지하거나 인간남자와 혼인하여 100일 동안 같이 살면 인간이 된다는 전설이 첨가되어 구미호가 마을에 해를 끼치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여기에 구미호를 막기 위한 마을 수호신도 등장한다. 수호신은 마을 입구에 세워진 장승으로 표현됐는데, 직접적인 개입 대신 주인공에게 간접적인 도움을 주며 이를 막고자 한다. 배경에서뿐만 아니라 스토리에서도 한국적인 요소를 담고자 노력한 개발자의 의도가 엿보였다. 게임 구성 자체는 다소 평범한 비주얼노벨이었으나, 소재 면에서 차별화에 성공했다.
종합하자면, 수호신은 국내에서 제작한 사극이나, 영화, 다큐 속 조선시대 모습과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는 고증을 자랑한다. 아마 배경지식 없이 이 게임을 처음 접하면 분명 국내 인디 개발사가 제작했다고 믿을 정도다. 스토리 자체도 아주 무겁지 않고, 한국적인 요소를 재현한 전래동화 같은 그림체, 구미호와 수호신 같은 오컬트 소재 등은 마치 어른들을 위한 한편의 동화책을 보는 듯했다. 게임을 만드는 2년간 수입 없이 생업과 병행해 가며 제작했다는 설명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게임 완성도를 자랑한다.
게임에 있어서 고증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대놓고 고증을 엿 바꿔 먹은 게임이더라도 당위성이나 몰입도가 높다면 크게 신경쓰이지 않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퓨전 픽션이 아니라 실제 시대를 바탕으로 한 게임이라면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배경이나 인물 묘사가 중요하다. 이를 지키지 못해, 혹은 다양한 이유로 억지 설정을 끼워넣어 문제가 된 게임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점에서 수호신의 고증은 전공자나 시대 마니아 눈에까지 완벽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지 몰라도, 게임을 진행하는 데 있어 큰 불편함 없이 즐길 정도는 충분히 됐다. 여기에 자료 조사나 이해에 한계가 존재하는 외국 개발사가 개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만큼이나 관심을 갖고 열심히 조사했을지가 눈에 선할 정도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제 2, 제 3의 수호신이 계속 나오기 위해, 한국 정부에서도 외국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한국 역사나 문화자료에 대한 DB를 더 널리 공개하고 무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