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 여대생과 여전사 사이에 갇힌 라라
2015.12.02 22:12 게임메카 김영훈 기자
▲ 다시 태어난 라라의 두 번째 모험담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
최근 해외 게임계는 여성 캐릭터의 과도한 성적 대상화를 자제하는 추세다. 덕분에 ‘와우’ 밴시 여왕은 10년 만에 배꼽을 가렸고, ‘스트리트 파이터’ 여성레슬러 레인보우 미카 또한 다소 부담스럽던 동작 몇 개가 잘려나갔다. 아울러 ‘메탈기어 솔리드’에 속옷바람 저격수를 투입한 코지마 히데오가 천박하다고 욕을 먹는가 하면, 성적 요소가 주요 콘텐츠(?)인 ‘데드 오어 얼라이브 익스트림 3’는 아예 북미 및 유럽 출시가 불발되기도 했다.
성적 대상화하면 역시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강한 남성의 상징이었던 ‘인디아나 존스’를 오마주하여, 제대로 ‘쎈’ 여주인공이 전무하던 90년대 중반 게임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강인하고 자주적이며 농염한 여성 고고학자가 전세계 유적을 탐험하며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콘셉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당시 라라의 몸에 딱 달라붙는 민소매 옷과 짧은 핫팬츠, 비현실적인 L컵 가슴은 뭇 게이머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 90년대 중반 헤성처럼 등장한 라라 크로프트, 한국 기준 L컵이라고...
그러나 시대 흐름에 따라 라라에게도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다. 2013년 ‘툼레이더’ 시리즈가 전면 리부트되며 관능적인 여전사 라라는 사라지고, 대신 숱한 고난을 겪으며 성장해가는 인간적인 소녀가 들어섰다. 이러한 변화는 성적 대상화를 지양하는 최근 추세와도 잘 맞아떨어졌으며, 한층 세련된 게임성 또한 호평을 받았다. 게임계 굴지의 섹스 심벌은 그렇게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갔다.
‘툼레이더’가 다시 태어난 지 2년 만인 2015년 11월 10일, 정식 후속작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가 출시됐다. 비록 Xbox 기간 독점으로 인한 잡음이 있긴 했지만, 국내에 음성까지 완벽 현지화하여 동시 발매돼 더욱 반갑다. 이번 작의 최대 화두는 새롭게 구축된 라라의 캐릭터성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것인가와 얼마나 진보된 게임성을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다.
▲ 과연 얼마나 발전했을까? 영상으로 보는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
사지에서 살아온 소녀, 제 발로 다시 고생길에 오르다
전작 ‘툼레이더’는 21살 여대생 라라가 외딴 섬에 표류하며 겪는 생애 첫 모험을 보여준다. 아직 서툴고 미숙한 라라는 해적과 사투를 벌이고, 일본 고대 왕국의 초자연적인 유산을 접하며 점차 강인한 탐험가로 거듭난다. 짜임새 있는 구성과 영화적인 연출 덕분에 평범한 소녀가 고난을 극복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며, 준수한 조작감도 게임에 한층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막바지에 이르러 라라는 꺾을 수 없는 의지와 해적 수십 명을 홀로 쓸어버릴 정도의 화력을 갖추게 된다. 그렇다면 그녀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다시금 고전 ‘툼레이더’처럼 숙련된 탐험가가 되어 여유롭게 적을 제압하거나, 반대로 표류와 살인에 대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폐인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 팬은 후자가 아닐까 추측했는데, 결과적으론 둘 다 아니었다.
▲ 전작에서 평범한 여대생 라라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여전사로 성장해간다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에서 라라는 다소 피폐하고 불안정한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딱히 전작에서 겪은 일로 힘들어하진 않는다. 대신 오래전 실종된 아버지 크로프트 경의 명예를 회복하는데 매우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였던 크로프트 경은 평생 영생의 비밀을 찾아 헤맸지만, 라라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저 허상을 좇는 광기로 비칠 뿐이었다.
표류 당시 초자연적인 존재와 맞섰던 라라는 이제서야 ‘모든 신화에는 진실이 숨어있다’는 아버지의 지론을 믿고, 자신이 직접 영생의 비밀을 찾아내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 옛 선지자의 발자취를 좇아 시리아에 고대무덤을 방문한 후, 곧이어 혹한이 맹습하는 시베리아 설산에서 본격적인 고생길에 오른다.
▲ 가족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집착이 조금은 뜬금없다
▲ 그렇게 또 제 발로 죽을 고생을 하러 먼곳으로...
누가 Xbox를 무시하는가, 진정 차세대 게임다운 그래픽
초반에 잠시 들르는 고대무덤을 비롯해 게임 내내 펼쳐지는 시베리아의 설경은 그야말로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매섭게 깎아지른 절벽과 장대한 유적이 어우러진 경관은 탄성을 자아내고, 번들거리는 빙판과 수풀, 돌 사이에 낀 이끼 하나에까지 섬세한 손길이 닿아있다. 보기에 다소 칙칙했던 전작과 달리 1,080P 고해상도로 소위 ‘쨍’한 색감이 일품이다. 차세대 게임에 걸맞은 그래픽은 물론이고 이를 활용한 오브젝트 배치도 무척 다채롭다.
고사양 PC의 전유물이었던 일명 ‘엘라스틴’ 옵션도 기본 적용돼 이제는 누구나 라라의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감상할 수 있다. 2년 전부터 호평을 받았던 캐릭터 모션은 더욱 발전하여 어떠한 동작을 취하여도 부드럽게 연계되고, 표정 묘사에도 생동감이 넘친다. 다만 아주 가끔 프레임이 급격히 저하되는데, Xbox의 제한된 성능을 고려하면 참작할만한 수준이다. 약간의 인내심만 발휘한다면 엔딩까지 별 탈 없이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 뛰어난 그래픽과 디자인 덕분에 가는 곳마다 장관이 연출된다
▲ 장대한 시베리아 설산은 보기만해도 춥다, 가뜩이나 겨울인데
▲ 저 소복하게 쌓인 눈과 번들거리는 빙벽을 보라
일취월장한 그래픽과 함께 영화적 연출도 한층 강화됐다. ‘툼레이더’에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바로 갑작스레 지붕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상황에서 숨 가쁘게 탈출할 때이다. 화면이 흔들리며 라라의 뒤를 바짝 쫓는 가운데, 앞뒤로 무언가 폭발하거나 날아드는 것을 재빨리 회피해야 한다. 이번 작에선 바로 이런 긴박한 상황을 대폭 늘리는 한편, 역동적인 카메라워크로 한 편의 모험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아울러 한때의 유행이었던 QTE(Quick Time Event)는 축소되고, 사격이나 점프 등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도록 변경됐다.
▲ 이제는 한물 간 QTE는 거의 안 나온다, 다급한 상황에서 X를 누르는 정도
▲ 전작에서 QTE로 처리하던 함정을 이제는 직접 사격해서 없앤다
이제 똑똑한 적 좀 상대하면 안될까? 발전이 미비한 시스템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는 불과 2년 사이 괄목할만한 시각적 성취를 이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려한 껍데기 속에 담긴 알맹이에선 그다지 의미 있는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오픈월드까진 아니지만 이전 구간을 언제든 방문할 수 있는 비선형적 구조, 게임의 등뼈를 구성하는 주요임무와 맵 곳곳에 배치된 탐험임무, 자잘한 수집물과 간단한 장비 강화 시스템, 엄폐 위주의 전투까지 모든 것이 전작과 지나치리만치 똑같다.
물론 시리즈를 관통하는 큰 뼈대를 그대로 이식하는 문제가 아니다. 좋게 보면 전작을 충실히 계승 및 발전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는 그 발전상이 너무나 미비하다. 당장 라라의 스킬은 물론이고 눈에 띄는 신규 무기나 참신한 개조 방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전작을 즐겼다면, 프롤로그가 끝나고 캐릭터 메뉴를 켜는 순간 새로 배워야 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스킬 및 무기 개조 시스템은 전작에서 바뀐 점이 거의 없다
▲ 그것까진 괜찮은데, 세부적인 콘텐츠는 조금 더 추가를 했어야지
신규 탐험요소가 추가되고 수집물도 훨씬 늘어났지만, 실질적으로 새로운 경험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그저 ‘생존본능’을 켜서 위치를 확인한 뒤 다가가 X버튼을 누르는 행위의 반복일 뿐이다. 또한, 수집에 성공할 때마다 소정의 보상이 나오는 것도 양날의 검이다. 일반적으로 수집물은 100% 달성 도전과제를 노리지 않는다면 아예 거들떠보지 않아도 되지만, 여기선 보상이 눈에 밟혀 쉽사리 무시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탐험 보상을 포기할 경우 후반부 진행이 살짝 버겁다.
더불어 전작에서 아쉬운 소릴 들었던 전투에 깊이를 더하는 데도 실패했다. ‘툼레이더’는 대부분 주요 전투가 강제 이벤트로 진행돼 미리 고지를 점하거나 특수무기를 활용하는 등 전략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했다. 여기에 적의 행동 방식도 단순하기 짝이 없어서 엄폐물 뒤에서 쏘고 숨기를 반복하며 수십 명을 몰살시킬 수 있을 정도다. 안타깝게도 ‘라이브 오브 더 툼레이더’는 여기서 한 발짝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나빠진 부분도 있는데, 상술한 프레임 저하로 인해 교전 상황에서 동작이 미묘하게 지연된다. 엄폐를 풀고 조준을 하며 일어서고, 쏘고 다시 앉는 일련의 동작이 부드럽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조준을 하는 순간 플레이어의 조작과 캐릭터의 움직임이 엇박자를 이룬다. 결국 당황한 플레이어는 재빨리 아무렇게나 총을 쏴버린 뒤 몸을 숨기고야 만다. 아주 깔끔한 사격감을 지닌 게임임에도 프레임 저하로 인해 전투의 재미가 반감되는 것이 안타깝다.
▲ 적들은 아주 몰개성한 종교적 비밀결사인데, 오합지졸이 따로 없다
▲ 엄폐도 안하고 달려드는 저 패기는 대체...
2001년 영화 ‘툼레이더’가 원작? 너무나 전형적인 내러티브
답보 상태에 놓인 것은 시스템뿐만이 아니다.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는 이러한 종류의 모험물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전개를 따라간다. 심지어 줄거리가 2001년 영화 ‘툼레이더’와 굉장히 유사하다. 실종된 아버지의 과업을 완수하려는 딸, 그녀가 쫓는 강력한 유물, 이 힘을 빼앗으려는 비밀결사, 오지에 숨겨진 유적, 유물의 일그러진 정체,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는 최측근, 결국 세계 평화를 위해 유물을 파괴하는 주인공까지. 심지어 이 영화는 그다지 평이 좋지도 않았다.
▲ 미안하지만 내러티브 수준은 이 영화랑 하등 다를 바 없다
라라의 캐릭터성에 이르러선 더욱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이번 작에서 라라 크로프트는 강인한 여전사도 아니고 힘없는 여대생도 아닌 모호한 무언가로 그려진다. 분명 시종일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불안해하고 지쳐있는데, 한편으론 초인적인 체력과 움직임,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렇다고 후반부로 갈수록 여유가 생기거나 심경변화가 오는 것도 아니다. 전작과 달리 게임 내내 이렇다 할 내적인 성장을 느끼기 어렵다.
라라는 계속 떨리는 목소리와 온몸에 난 생채기로 처절한 상황을 피력하는데, 정작 전투에선 날아다니니 괴리감이 들 수밖에 없다. 전작에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섬에 표류했고, 스스로 생존을 위해 강해져야 했으며, 납치된 친구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가야만 했다. 이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졌기에 후반부 ‘무쌍’이 다소 비현실적이라도 납득할 수 있었다. 사냥감이 사냥꾼으로 거듭나는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졌다.
▲ 전작에선 라라가 목숨을 걸고 강해져야만 했던 정황이 충분히 설명된다
▲ 덕분에 후반부 '무쌍'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에선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에 대한 집착만으로 모험을 강행할 뿐이다. 여기에는 이 캐릭터에 연민을 느낄만한 극적인 요소가 없다. 대신 비밀결사 ‘트리니티’에 영생의 비밀을 넘길 수 없다는 영웅적인 동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게임 속 라라는 영웅의 이미지를 거부하고 여전히 전작의 표류한 여대생으로 남고자 한다.
전작에서 라라를 특별하게 해주던 요소들이 사라지고 보니,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캐릭터만이 남았다. 앞서 이야기 자체가 뻔하고 전형적이란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그걸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언제나 지쳐있고, 진지하며 특별한 심경 변화를 겪지도 않는다. 가령 이 게임의 주인공이 남자라고 생각해보라. 당장 경쟁작 ‘언차티드’의 재기발랄한 주인공 네이선 드레이크와 비교해보면 답은 나온다. ‘라이브 오브 더 툼레이더’ 속 라라가 눈에 띄는 이유는 그저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캐릭터로서 매력이 전혀 없다.
▲ 성적 대상화하지 않는 것은 좋은데, 아예 캐릭터를 무색무취로 만들면 어찌하나
꼭 지치고 힘겨워야만 인간적인가? 라라의 진정한 성장을 기다리며
이 모든 실망에도 불구하고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는 재미있는 게임이다. 사실 비교적 짧은 간격을 두고 이어지는 시리즈물이 전작을 답습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콜 오브 듀티’와 ‘어쌔신 크리드’는 매번 그래왔고, 최근에는 ‘파 크라이’와 ‘배트맨: 아캄’조차 이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높은 판매량과 호평을 동반하는 것은 기본 뼈대가 워낙 훌륭하기 때문이다. 이는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도 마찬가지다.
이 게임은 2년 전 ‘툼레이더’로는 성에 안 차는 게이머에게 더 넓은 장소와 많은 적, 수집물, 탐험요소를 제공해준다. 그래픽의 발전 또한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분명 누군가는 필자에게 어떻게 ‘라이브 오브 더 툼레이더’를 비판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개발진이 이보다는 더 나은 줄거리와 시스템을 선보일 수 있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은 얼마나 환상적인 풍경을 구현할 수 있을까에 전부 쏠려버린 듯하다.
필자는 새로운 라라 크로프트의 열렬한 지지자다. 핫팬츠를 입고 언제나 여유가 넘치는 섹스 심벌을 힘겹게 악재를 이겨내는 인간적인 존재로 탈바꿈한 것은 좋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지치고 힘들지만 굳세게 이겨내는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으니, 그 모습 그대로 이 모험활극을 끝까지 끌어갈 것인가. ‘라이즈 오브 더 툼레이더’는 결말에서 명확하게 후속작을 암시하고 있다. 부디 몇 년 후에나 만나볼 수 있을 3편에선 더욱 인간적으로 무르익은 라라를 보여주길 바라 마지않는다.
▲ 3편에서는 라라가 '포텐'을 터트리고 저 서광 너머로 나아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