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비욘드 어스 체험기, 시연하러 갔다가 문명당할 뻔
2014.09.26 21:56 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 무대는 세계가 아니라 우주다! '문명: 비욘드 어스' (사진제공: 테이크투)
2010년 말, 전세계 게이머들을 타임머신으로 인도한 ‘시드 마이어의 문명 5(이하 문명 5)’. 그 차기작이자 1999년 발매된 ‘시드 마이어의 알파 센터우리’의 정신적인 후속작 ‘문명: 비욘드 어스(Civilization: Beyond Earth)’가 오는 10월 24일 한글화 정식 발매된다.
사실 본 기자는 2010년 9월부터 연말까지 기억이 흐릿하다. 당시 ‘문명 5’를 리뷰하겠다고 스팀을 통해 게임을 설치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게임기자가 문명했다’는 얘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가면서 주변에서 말리기 시작해, 겨우겨우 ‘문명’ 상태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당시 리뷰)
그렇게 ‘문명 5’를 잊어갈 무렵,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문명’ 세계를 우주로 확장한 ‘문명: 비욘드 어스’였다. 사실 ‘문명 5’를 워낙 재밌게 했던 것도 있고, SF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터라 초반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공개되는 시스템과 영상을 접하다 보니 어느새 이 게임에 매료되어 버렸다. 그 와중, 테이크투에서 25일(목) ‘문명: 비욘드 어스’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줬다. 이건 운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 '문명: 비욘드 어스' 게임플레이 트레일러 영상 (영상출처: 공식 유튜브 채널)
전문용어 작렬! 어느 때보다 고마운 한글화
‘문명: 비욘드 어스’를 가장 처음 접했을 때 놀란 것은 신속하고 완벽한 한글화였다. 전작 ‘문명 5’가 뒤늦게 한글판이 발매되었음을 감안하면, 전세계 동시 발매일에 맞춰 한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새삼 감동으로 다가온다.
일단 게임 내 캐릭터 더빙 및 나레이션은 원어를 그대로 살렸다. 범아시아 협력체 수장 다오밍 수차는 중국어를, 아메리카 개척 공사 수잔 필딩은 영어를 사용하는 등이다. 비록 한국이 없긴 했지만, 국가별 문명이 아닌 문화적 구분이므로 아쉬움이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문명 5’ 세종대왕 더빙이 워낙 충격적이기도 했고)
한글화가 이루어진 부분은 UI와 대사 등 음성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다. 사실 전작 ‘문명 5’는 한글판 출시 전에 영문 버전으로 즐겨도 큰 무리가 없었는데, ‘문명: 비욘드 어스’는 한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게임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SF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게임 내에는 수많은 고유명사와 과학적 전문용어가 난무한다. 때문에 영어를 유창히 하는 사람이라도 쉽게 해석하기 어렵다. 실제로 게임을 하다 보면 번역이 매끄럽고 완벽히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용어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많았다. 한글화가 어느 때보다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각종 과학 및 SF용어가 난무하는 세계인지라 한글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체험 버전 촬영이 금지돼 있었기에 스크린샷은 영문으로 대체합니다)
문명이 아닌 스폰서와 성향을 선택하라
지구에서 탄생한 문명 발전을 그리던 원작과 달리, ‘문명: 비욘드 어스’는 새로운 행성에 이주해 온 인류의 적응/발전기를 다룬다. 따라서 게임은 인류가 새로운 행성에 착륙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구를 떠나기 전에, 플레이어는 ▲자신의 사상을 정하고 ▲기술과 돈을 제공할 후원자를 선택하고 ▲타고 갈 우주선을 고르고 ▲현지에서 사용할 화물을 적재하고 ▲새로운 행성에 적응해 나갈 사람들(콜로니스트)의 성향을 결정해야 한다.
위 다섯 가지 요소는 플레이어 세력 성향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우주선이나 화물, 콜로니스트 성향은 게임 초반에 주어지는 자원 및 생산/운영 특성에 관여한다. 기자는 우주선 선택 시 월드맵 해안선을 미리 보여주는 특성을 선택했는데, 전체적인 맵 구조를 먼저 파악한 채 게임을 즐길 수 있어 지형을 이용한 전략적 플레이가 가능했다.
이 중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후원자’와 ‘사상’이다. 후원자는 전작의 문명 선택과 같이 세력의 고유 아이덴티티 역할을 하며, 선택에 따라 기지 도시 발전 속도나 첩보 활동 속도, 식량 생산량, 전투 시 유닛 능력 등 다양한 패시브 효과가 주어진다. 후원자는 총 8종으로, 아프리카 인민 연합, 범아시아 협력체, 아메리카 개척 공사, 슬라브 연방 등 지구의 향기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기자는 호전적인 성향을 가진 브라질리아를 선택했는데, 근접 전투에서 유닛 파워를 10% 올려주는 패시브로 외계 토착생물과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사상은 플레이어 세력이 살아가는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로, ‘우월성’과 ‘순수’, ‘조화’ 3종류로 나뉜다. 우월성은 외계를 식민지로 바라보는 실용주의적 성향으로, 인간을 대체하는 로봇과 무인기 등 인공 유닛을 생산할 수 있다. 순수는 외계 행성을 인류에 맞춰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인류 중점적 급진주의 성향으로, 인류 역사와 생리를 보존함과 동시에 외계 생명을 말살하여 지구와 같은 환경을 만들려는 호전성을 보인다. 마지막 조화는 유전자 접합 및 조작을 통해 인류를 해당 행성에 맞게 변화시키려는 사상이다. 외계 생태계를 연구하고 신체를 바꿔 가기 때문에 외계 생물들과 큰 마찰을 빚지 않으며, 후반부에는 고유적인 생명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사상은 게임 시작 시 설정할 수 있지만, 게임 도중에도 수치 형태로 누적되며 계속 변화한다. 예를 들면 게임 도중에는 선택지 형태로 수많은 퀘스트가 주어지는데,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특정 사상 수치가 내려가거나 올라간다. 이밖에도 기술 개발이나 폐허 발굴, 자원 포드 획득 등 사상 수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장치가 여럿 존재해, 도중에 사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 문명의 시작이 아니라 행성 개척을 다룬다
▲ 슬라브 연방의 지도자 바딤 페트로빅 코즐로프
외계 생명체와 인류의 사투
게임을 시작하면 비행선이 착륙하며 도시가 되고, 기본 유닛이 주어진다. 개척자를 움직여 정착지를 찾던 전작과는 달리, ‘문명: 비욘드 어스’의 도시 건설은 다소 호쾌한 면이 있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타 세력들도 이런 방식으로 행성에 착륙하는데, 통신 기술이 발달한 미래이니만큼 굳이 직접 만나지 않아도 무선으로 인사말을 주고받을 수 있다.
유닛 생산과 자원 채취, 도시 확장 등 핵심적 시스템은 전작 ‘문명 5’와 거의 같다. UI가 조금 변하긴 했지만, ‘문명 5’를 해 본 유저라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단, 과학기술 발전이 트리(Tree) 형태로 흘러가던 전작 ‘문명 5’와는 달리, ‘문명: 비욘드 어스’는 수많은 기술이 웹(Web) 형태로 엮여 있다. 지구 문명은 역사라는 정답이 존재하지만, 미래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즉, 기계와 인간, 생명공학 등 원하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수많은 과학기술은 ‘문명: 비욘드 어스’의 가장 큰 진입장벽이기도 하다. ‘문명 5’는 과정 차이만 있을 뿐, 결국 인류 발전 역사를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유저는 그저 상황에 맞춰 기술 개발 순서만 지정해 주면 됐다. 그러나, ‘문명: 비욘드 어스’는 내가 원하는 미래상을 먼저 세우고, 과학기술 개발 방향을 정해야 한다. 사실 이는 유저에 따라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달력, 종이, 바퀴, 화약, 증기기관 등 일반적으로 알만한 기술명이 아니라, 평생 듣도보도 못 한 수많은 과학기술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각 기술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고, 어느 방향 기술이 내게 어울리는지를 파악하는 데만 최소 1시간 이상 소요될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문명’ 시리즈 진가가 발휘됐다. 이 생소한 문명 발전 과정을 배워 가는 과정이 소름끼치게 재밌다는 것이다. 내가 개발한 과학기술 특징과 효과가 게임에 즉시 반영(상상도 못 한 멋진 미래무기를 생산한다거나, 대표 지도자 옷차림이 바뀐다거나)되니, 과학기술 웹을 조금씩 열어가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기자는 2시간 동안 약 15개 가량 되는 신규 과학기술을 오픈했는데, 마음 같아선 한 10시간만 더 해서 모든 과학 기술을 보고 싶었다.
과학기술과 함께 ‘문명’ 시리즈의 대표적 발전 포인트인 ‘문화’는 ‘문명: 비욘드 어스’에서 ‘미덕’이라는 요소로 재등장한다. 미덕은 문화와 같은 트리 형태를 띄고 있으며, 무력, 지력, 지식, 산업 4종류만 존재한다. ‘문명 5’ 문화가 8종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택폭은 좁아지고 깊이는 확장된 느낌인데, 안 그래도 배울 게 많은 게임인지라 이런 간략한 형태는 반갑다.
▲ 기본적인 도시 발전 시스템은 전작과 거의 같다
▲ 지상과 연동되는 궤도 맵에 위성을 띄우면 다양한 공격, 수비, 지원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 트리가 아닌 웹 형태를 띄고 있는 '문명: 비욘드 어스'의 과학기술
첫 눈에 보기에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 미덕은 트리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력, 지력, 지식, 산업 4종류가 존재한다
게임 초반부는 거센 외계자연과 사투로 첨철됐다. ‘문명 5’에서는 약하디 약한 야만인이나 득실대는 수준이었지만,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필드 곳곳에 수많은 외계생명체가 꿈틀댄다. 단순한 사마귀형 벌레에서부터 땅에서 튀어나오는 거대 샌드 웜, 심지어는 타일 하나를 꽉 채워 커다란 섬처럼 보이는 트라켄까지. 수많은 첨단 무기와 군대를 동원해도 잡기 힘든 무서운 괴수들이 넘쳐난다. 여기에 독을 뿜는 땅 등 트랩(?)까지 더해지니, 어디 하나 안심하고 나갈 곳이 없다. 필자는 외계 생물을 모두 몰아내자는 ‘순수’ 사상을 선택했기 때문에 2시간 내내 괴물들과 싸웠는데, ‘조화’ 사상을 선택해 그들과 어울려 지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남았다.
외계 생물 강화 덕분인지, 전반적으로 전투 부분이 강조된 느낌이 든다. 유닛 체력이 1/10 단위가 아닌 1/100 단위로 표시된다던가, 탐험가나 일꾼이 예전보다 더 침략에 취약해졌다거나, 궤도 맵에 위성을 배치해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더 상세해진 유닛 업그레이드 시스템이 도입되는 등 외계 생명체와 SF 액션을 강조하는 요소가 곳곳에 산재한다. 뿐만 아니라, 전투 효과나 액션 묘사도 더 발전해 보는 즐거움도 높였다.
전투가 강화됐다고 해서 외교 콘텐츠가 약해진 것은 아니다. 일단 통신기술과 교통수단 발달로 외교 편의성이 더욱 강화됐으며, 스파이를 육성해 다양한 세력에 침투시켜 기술이나 자원을 빼돌리는 등 뒷세계 외교도 한층 다양해졌다. 기자가 스파이 기관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첩보 활동을 벌인 것은 시연 시간 종료 10분 전이었는데, 다른 세력의 물자와 과학기술을 몰래 빼돌리는 재미는 기존 ‘문명’ 시리즈의 제한적인 첩보 활동보다 월등했다. 나중에는 감시나 밀수, 공성 벌레 유인 등 수많은 활동이 가능하다고 하니, 정식 출시 후 제대로 즐길 날이 기대된다.
▲ 도시만한 거대 집게벌레에서부터
▲ 섬으로 착각할 만한 바다괴수 크라켄까지...
전작의 야만인들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 무력 엔딩을 원한다면 타 세력 역시 만만치 않은 존재다
하마터면 또 문명당할 뻔 했다
이 날 공개된 시연 버전은 총 250턴으로 제한된 체험용 데모였다. 그러나, 2시간 동안 기자는 그 절반 정도인 130턴 밖에 진행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타 세력과 전쟁을 한 것도 아니고, 로딩이 길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 턴 한 턴이 매번 새로운 경험이었을 뿐이었다. 신기한 과학 기술과 유닛을 개발하고, 영화에나 나올 법 한 수많은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고, 한편으로는 세력을 발전시켜 더욱 먼 미래로 나아가는 모습. 이를 모두 감상하기에 2시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사실 체험 전에만 해도 ‘문명: 비욘드 어스’는 전작에 비해 흥행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 생각했다. SF세계관도 그렇거니와, 뭐니뭐니해도 전작은 ‘문명했습니다’ 라는 희대의 유행어와 사회적 신드롬을 남긴 ‘문명 5’ 아닌가. 솔직히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더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막연히 느껴졌던 진입장벽은 벽이 아니라 가장 재미있는 구간이었다. SF에 대한 거부감만 떨쳐낸다면, ‘문명: 비욘드 어스’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열어줄 것이다. 2시간짜리 체험을 2분으로 느낀 장본인으로서 장담한다. 아아… 문명당한다…
▲ 편집장님, 아마 정식 버전 리뷰는 문명당해서 못 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