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랜시아 영화에 담긴 팬들의 애정이 넥슨을 움직였다
2020.06.30 16:13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지난 5월 28일 개막한 인디다큐페스티발 2020에 눈에 띄는 영화 한 편이 출품됐다. 모두에게 잊혀진 온라인게임 ‘일랜시아’의 현실을 다룬 ‘내언니전지현과 나’다. 일랜시아는 10년 넘게 이벤트나 업데이트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운영자도 떠난 채 방치되고 있다. 그런 게임을 하는 유저들에게 “왜 게임 하세요?”를 물은 해당 영화는 공개와 함께 SNS와 커뮤니티 등지에서 화제를 모았다. 과거 일랜시아를 해 봤던 사람들부터, 자신이 해 왔던 다른 게임들을 추억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이 영화와 일랜시아라는 게임에 주목했다.
이 영화가 나비효과를 불러왔다. 소수 유저들만 가슴앓이 하며 반 포기 상태로 있던 일랜시아의 현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다. 여론이 형성됐고, 충성도 높은 유저들을 10년 넘게 방치해 온 넥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에 넥슨이 움직였다. 무려 12년 만에 일랜시아에 이벤트를 연 것이다. 이에 대한 넥슨 측 공식 입장은 없었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영화 때문이라는 인과관계는 확실해 보인다.
일랜시아에 이벤트가 열린 지 5일째,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제작한 박윤진 감독을 만났다. 박 감독은 영화 개봉 후에도 일랜시아 환경 개선을 위해 앞장서서 뛰어다니고, 이후 벌어진 상황을 더해 완전판 영화를 준비 중이다. 영화 개봉 후, 일랜시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넥슨 관계자가 영화를 보러 왔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작년 12월 완성된 작품으로, 영화학도 박윤진 감독의 대학교 졸업작품이었다. 당시만 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지난 5월 제20회 인디다큐페스티발 영화제 상영이 결정되면서 화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게임메카를 포함한 게임전문매체들에서 기사가 나갔고, SNS와 커뮤니티 등지에서 확산되며 이목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박 감독 역시 이런 반응들을 보고 ‘사람들이 많이 신기해하고 관심을 보이고 있구나’고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관심은 실제 영화관에서도 증명됐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다큐페스피발 티켓 예매 시작 후 몇 분 만에 매진됐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영화관을 찾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시기임을 감안하면 꽤나 인상적인 결과다. 일랜시아 유저들은 물론, 다른 게임을 하던 게이머, 게임업계 관계자들이 대거 몰렸고, 이슈가 되니 영화업계 관계자들도 흥미를 보였다는 후문이다.
가장 인상깊었던 얼굴은 영화를 보러 상영관을 찾은 넥슨 임직원들이다. 특히 넥슨 라이브개발본부 본부장 등 일랜시아에 실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관계자들도 방문해 영화를 보고 박 감독과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박 감독은 “영화제이니만큼 게임보다는 영화에 대한 얘기를 주로 했는데, 직원분들도 다 게이머라 그런지 게임을 추억하고 편안하게 관련 얘기를 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박 감독은 영화제 이후 해당 관계자들과 별도의 연락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일랜시아 개선을 위해 많은 이들의 의견을 한 군데 모아서 넥슨 측에 전달하고자 하는 데 집중했다. 박 감독의 최종 목표 중 하나는 유저 간담회인데, 효율적인 의견 전달을 위해 많은 유저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일랜시아 내에는 업데이트를 원하는 이들도 있지만, 넥슨이 다시 게임에 손을 대면서 기존 사용 중인 툴이 막힐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불안, 시세 및 밸런스 변화에 대한 우려 등 다양한 의견이 있기에, 모든 유저가 공통적으로 원하는 부분을 파악하고 전달하려 최선을 다했다. 예를 들면 버그를 악용하는 유저들을 막고, 시스템적으로 해당 부분을 악용할 수 없도록 해달라는 등 지극히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부분이다.
12년 만에 열린 이벤트, 유저 간담회도 열릴까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중, 지난 25일 예고 없이 일랜시아에 이벤트가 열렸다. 2008년 이후 12년 만이었다. 앞서 설명한 넥슨 관계자들이 영화를 보고 간 지 한 달도 안 돼서 벌어진 일이다.
박 감독을 비롯한 일랜시아 유저들은 대부분 이번 이벤트를 반겼다. 운영자도 없이 십 수년 간 방치되던 게임에 드디어 넥슨이 관심을 가져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게임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버그 악용 유저가 활보해도 아무 조치가 없었지만, 이제는 뭔가 바뀌어 나가리라는 희망이 싹텄다. 이벤트가 시작되자마자 평소 일랜시아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유저들이 접속했으며, 채팅창은 ‘오랜만에 할 게 생겼다’고 기뻐하는 의견으로 가득했다. 덩달아 넥슨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박 감독에게도 많은 감사인사가 전해졌다.
다만, 오롯이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다. 이벤트를 시작한 6월 25일 저녁부터, 접속만 하면 20~30분, 빠르면 5초 만에 게임에서 튕기는 버그가 발생했다. 이는 30일 기사 게재 시점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 며칠 새, 일랜시아 유저 여론은 반전돼 “이럴거면 왜 이벤트를 열었냐, 그냥 우리 놀던 대로 놔두지”라는 얘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박 감독 역시 “이벤트 전까지만 해도 넥슨이 돌아오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진이 빠지는 기분이에요. 그저 게임을 버리지 않았다는 확신만 줬으면 했는데, 신뢰도가 더 떨어진 기분이에요.”라고 아쉬움을 밝혔다.
현재 일랜시아 유저들은 이벤트보다는 안정적인 게임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올해 3~4월 경 발생한 빡빡머리 버그, 그로 인해 수 개월째 막혀 있는 미용 스킬 복구, 필드에 아이템이 많이 떨어져 있으면 몬스터 리젠이 안 되는 버그 등이 대표적이다. 박 감독은 이러한 유저들의 의견을 모아 조만간 넥슨 측에 전달할 예정이다.
현재 박 감독은 일랜시아 유저들의 불편사항을 전달하고 최소한의 관리에 대한 약속을 받기 위한 간담회를 추진 중이며, 이를 포함한 내용을 덧붙인 ‘완전판’ 영화를 만들기 위해 다시 한 번 카메라를 들었다. 영화가 이슈가 되고, 넥슨 관계자가 보러 오고, 게임에 이벤트가 열리고, 이에 대한 유저 반응 등을 담으려는 것이다. 박 감독은 “아직 어떤 방향으로 편집하겠다는 결정은 하지 않았지만, 이 문제는 일랜시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방향으로 살을 좀 더 붙이려 하고 있다”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려 한다고 전했다. 추가 촬영과 편집을 마쳐 빠르면 올해 10~11월, 늦으면 내년쯤 정식 개봉하는 것이 목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