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전] 북미 RPG의 아버지, ‘로드 브리티쉬’ 리차드 게리엇
2013.08.12 10:48 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미국은 전자 게임의 발상지이자 세계 게임산업을 선도하는 대표 국가다. 특히나 미국에서 탄생한 다양한 게임 장르들은 전세계 게임업계에 수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RPG(Role Playing Game) 역시 그 중 하나다.
RPG의 기원은 보드게임이다. 여러 명의 플레이어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각자 판타지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가정 하에, 주사위를 굴려 가며 모험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RPG라고 하면 누구나 컴퓨터/게임기 앞에 앉아 즐기는 게임을 떠올린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모험을 겪으며 전투를 벌여 엔딩에 다다르는 장르 말이다. 이제는 테이블에서 즐기는 보드게임을 Table RPG(TRPG)라고 따로 명명해 부르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다.
리차드 게리엇은 이러한 RPG의 기틀을 세운 인물 중 한 명이다. 세계 최초로 상품화된 RPG ‘아칼라베스’를 제작했고, ‘울티마’ 시리즈를 통해 RPG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그가 제작한 ‘울티마 온라인’은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라는 단어를 만들어내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온라인게임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세계 최고의 게임개발자라는 명예와 함께, 한편에서는 ‘우주먹튀’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로드 브리티쉬, 리차드 게리엇은 누구인가?
* 본 연재는 NHN과 제휴로 네이버캐스트[게임대백과]에 함께 게재 됩니다. [바로가기]
▲ 게임 개발자이자 모험가, 리차드 게리엇
19살 컴퓨터 가게 점원, RPG를 탄생시키다
리차드 게리엇은 1961년 영국 켐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오웬 게리엇은 리차드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았을 때, 가족을 이끌고 미국 텍사스로 이민을 간다. 이 곳에서 리차드는 미항공우주국(NASA) 우주비행사와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주비행사의 꿈을 키웠다. 훗날 그는 세계 3번째로 민간 우주비행을 다녀오고, 세계 최초의 부자(父子) 우주인으로 기록되며 어릴 적 꿈을 이룬다.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내던 리차드는 중학 시절 J.R.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을 접한다. 다양한 종족과 몬스터, 전설의 마법사가 등장하는 판타지 세계는 꿈 많던 소년을 순식간에 매료시켰고, 이후 그는 판타지 세계에 푹 빠져들어 다양한 판타지 소설을 가리지 않고 섭렵한다. 이러한 판타지에 대한 열정은 훗날 그가 게임 개발을 시작하게 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데, 특히 초기작의 경우 ‘던전 앤 드래곤(D&D)’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교육열 높은 부모의 영향으로 수학/과학 분야에서 특히 좋은 성적을 받던 리차드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컴퓨터를 만났다. 리차드가 다니던 학교에 정부 지원으로 컴퓨터가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당시 컴퓨터를 사용할 줄 아는 교사는 없었고, 참고할 만한 교과서조차도 전무했다.여기서 리차드는 교장과 타협해서 희망 학생들을 모아 스스로 공부하며 수업하겠다는 조건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교과 과목으로 인정받았다. 국내였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식 학풍과 컴퓨터에 대한 열정이 이를 가능케 했다.
리차드는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배우며 게임 개발을 시작했다. 그 원동력은 자신의 주된 관심사였던 판타지 세계를 컴퓨터에서 구현하려는 의지였다. 당시 고등학생이 독학으로 프로그래밍을 배워 게임을 제작한다는 것은 쉽사리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지금에서야 희귀한 사례가 아닐 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컴퓨터게임은 커녕 컴퓨터 자체에 대한 인식도 희미하던 시절, 가르침을 받을 마땅한 교재도 변변찮은 환경에서 RPG를 컴퓨터로 구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었다. 물론 리차드의 시도 이전에도 RPG라는 것은 존재했다.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테이블 위에 주사위를 던져가며 즐기는 TRPG였을 뿐, 컴퓨터를 통해 게임을 하는 현재의 RPG의 개념은 거의 정립되지 않았다. 그나마 일부 마니아층에서 아마추어 게임을 제작해 주변인들끼리 공유하던 것이 당시 PC게임 산업의 전부였다.
참고로, 리차드가 게임 제작을 시작했던 70년대 후반에는 프로그래밍 환경 자체도 지금처럼 키보드나 마우스를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워즈니악에 의해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상용화되기 전, 당시에는 저장 매체로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사용했기 때문에 프로그래밍을 위해서는 셀로판 테이프로 만들어진 특수 용지에 일일이 점을 찍어서 디지털 방식으로 변환해야 했다. 즉, 프로그래밍이란 막노동을 수반하는 행위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리차드는 30여 편의 게임을 제작했다. 거의 한 달에 한 편 꼴이다. 친구들과 함께 만든 리차드의 첫 게임은 ‘던전 앤 드래곤’의 전자게임이라는 뜻으로 ‘D&D’ 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시에는 무려 ‘D&D 27’까지 개발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의 이름 옆에 늘 따라붙는 ‘로드 브리티쉬’ 라는 별명도 이 때 생겨났다. 리차드는 텍사스에서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내긴 했지만, 가족 전체가 영국 집안인지라 자연스레 영국식 억양이 입에 배어 있었다. 이 때문에 학창 시절 그의 친구와 선배들은 리차드에게 ‘로드 브리티쉬’ 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평생 이 별명을 자랑스러워 했으며, 자신이 만든 게임들에 ‘로드 브리티쉬가 제작함’ 이라는 표어를 붙인다.
이윽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세(1979년)의 리차드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 컴퓨터 소매상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칼라베스(AKALABETH)’를 제작한다. 이 게임은 애플2 컴퓨터를 이용해 제작되었는데, 디스크 복사에서 포장, 매뉴얼 제작까지 혼자 수작업으로 진행해 컴퓨터 소매상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판 게임으로 리차드의 첫 번째 공식 작품으로 남아 있다. ‘아칼라베스’는 J.R.톨킨이 만든 ‘반지의 제왕’, 그리고 게리 가이각스의 ‘던전 앤 드래곤’에서 영향을 받은 판타지 배경의 RPG였다. 또한, 세계 최초의 상용화된 ‘컴퓨터용’ RPG이기도 했다.
▲ ‘아칼라베스’를 비롯해 수많은 초기작 개발에 사용된 애플2 컴퓨터
▲ 캘리포니아 퍼시픽에서 유통된 ‘아칼라베스’ 패키지
사실 ‘아칼라베스’는 당초부터 상업용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대학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던 리차드 는 ‘아칼라베스’를 통해 큰 돈을 벌 생각은 없었다. 리차드는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것을 컴퓨터로 구현했고, 내친 김에 상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손님들에게 팔면 용돈 정도는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를 눈여겨본 컴퓨터 소매상 점장에 의해 이 게임은 입소문을 타고 대형 소프트웨어 유통사인 캘리포니아 퍼시픽의 귀까지 들어갔고, 결국 캘리포니아 퍼시픽은 리차드와 ‘아칼라베스’에 대한 퍼블리싱 계약을 맺는다. 이후 북미 전역에 유통된 ‘아칼라베스’는 3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컴퓨터 가게 점원이었던 리차드는 장당 5달러씩 무려 15만 달러(현재 환율 기준 약 1억 6,600만 원)의 큰 돈을 번다. 결국 리차드는 비싸기로 소문난 미국 대학의 4년치 학비를 모두 충당하고도 남을 돈을 ‘아칼라베스’ 하나만으로 벌어들인 후 대학에 진학한다.
▲ ‘아칼라베스’ 스크린샷
울티마의 아버지 ‘로드 브리티쉬
‘아칼라베스’의 성공은 리차드에게 돈만 안겨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사람들이 반응해준다는 것을 깨달은 리차드는 이 때부터 본격적인 게임 개발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컴퓨터 가게를 그만 둔 리차드는 오스틴 텍사스 대학에 입학하지만, 대학의 정형적인 강의에 염증을 느끼고 1년도 채 다니지 못한 채 중퇴를 결심한다. 그가 대학에서 얻은 것은 지식이 아닌 사람이었다. 리차드는 대학 시절 훗날 ‘울티마’ 시리즈의 주축 개발자가 될 켄 아놀드 등의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함께 캘리포니아 퍼시픽 산하의 외주 개발팀이 되어 ‘울티마’ 시리즈의 첫 작품이자 ‘아칼라베스’를 더욱 업그레이드 한 게임인 ‘울티마 1: 첫 번째 암흑 시대(이후 붙여진 부제목, 출시 당시에는 그냥 울티마)’를 개발한다.
‘울티마’ 는 ‘위저드리’ 와 함께 RPG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평가 받는 걸작으로, 현재는 당연시 되는 파티 시스템을 비롯하여 RPG의 수많은 기본 개념을 확립했다. ‘울티마’ 는 지금까지 총 9편의 정식 타이틀과 수많은 외전, 그리고 온라인 버전인 ‘울티마 온라인’ 으로 발전했으며, 리차드는 그 과정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게임 개발자 중 하나라는 명성을 얻는다. 그러나 ‘울티마’ 이후 그의 행보는 다소 부진한 모습이다. 아직까지도 그를 대변하는 수식어는 ‘울티마 온라인’ 에서 불리던 ‘로드 브리티쉬’다.
그러나 81년, 캘리포니아 퍼시픽은 ‘울티마 1’ 발매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도를 맞이한다. 리차드는 이를 대신해 시에라 온라인과 계약을 맺고 이듬해 ‘울티마 2: 마녀의 복수’를 출시한다. ‘울티마’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 위의 두 작품은 더 이상 ‘아카라베스’와 같이 취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었으며, 시장에서의 반응도 상당히 좋았다. 그 결과 리차드는 아버지인 오웬 게리엇과 형인 로버트 게리엇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의 지원을 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1983년 출시된 ‘울티마 3: 엑소더스’는 리차드와 로버트 게리엇이 만든 벤처기업 오리진 시스템(Origin Systems)을 통해 출시된다. 리차드는 사실 ‘울티마 2’의 배급사였던 시에라 온라인과의 계약 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여러 차례 마찰을 빚었다고 회사 설립 계기를 밝힌 바 있다. 이후 오리진 시스템을 통해 리차드는 자신이 개발하고 싶은 게임을 마음껏, 자유롭게 만든다. 말 그대로 날개를 단 것이다.
오리진 시스템의 첫 작품인 ‘울티마 3: 엑소더스’는 RPG 사상 최초로 파티 시스템을 도입한 게임으로 유명하다. 이후 많은 RPG에서 파티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고, 지금은 파티 없는 RPG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오리진 시스템은 ‘울티마 3’를 시작으로 리차드가 만든 게임의 판매를 주로 맡았고, 우주 비행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를 만든 ‘윙 커맨더’ 시리즈와 ‘크루세이더’, ‘바이오포지’ 등 다양한 PC게임을 제작하며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까지 전세계 PC게임 업계를 선도하게 된다.
‘울티마 3’ 는 15만 장이라는 판매고(당시 꽤나 낮았던 PC 보급율을 생각하면 엄청난 수치)를 올리며 오리진 시스템을 돈방석에 앉게 해 준다. 이후 리차드는 ‘울티마 3’까지 지속된 ‘암흑의 시대’ 3부작을 정리하고, 수백 년 후의 세계관을 다룬 ‘계몽의 시대’ 3부작에 돌입한다. 85년 출시된 ‘울티마 4: 아바타의 임무’, 88년 출시된 ‘울티마 5: 운명의 전사들’, 90년 출시된 ‘울티마 6: 거짓 예언자’가 그것이다.
▲ 오리진 시스템을 통해 처음 발매된 ‘울티마 3: 엑소더스’
특히 ‘울티마 4’는 다소 독립적이고 단편적이었던 전작들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D&D’ 를 벗어나 ‘울티마’만의 설정과 스토리를 정립시켰다. 단순한 권선징악 스토리를 벗어나 내용에 철학적 이슈를 담아내며 게임의 깊이를 한층 진화시킨 것도 이 때부터고, 선택에 의한 윤리 시스템과 미덕의 개념, 지금도 종종 쓰이는 ‘아바타’ 라는 단어의 개념도 여기서 확립된다. ‘울티마 4’는 단순한 흥행 게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영향도 상당했으며, ‘울티마’ 시리즈의 팬층을 급속히 늘린다. ‘울티마 4’에서 극대화된 게임성은 이후 5, 6편으로도 이어지면서 매 해마다 최고의 게임 상을 싹쓸이하며 자연스럽게 ‘울티마’는 RPG계의 전설로 자리매김한다.
이윽고 ‘울티마’ 시리즈는 ‘계몽의 시대’를 넘어 ‘아마게돈(가디언 사가)’ 시대로 돌입한다. ‘울티마 7(파트 1)’은 거듭된 성공으로 쌓은 오리진 시스템즈의 모든 노하우와 자본을 대거 투입한 대작이었으나, 치명적인 버그와 시스템적 오류 등 다양한 문제로 인해 기대 이하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울티마 7’에 사운을 걸다시피 한 오리진 시스템즈가 자금 부족에 봉착하게 될 정도였으니, 당시의 상황을 가히 짐작할 만 하다. 사실 ‘울티마 7’ 게임 자체는 특유의 자유도와 세계관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이후 ‘울티마 온라인’의 시발점이 되는 명작으로 평가되지만, 최고의 게임을 고집하던 오리진 시스템즈와 당시 보급형 PC의 하드웨어 성능 간의 괴리, 오리진에 가해지는 사업적 압박 등이 맞물려 결과적으로 비극을 초래하고 만다.
‘울티마 온라인’ 의 탄생, 그리고 오리진 시스템의 몰락
1992년, 오리진 시스템은 ‘울티마 7’로 촉발된 자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EA에 매각되었다. 리차드는 EA 산하에서 든든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울티마 7-2’ ~ ‘울티마 9: 승천’으로 이어지는 아마게돈 시대 삼부작과 각종 외전 타이틀을 출시한다. 매각 이전에도 오리진과 EA는 ‘울티마’ 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게임의 판권 계약을 체결했지만, 아예 회사와 보유 자산 모두를 넘기고 만 것이다. 이 계약은 결과적으로는 리차드에게 많은 제약을 건다. 이 때부터 오리진 시스템이 개발해오던 프로젝트들이 EA의 직접적인 통치 하에 놓이고, 그 동안 승승장구를 거듭해 온 ‘울티마’ 시리즈가 몰락의 길을 걸은 것도 이 때 급속화되었다. 그 최고봉이 바로 ‘울티마 8: 페이건’ 이다. ‘울티마 8’은 새로운 시도가 많았지만 당초 계획하던 것보다 상당수의 콘텐츠와 시스템 등이 축소된 채 발매되었고, 팬들에게 많은 외면을 받았다. 결국 지금도 해외에서는 ‘타뷸라 라사’와 함께 리차드의 최대 실패작으로 ‘울티마 8’을 꼽을 정도다.
자유와 로망을 게임으로 구현하려는 리차드와 흥행 여부를 중요시 여기는 퍼블리셔 EA는 사사건건 입장 차이를 보였고, 이러한 갈등은 ‘울티마 9’ 때 절정에 달했다. 훗날 리차드는 트위터를 통해 ‘울티마 9’에 이르러서는 회사의 지원이 거의 없었지만 난 아직 울티마를 사랑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리차드는 각종 압박 하에 ‘울티마 8’을 개발하면서 ‘울티마’ 시리즈에 가해지는 외부적인 압력이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 작업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9편에서 게임을 종결 짓겠다는 발언을 한다.
▲ 새로운 시도가 많았으나 팬들로부터 외면을 받은 ‘울티마 8’
그러나 이 기간 중 모든 상황이 나쁘게만 돌아간 것은 아니다. 온라인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울티마 온라인’ 또한 이 시기에 개발/출시되었기 때문이다. 리차드는 ‘울티마’ 시리즈에서 자유도를 극대화시키려면 멀티플레이 기능이 필수라고 생각했고, 그 결과 드넓은 필드와 극한의 자유도를 갖춘 브리타니아 대륙(‘울티마 온라인’의 배경)을 창조한다. ‘울티마 온라인’은 MMORPG의 기반을 탄탄히 한(사실상 MMORPG라는 단어를 가장 처음 사용한) 대표작으로, 지금까지 그 어떤 온라인게임에서도 행하지 못한 압도적인 자유도를 구현하여 MMORPG가 가야 할 길(특히 북미 지역에서)을 열어주는 역할을 했다.
리차드가 ‘울티마 온라인’에서 추구한 것은 무한한 가능성. 즉 자유도다. 게임 내에 집을 짓는다거나, 바다에 나가 길을 잃고 표류하기도 하고, 심지어 운영자를 죽이기도 하는 극한의 자유도는 ‘울티마 온라인’을 대표하는 가장 큰 특징이다. 실제로 게임 내에서 PK 시스템을 악용한 유저가 운영자를 죽인 사례가 있었는데, 이를 전해들은 리차드는 유저에게 제재를 내리기는 커녕 ‘이게 바로 진정한 자유도가 아닌가!’ 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울티마 온라인’은 국내에서도 수많은 마니아 유저를 양산할 정도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로드 브리티쉬’ 리차드의 명망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졌다. 사실 EA는 리차드가 ‘울티마 온라인’ 의 개발을 시작할 때 반대 입장을 보였다. 97년 이전에만 해도 세계적으로 상용화된 온라인게임은 거의 전무했으며, 일부 마저도 MUD게임으로, 그 수익이 대기업이 눈독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즉 수익 모델이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결국 EA와 리차드 사이에는 더욱 큰 앙금이 생겼다. 이후 ‘울티마 온라인’은 큰 성공을 거두고, EA는 태도를 싹 바꿔 리차드 게리엇이나 오리진과의 충분한 합의 없이 ‘울티마 온라인 2’, ‘윙커맨더 온라인’, ‘해리포터 온라인’ 등의 제작 계획을 발표하기까지 한다. 결국 이 둘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이후 1999년 ‘울티마’ 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울티마 9’가 시장에서 예상보다 저조한 실적을 기록하자 EA는 오리진 시스템즈의 모든 신작 프로젝트를 취소시키고, 이 과정에서 리차드를 비롯한 오리진의 주요 개발자들이 모두 퇴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이전부터 ‘윙커맨더’ 시리즈 등을 조금씩 정리해 오던 오리진은 리차드의 퇴사 이후 오직 ‘울티마 온라인’만 개발하는 스튜디오가 되었고, 이후 미씩 엔터테인먼트가 ‘울티마 온라인’의 개발을 넘겨받으면서 해체되고 만다. 결국 오리진은 현재 EA의 디지털 판매 플랫폼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 ‘울티마’ 시리즈를 종결 지은 ‘울티마 9’
▲ MMORPG의 전설이라 불리는 ‘울티마 온라인’
세계를 뒤흔든 엔씨소프트 이적, 그리고 ‘우주먹튀’
2000년, EA를 퇴사한 리차드는 형 로버트 게리엇과 스타르 롱(울티마 온라인 프로듀서) 등과 함께 데스티네이션게임즈를 설립하고, EA와 맺은 1년 간 동종업계 근무 금지 서약서 만료를 기다린다. 그리고 1년 후, ‘네이버캐스트(게임대백과-송재경편 )’ 에서 다뤄졌던 일화대로 리차드는 ‘E3 2001’ 회장에서 당시 엔씨소프트 부사장으로 있던 송재경과 계약을 맺고 협력관계를 체결한다. 이후 2001년, 리차드는 엔씨소프트 미국현지법인인 엔씨오스틴의 개발총괄이사가 되어 ‘타뷸라 라사’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엔씨소프트의 리차드 영입은 당시 전세계 게임업계를 뒤흔들었다. 특히 국내 게임업계에는 상징적인 의미도 매우 컸다. 게임업계의 후발 주자였던 한국이 세계 3대 개발자로 명명 높은 리차드를 영입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이로 인해 엔씨소프트는 미국에서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리니지 2’의 미국 흥행과 아레나넷 인수 등 활발한 사업을 전개해나간다.
엔씨소프트 이사이자 북미 오스틴 스튜디오의 총 책임자가 된 리차드는 새로운 MMORPG ‘타뷸라 라사’의 개발에 들어간다. 사실 이 때까지는 좋았다. ‘타뷸라 라사’를 개발 중이던 2006년에는 미야모토 시게루, 시드 마이어, 사카구치 히로노부, 존 카멕, 윌 라이트, 스즈키 유, 피터 몰리뉴, 트립 호킨스 등에 이어 9번째로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AIAS)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 엔씨소프트에서 제작한 비운의 작품 ‘타뷸라 라사’
▲ 미국 AIAS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을 당시의 리차드 게리엇
그러나 2007년 출시된 ‘타뷸라 라사’는 흥행에 참패하며 업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긴다. 1천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엄청난 대작이었으나, 그 실적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엔씨소프트의 손해는 막심했고, 리차드 개인에게도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관계자들은 이후 엔씨소프트와 리차드 간의 의견 차이로 인해 ‘타뷸라 라사’가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이 나왔다고 말했으며, 이는 일부 사실로 증명되었다.
‘타뷸라 라사’의 실패 이후, 리차드는 2008년 말 엔씨소프트를 퇴직하고 우주 여행을 간다. 1983년 STS-9을 타고 우주로 나갔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주를 여행하겠다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었다. 그러나 퇴사 전부터 ‘타뷸라 라사’의 흥행 참패에 개의치 않는 것처럼 우주 여행을 위한 훈련을 받아왔고, 퇴사 후에는 주식을 팔아 2백억 원 대의 차익을 본 데 이어 엔씨소프트를 상대로 스톡옵션 관련 소송을 걸어 330억 원 가량의 배상액을 받아내기까지 하는 그의 행적은 국내 게이머들에게 좋지 않게 비춰졌다. 결국 그에게는 ‘우주먹튀’ 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게 된다. 단 ‘타뷸라 라사’의 흥행 실패와 엔씨와의 소송 등을 어느 한 쪽의 잘못으로 평가할 수는 없으며, 엔씨소프트와 리차드 사이의 결별과 마찰에 당시 북미 게이머들은 리차드의 편을 들기도 했다.
▲ ‘타뷸라 라사’ 개발 도중 한국에 방한한 리차드 게리엇
▲ 엔씨소프트 퇴직 직후 우주 여행을 갔다오면서 ‘우주 먹튀’ 라는 별명을 얻는다
그의 행보는 끝나지 않았다
우주여행을 다녀온 리차드 게리엇은 눈에 띄는 대작을 내놓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전성기 못지 않은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현재 무중력 비행 체험 업체 ‘제로-지’ 의 대표이사이자 페이스북 카지노 게임 등을 만든 개발사 포탈라리움의 부사장이기도 하다. 우주여행 이후 우주 비행에 대한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져 비행사들의 골밀도 감소 현상을 예방하는 신형 우주복 개발에도 참여하고 있으며, ‘울티마’ 시리즈를 계승한다는 신작 ‘쉬라우드 오브 아바타’를 킥스타터를 통해 제작하고 있기도 하다. ‘쉬라우드 오브 아바타’는 소셜 펀딩 사이트 킥스타터를 통해 200만 달러 이상의 개발 자금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으며, ‘울티마’ 시리즈를 계승하겠다는 목표로 ‘솔로 플레이도 MMO 플레이도 아닌 새로운 모델’을 도입할 것으로 알려져 또다시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
▲ 남극 탐험을 두 번씩이나 다녀온 리차드 게리엇
▲ 그는 무중력 비행 업체 ‘제로-지’ 의 대표이기도 하다(뒷줄 왼쪽 세 번째)
또한 지난 93년 소더비 경매를 통해 사들인 러시아 달 탐사선 ‘루노코드 2호(당시 실종)’가 발견되자 그 반경 25마일 이내의 달 표면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또 한번의 이슈를 모으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언론이 우스갯소리로 치부했으나, 실종된 우주선에 자금을 투자하거나 지구 바깥의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는 등의 행보는 일반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파격적인 시도임에 틀림없다.
논어에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에 미치지 못한다’ 라는 말이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리차드는 게임을 즐기는 자임이 확실하다. 그는 ‘게임 제작자라면 실제로 게임 같은 삶 속에서 살아야 한다’ 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미국 오스틴에 지어진 ‘브리타이나 매너이’ 라는 중세 시대의 괴성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집 안에는 게임에나 등장할 것 같은 ‘던전’ 이 구현되어 있으며, 할로윈에는 사람들을 불러 이 곳에서 파티를 연다. 인류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남극 탐험을 두 번씩이나 가고, 타이타닉 침몰지에서 좌초선을 인양하고, 아버지의 뒤를 쫓아 우주에까지 손을 뻗쳤다. 이러한 철학이 담긴 그의 게임은 게이머들의 마음 속 환상을 컴퓨터 안에서 실현시켜주며 환호를 받아 왔다. 단, 대규모 자본이 유입되거나 외부 압력이 가해져 즐길 환경이 훼손된 작품은 어김없이 실패를 거뒀다.
▲ 신형 우주복 개발에 협력하기도 한 리차드 게리엇(왼쪽 두 번째)
비록 ‘울티마 온라인’ 이후 큰 히트작을 내놓지 못하고 우주 여행 등 게임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삶을 살며 ‘세계 3대 개발자’ 의 후보에서 내려왔다 올라갔다를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그는 자신의 꿈과 로망을 컴퓨터 속에서 구현시키려 하고 있다.과연 그는 또다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통해 게이머들에게 충격을 선사할 것인가. 로드 브리티쉬의 다음 발걸음에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 ‘울티마’ 의 계승을 목표로 현재 개발 중인 ‘쉬라우드 오브 아바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