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의료관광 왔다가 겪은 공포 썰, 블러드본
2020.10.16 17:35게임메카 이새벽
다크 소울 시리즈로 유명한 프롬 소프트웨어가 PS4 출시에 맞춰 내놓은 호러 액션 RPG 블러드본은 특유의 어둡고 기괴한 분위기와 설정으로 지금까지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게임이다. 그러나 프롬 소프트웨어 특유의 간접적이고 독특한 스토리텔링이 적용돼, 게임 내용을 이해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오죽하면 게임을 클리어 하더라도 게임 줄거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사실 블러드본은 꽤나 독특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닌 게임이다. 마침 오는 11월부터 PS 플러스 컬렉션을 통해 PS5에서도 블러드본을 무료로 즐길 수 있게 되니, 특유의 독특한 분위기와 전반적인 줄거리를 짚어보도록 하자.
첫 모습은 고딕 호러처럼 보였던 블러드본, 그런데...
판타지에도 여러 하위 장르가 있듯, 공포에도 하위 장르가 있다. 그 중에도 유독 오래되고 유서 깊은 하위 장르가 고딕(Gothic)이다. 일반적으로 고딕은 뾰족하게 치솟은 첨탑과 크고 위압적인 기둥들로 대표되는 건축양식을 말한다. 하지만 문학에서 고딕은 조금 다른 의미를 뜻한다. 초자연적인 공포와 근대 낭만주의가 결합된 장르로, 괴기소설 ‘드라큘라’와 ‘프랑켄슈타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등이 포함된다.
고딕 소설의 특징은 과학과 이성이 미신을 타파하고 인류를 계몽해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팽배한 근대 시대를 배경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가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드라큘라의 흡혈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사악한 이중인격, 늑대인간, 도플갱어 등이 주요 소재다.
출시 초기 블러드본은 바로 이러한 고딕 호러를 표방했다.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 야마기와 마사아키 프로듀서는 2020년 3월 인터뷰에서 블러드본이 고딕을 지향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2013년, PS4 출시에 맞춰 소니는 신규 콘솔 기기 성능을 활용한 뛰어난 그래픽과 연출의 게임을 원했다. 이 프로젝트를 낙점 받은 개발업체 중 하나가 바로 다크 소울 시리즈로 유명한 프롬 소프트웨어였다.
데몬즈 소울과 다크 소울 등 어두운 분위기의 공포 액션 RPG를 꾸준히 만들어온 회사답게, 프롬 소프트웨어는 이번에도 비슷한 느낌의 게임을 제작하기로 했다. 그들의 선택은 고딕이었다. PS4 성능을 활용해 무대를 세밀하게 묘사한다면, 근대적이고 장엄하면서도 어딘가 설명 못 할 불안감을 조성하는 고딕 특유 분위기를 훌륭하게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프롬 소프트웨어 대표이자 디렉터인 미야자키 히데타카는 2011년 다크 소울을 제작할 때 캐릭터 망토가 휘날리게 하거나 배경 요소를 세밀하게 묘사해 불안한 감성을 배가하고자 했으나, 당시 콘솔 기기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100% 구현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다크 소울에서 구현하지 못한 분위기를 PS4 기반에서 풀어보겠다는 것이 미야자키 디렉터의 포부였다.
실제로도 블러드본은 여러 면에서 고딕 호러의 전통적인 요소들을 보여줬다. 고딕 호러를 지향한 계기는 콘솔 기기의 기술적 발달에 따른 시각적 스토리텔링이었지만, 그 외 줄거리에서도 고딕의 풍취가 강하게 풍긴다. 배경부터 그렇다. 블러드본은 리젠시 시대(Regency Era) 풍 디자인에 근대적 기술을 지닌 가상 도시 ‘야남’에서 시작된다. 과거 융성했지만 지금은 고립된 이 도시는, 오래 전부터 기묘한 풍토병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현지인들이 ‘야수병’이라고 부르는 이 병은 차츰 사람을 비이성적이고 쉽게 분노하게 만들며, 이내 물리적으로도 짐승으로 변모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게임 시작 시점에 이미 야남은 반쯤 방치되고 있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나마 안전한 구역 은신처에 모여 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야남은 많은 병자들의 희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곳은 옛날부터 의학이 발달한 도시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다른 병에 걸린 환자로, 치유법을 얻기 위해 야남을 방문했다가 광인과 짐승에게 쫓기게 된다. 그러던 중 모종의 방법을 통해 ‘사냥꿈의 꿈’이라는 작은 이계에 속박된다. 이 곳에 속박된 주인공은 죽어도 계속해서 부활해 괴물을 사냥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렇듯 블러드본은 이성이 어둠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순진함이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찢겨 나가고, 희망과 자신감이 불안과 공포로 바뀌어 버린 장소를 무대 겸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게임이 진행될수록 플레이어는 블러드본이 보이는 그대로의 고딕 호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게임이 중반부에 들어서면 블러드본은 급격히 분위기가 바뀐다. 고딕 호러에서 코스믹 호러로 말이다.
한 꺼풀 까고 나니 실은 코스믹 호러
18세기 말부터 인기를 끌어 19세기 만성한 고딕 호러는 여러 문학적 계보로 뻗어나갔다. 그 중 게임과 판타지 팬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끄는 하나가 이른바 ‘코스믹 호러’다. 19세기 초반 시작된 이래 괴기소설 작가 하워드 필립 러브크래프트를 거치며 일군의 팬덤을 이룬 이 장르는, 초자연적 공포에서 더 나아가 외계에서 온 초월적이고 불가해하며 이질적인 존재에 의한 공포를 핵심 소재로 삼았다.
코스믹 호러는 단순히 작중 인물이 공포를 느끼는 수준을 넘어, 외계에서 온 위대한 존재의 영향 앞에 이성이 완전히 파괴되어 미치거나, 정신과 신체가 함께 오염돼 자신도 괴물이 되는 ‘변이’ 소재도 자주 사용한다. 이처럼 외계 존재에 의해 인간의 정신과 신체가 오염되고 변이되는 내용은 최근 영화로도 개봉된 러브크래프트 원작 소설 ‘우주에서 온 색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블러드본도 실은 이러한 코스믹 호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게임 중 하나다. 인터뷰에 따르면 미야자키 히데타카는 개발 과정에 러브크래프트 소설을 여러 권 참고했고, 개발진에게도 회의에 앞서 전집을 일독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발매 초기에 대대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실은 처음부터 코스믹 호러 게임으로 개발됐다는 이야기다. 그런 만큼 실제로 블러드본은 초반 구간을 넘어서는 순간 곳곳에서 전통적인 코스믹 호러 소재가 발견된다.
게임 중반에 이르면 플레이어는 야남이 인근에 위치한 ‘투메르’라는 종족 유적을 발굴하며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르겐워스 학파에 속한 학자들은 유적을 발굴해 투메르 종족이 모종의 방법으로 ‘위대한 존재’라는 것과 접촉했으며, 이 ‘위대한 존재’들이 지닌 힘을 빌려 매우 뛰어난 지식과 감각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비르겐워스 학파는 투메르 종족이 남긴 기록과 유물을 사용해 결국 ‘위대한 존재’들이 남긴 피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외계 존재의 피는 인지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많은 학자들이 외계 존재의 피를 관찰하던 중 이성이 부서졌고, 이에 위기를 느낀 비르겐워스 학파는 연금술과 인간의 피를 매개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약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 약물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았으니, 그것이 바로 야수병이었다.
비르겐워스 학파는 필사적으로 야수병을 억제할 수단을 찾았고, 곧 투메르 유적에서 찾은 외계 존재의 피를 인간의 피와 섞어 만든 약물을 사용하면 야수병을 비롯한 수많은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일부 급진적인 학자들은 비르겐워스 학파를 떠나 ‘치유 교단’을 설립했고, 앞서 언급한 연금술 약물 시술을 받은 자신들의 피를 일반인에게 수혈해 치료하는 의료기술을 개발해 퍼뜨렸다.
초기만 해도 그 치료 기술은 많은 병을 치료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인외의 피를 섞는 치료가 좋은 결과를 낳을 리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치유 교단에서 치료를 받은 이들이 점점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니자 다시 야수병이 발병했다. 사실 치유 교단의 기술은 야수병을 억제했을 뿐 치료하진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치료 교단의 수혈을 받은 모두가 이 병을 앓게 됐다.
결국 치유 교단의 치료는 야남 시민 대다수에게 ‘야수병’을 확산시켰고, 궁지에 몰린 생존자들은 괴물을 사냥하는 사냥꾼을 양성하고 무기를 개발해 도시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끔찍하게 강한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비르겐워스 학파 출신이었던 사냥꾼들의 수장 ‘게르만’은 금단의 의식을 통해 직접 외계 존재와 접촉하여 모종의 계약으로 괴물을 쓰러뜨릴 힘을 얻었다.
그러나 이 존재는 야남에 더 큰 재앙을 불러왔다. 사냥꾼들과의 거래로 힘을 키운 이 외계의 존재는 점점 더 물질세계에 큰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야남 전체에 적색 달이 뜨며 다른 우주의 기운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야수병에 걸리지 않은 시민들까지도 집단으로 미치거나 반인반수로 변했고, 지금까지 이성을 유지해온 사냥꾼과 사회 지도층도 대부분 끔찍한 괴물이 됐다. 말 그대로 도시가 멸망의 기로에 놓인 셈이다.
다만, 최후의 순간 비르겐워스 학파 수장인 ‘윌럼’은 옛 제자 게르만이 벌인 재앙을 막기 위해 또 다른 의식을 치렀다. 호수에서 새로운 외계 존재를 소환하고 계약을 맺어, 게르만이 소환해낸 존재를 억제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야남에 떴던 적색 달은 사라지고 도시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미치거나 변이한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도시는 주인공이 올 때까지 쭉 네크로폴리스 같은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코스믹 호러는 고딕 호러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다. 블러드본이 초반부에 고딕 호러 분위기를 내세우다 중반 이후 코스믹 호러로 전환되는 것도 어쩌면 장르적 연관성을 의식한 구성이 아닐까 싶다.
후반부 보스 ‘위대한 존재’, 러브크래프트의 ‘위대한 옛 것’ 오마주인가?
앞서 언급한 과거 야수병 확산 사연은 숨겨진 이야기로, 게임 초반을 넘어가야 비로소 파편적으로 알게 되는 내용이다. 이와 플레이어는 과거에 게르만이나 윌럼, 혹은 투메르인이 소환한 외계의 존재와 싸우게 된다. 사실 이들 중 일부는 플레이어 근처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단지 보거나 상호작용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이질적이고 고차원적인 다른 세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한낱 인간은 인지조차 불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계 존재들은 게임 내에서 ‘위대한 존재(Great One)’라고 칭해진다. 이는 러브크래프트 코스믹 호러 소설에 등장하는 ‘위대한 옛 것(Great Old One)’을 떠오르게 한다. 이들 또한 대부분 지구가 아닌 외계에서 온 초월적 존재들로, 그 유명한 ‘크툴루’ 또한 이 ‘위대한 옛 것’ 중 하나다. 러브크래프트 소설에서도 많은 인간들이 우주적인 진실에 눈을 뜨기 위해 ‘위대한 옛 것’을 섬기며 금단의 지식을 갈구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블러드본의 ‘위대한 존재’는 러브크래프트의 ‘위대한 옛 것’을 오마주했다. 당장 이름만 봐도 ‘옛(Old)’만 빼면 똑같다. 다만 차이점은 블러드본 ‘위대한 존재’는 러브크래프트 ‘위대한 옛 것’들과 달리 죽이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그들을 인지하는 것부터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위대한 존재’는 인간의 인지를 초월했기에, 죽이는 건 고사하고 그 존재조차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들을 인지하게 해 주는 요소가 바로 ‘계몽’이다. 블러드본에는 ‘계몽’이라는 수치가 존재하는데, 이는 끔찍한 사물이나 존재를 볼 때마다 쌓인다. 이 역시 그 뿌리는 러브크래프트 기반 TRPG ‘크툴루의 부름’의 ‘이성(Saninity)’ 시스템으로 보인다.
게임에서 보스 몬스터의 존재감에 노출되거나, 특수한 사물 근처에 있거나, 특정 이벤트를 보면 일정 수치의 ‘계몽’을 얻는다. 그리고 계몽이 너무 높아지면 발광 저향력이 낮아지고, 캐릭터가 발광에 걸리기 쉬워진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특수하게 조제된 진정제를 먹어야 한다. 반대로 ‘계몽’이 너무 낮으면 몇몇 게임 내 상호작용이 막히기도 한다. 예컨대 ‘위대한 존재’인 ‘아미그달라’는 사실 게임 시작 시점부터 야남 곳곳의 첨탑과 성벽에 붙어 살고 있다. 설정상 이들은 고대 투메르 종족이 소환한 존재로, 아직도 야남에 살고 있다. 이들은 ‘계몽’이 40을 넘거나 스토리가 일정 분기점을 넘어야 볼 수 있게 되고, 상호작용이 가능해진다.
이렇듯 후반부에 접어들면 블러드본은 외계에서 온 ’위대한 자’들을 추종하며 ‘계몽’을 갈구하는 미치광이 사교도와, 이해할 수 없는 자신만의 목적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촉수 달린 ‘위대한 자’ 본체들을 상대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블러드본은 러브크래프트 소설 뿐 아니라 TRPG ‘크툴루의 부름’을 위시한 각종 ‘크툴루 신화’ 보드게임들까지 참고한 듯 보인다. 고딕 호러와 코스믹 호러,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보드게임까지 모아서 하나의 줄기를 완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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