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크로니아, VR 비주얼노벨의 미래가 보인다
2023.01.19 13:35 게임메카 흑임자XR
여러분들은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도전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주제에 따라 다르겠지만, 꼭 한 번쯤 경험해 보고 싶네요. 오늘 소개할 게임은 탄탄한 배경 스토리에 공식 한국어까지 지원하는 애니메이션 풍 비주얼노벨 '디스크로니아'입니다.
이 게임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VR에 특화된 다양한 시스템을 도입해, PC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VR 비주얼노벨 특유의 경험을 선사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VR 비주얼 노벨은 그 수가 적을뿐더러, 아직 장르적으로도 발전 단계에 있습니다. 다만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제대로 된 VR 비주얼노벨은 플레이어로 하여금 정말 게임 속 일원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게임 속 세상에 직접 들어가 주인공이 되어 주변 캐릭터들과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고, 직접 문제를 해결하며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거든요.
디스크로니아는 총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는데요, 에피소드 1은 2022년 9월 22일, 에피소드 2는 지난 12월 8일에 출시되었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올해 출시 예정이며, 아직까지는 메타 스토어에서만 만나볼 수 있지만 올해 내로 PS VR2와 닌텐도 스위치에도 출시됩니다.
디스크로니아의 배경 스토리는?
수백 년 전 거대한 운석이 지구와 충돌했을 때 일부 인간들이 돌연변이를 일으켜 시간 조작 등 다양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 '변이체'라 부르며 두려워했고, 급기야 가혹하게 핍박했습니다. 현재는 특별히 보호된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디스크로니아 세계엔 게임 시작 시점 기준 12년 전, ‘해질녘 재앙(The Nightfall Catastrophe)'이라 불리는 원인 불명의 세계적 대재해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세상은 보호복 없이는 나갈 수 없을 지경이 됐고, 살아남은 인류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거대한 돔 형태로 여러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인공 해양도시인 ‘아스트럼 클로즈’도 그중 하나입니다.
아스트럼 클로즈는 인공지능인 ‘유스티스’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데, 생체 나노 머신인 KaiROS를 보유한 모든 주민들의 꿈을 통합하는 ‘확장꿈(Augmented Dreaming)’이라는 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이 시스템은 시민들의 정신을 케어하고, 감찰을 통해 모든 사고를 미연에 방지합니다. 덕분에 범죄 발생률은 0.001%로, 얼핏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떠오르게 하지만 세계관에서는 인류의 마지막 낙원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런 낙원에서 도시의 창립자인 알버트 램버트가 살해당하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디스크로니아의 등장인물 알고 가기
힐 사이온: 본작의 주인공이며 아스트람 클로즈의 특별 감찰관입니다. 도시 차원에서 보호받는 변이체 중 한 명으로, 3년 전 램퍼드 박사의 실험 대상군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이 실험의 여파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입니다. 왼손으로 특정 사물을 만지면 그 사물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과거 기억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약간의 과거 변형이 가능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이어 가넷: 주인공과 같이 아스트람 클로즈에 보호된 변이체 중 한 명입니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3년 전 램퍼드 박사의 실험 대상군에 속했으며, 그 실험의 여파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녀는 꿈속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엘 가넷: 주인공과 같이 아스트람 클로즈에 보호된 변이체 중 한 명으로, 마이어의 동생입니다. 사람을 싫어하고 경계심이 강해 변이체 보호 쉼터에서 잘 나오지 않습니다. 3년 전 실험으로 누나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거의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거부하며 램퍼드 박사를 증오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꿈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버트 램퍼드: 해상 도시 아스트람 클로즈의 창시자입니다. 전 세계에서 박해받는 변이체를 보호하며 선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변이체를 대상으로 위험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주민들의 꿈을 통합할 수 있는 확장꿈을 만들고 적용하였으나, 얼마 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릴리: 주인공 힐 사이온과 동행하는 네비게이터 로봇입니다. 감찰관인 주인공을 도와 추리를 서포트합니다. 원래는 마이아의 로봇이었지만 그녀가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부탁을 받아 힐 사이온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VR 비주얼노벨의 특징을 살린 영리한 게임 시스템
VR 콘텐츠에서 비주얼노벨은 아직 그 수가 적을뿐더러, ’노벨’이 아닌 ‘비주얼’만 비중을 둔 나머지 스토리가 거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문에 비주얼노벨의 가장 큰 묘미 중 하나인 '유저 선택에 따라 스토리 방향성이 나눠지는 시스템'은 찾아보기가 힘들며, 스토리도 일방통행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디스크로니아도 예외는 아닌데, 대신 VR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게임 시스템을 추가한 것이 특징입니다.
첫 번째는 주인공의 능력입니다. 주인공인 힐 사이온이 왼손으로 특정 사물을 만지면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설정을 활용해, 수사 중 과거로 회귀하여 단서를 찾거나 주인공이 몰랐던 이야기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직접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과거에 유저가 개입하여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힌트 및 퍼즐 재료를 모아 이전에 제시되었던 순서와 동일하게 배열하거나, 버튼을 수차례 조작하여 빛이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될 수 있게 맞추는 등의 미니게임 요소가 마련돼 있습니다. 퍼즐을 풀면 다음 진행에 필요한 중요한 힌트 또는 키를 얻게 됩니다.
세 번째로 주인공의 직업이 감찰관임을 살려 ‘확장꿈’의 네트워크에 액세스하고 사람의 형체를 띄고 있는 꿈들 중 악몽에 빠진 꿈을 멘토링 시스템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 멘토링 시스템은 특이한 문자가 적힌 4개의 버튼이 화면에 표시되고, 각 버튼이 랜덤으로 선택되는 것을 잘 기억했다가 똑같은 순서로 누르는 퍼즐 형태입니다. 한 번의 멘토링당 두 번씩 플레이하게 되며 낮은 레벨에서는 총 6개의 기회가 왼쪽 상단에 표시되고 틀릴 때마다 하나씩 사라집니다. 이 기회가 모두 사라지면 멘토링 시스템이 취소되어 처음부터 다시 진행해야 하며 레벨이 높아질수록 이 기회가 줄어듭니다.
네 번째로 사건 현장을 조사해 모은 단서들로 아스트람 클로즈를 관리하는 인공지능 유스티스가 감독하는 재판입니다. 각 상황에 맞는 단서들을 각 장소들에 맞게 매칭해야 하고, 최종적으로 직접 사건을 재현하게 됩니다. 이때 사건이 일어난 순서대로 흉기 및 장소, 범인의 도주 경로 등 상세 사항을 선택하게 됩니다. 만약 재현 구현율이 최종 커트라인보다 낮다면 재판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4가지 특징은 이전 에피소드부터 이어진 것으로, 에피소드 1에서는 디스크로니아의 배경 소개 및 각 사건이 일어난 개요에 대해 설명이 많아 퍼즐 요소가 적었지만 에피소드 2에서는 퍼즐이 한층 다양해졌습니다. 퍼즐 요소들도 업그레이드되고 새로운 요소도 다수 추가됐는데, 이번 작에 추가된 요소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감시 드론을 피해 미로 같은 구역을 통과하는 게임. 드론에게 발각되면 전 단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후반부는 거대한 보초 로봇을 피하기에 더 좁은 구역 안에서 뛰어야 한다.
-특정 공간 안에서 제공되는 힌트를 바탕으로 아이템을 찾아 퍼즐을 맞추거나, 힌트에서 제시된 이미지와 동일한 아이템을 제작하는 요소. 일부 가려진 힌트 지문을 추론하여 아이템을 조합해야 하는 퍼즐도 존재한다.
진정한 VR 비주얼노벨을 위해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존재한다
이처럼 기존 VR 비주얼노벨에 비해 게임성 측면에서 많이 발전한 디스크로니아이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몇 개 존재합니다. 오프닝과 엔딩 영상에 스킵 버튼이 없어 강제적으로 봐야만 하는 부분이거나, 끝과 끝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스크린으로 영상을 보는 느낌 때문에 아이맥스 영화를 볼 때와 같은 멀미가 느껴진다는 점이 단점입니다.
또한 PC 비주얼노벨에서는 버튼 클릭만으로 장소 이동이 가능하지만, VR에서는 스킵 없이 일일이 이동용 셔틀을 타고 직접 다음 스토리 진행지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건물과 건물을 오가는 등 이동 시간이 꽤나 길어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디스크로니아의 VR 특화 게임 시스템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퍼즐 난이도가 낮고 비슷한 형식이 이어져 시간이 흐르면 단조로워지기 쉽습니다.
게임 진행면에서도 주인공의 과거로 회귀하는 연출은 좋지만, 미래-현재-과거를 계속 이동하다 보니 초반 스토리 이해가 난해해 이탈 유저가 꽤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주인공이 눈을 깜박이며 스토리가 전환되는 듯한 연출은 잦은 암전과 긴 로딩으로 스토리의 맥락을 끊는 느낌이 듭니다. 다른 캐릭터들이 스토리를 진행하는 부분은 대부분 주인공의 네비게이터 로봇인 릴리가 먼저 움직인 후 진행하게 되는데, 릴리의 크기가 작아 잘 보이지 않고 움직임도 느려 갑자기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는 오류라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퍼즐 조각과도 같은 스토리를 하나하나 연결하고 사건의 개요를 알아가면서, 스토리 전개 중 느껴졌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알게 되었을 때의 감동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더욱이 캐릭터들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손을 잡고 눈을 보며 이야기를 하는 경험은 실로 놀라울 정도입니다. 대화를 나눌 때 캐릭터들의 눈동자가 필자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오거나, 대화 상대 위치에 따라 목소리 방향이 바뀌는 등 생생한 감각이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그저 게임 속 캐릭터로만 보이던 인물들에게 점차 몰입하여, 주인공이 느낄 법한 동지애와 애정은 물론 아스트람 클로즈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토리와 설정 역시 탄탄합니다. 역전재판 시리즈 중 하나인 역전검사 2의 시나리오 플래너인 시모카와 테루히로가 시나리오를 쓰고, 기동전사 건담 더 오리진 4 설정에 협력했던 다카시마 유야가 SF 컨설턴트를 맡아 만들어진 게임이어서인지, 스토리 없이 보여주기에만 치중했던 여타 VR 비주얼노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몰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필자는 처음 디스크로니아를 접하고 시놉시스를 읽었을 때 탐정 진구지, 역전재판, 레이튼 교수 시리즈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을 직접 해보니 VR 비주얼노벨의 새로운 성장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스토리 기반 게임 속에서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되어 그의 삶을 살며 다가올 스토리를 진행해 나간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것처럼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PC 비주얼노벨이 동화책이라면, VR 비주얼노벨은 삶의 체험 현장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VR 비주얼노벨이 어떤 방향으로 성장할지, 얼마나 몰입이 가능할지 궁금하시다면 꼭 추천하고 싶은 게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