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루갈이 시작한 KOF, 지금 어디까지 왔나?
2021.01.01 23:11게임메카 이새벽
지난 2020년 12월 3일, 일본 대전격투 게임의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KOF 시리즈 최신작 KOF XV가 발표됐다. 기사 게재 시점에선 개발 중이라는 사실과 콘셉트 아트 몇 장 외엔 공개된 정보가 별로 없지만, 2016년 발매된 KOF XIV 이후 5년 만에 발표된 신작이기에 팬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관심이 뜨겁다.
생각해 보면, KOF는 1994년부터 이어진 장수 시리즈다. 외전을 제외한 정식 타이틀만 세도 12개에 달하며, 외전과 미디어믹스까지 합치면 그 수는 거의 배가 된다. 처음 접하거나 스토리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게이머 입장에서는 기존에 진행된 내용과 이번 신작에 전개될 스토리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상대적으로 스토리 중요성이 적은 대전격투 장르라고는 하지만, 고유 세계관과 전통 있는 캐릭터들을 내세운 시리즈인 만큼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에, 게임메카는 KOF XV 발표를 맞아, 지난 시리즈 줄거리를 모아봤다. 지금껏 나온 KOF 시리즈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간단히 알아보자.
KOF의 두 뿌리, 아랑전설과 용호의 권
유명한 이야기지만, 본디 KOF는 개발업체 SNK가 만든 두 게임, 용호의 권과 아랑전설의 크로스오버로 기획된 게임이다. 그렇기에 KOF의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두 게임에 대해서 간단히 짚어 둘 필요가 있다.
캡콤은 1987년 대전격투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를 출시했다. 이 게임은 당시에도 여섯 개 버튼을 이용한 콤보와 플레이어간 1 대 1 대전을 벌일 수 있다는 독특한 요소로 여러 게이머의 흥미를 끌었다. 그런데 이 게임에 눈독을 들인 다른 개발업체가 있었다. 바로 SNK였다.
기존에 SNK는 주로 아케이드 슈팅 게임을 만들던 회사였지만, 신규 게임기 네오지오 발매를 준비하며 판촉을 위한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고자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신형 기기에서만 플레이 할 수 있는 신선하고 재미있는 게임들이 함께 출시돼야 기기도 흥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도의 일환으로 SNK는 1988년, 캡콤을 떠난 스트리트 파이터 핵심 개발자 니시야마 타카시와 마츠모토 히로시를 영입했다. 이후 두 개발자는 캡콤에서 스트리트 파이터를 만들 당시 반영하지 못했던 기획을 담은 신규 대전격투 게임을 네오지오 사양으로 개발했는데, 그 게임이 바로 1991년 11월 출시된 아랑전설이다. 2012년 발매된 화보집 ‘스트리트 파이터 아트웍스 極’에 실린 니시야마 타카시 인터뷰에 따르면, 아랑전설은 보다 흥미로운 스토리와 캐릭터를 지향했다.
아랑전설의 기본 뼈대는 복수극이댜. 무술가이자 갱단 우두머리인 기스 하워드는 옛 스승의 비전서를 빼앗기 위해 동문이었던 무술가 제프 보가드를 찾아가 대결 끝에 살해한다. 그리고 제프 보가드의 양자인 테리와 앤디는 양부의 죽음을 목도하고 기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이후 양부의 스승에게서 무술을 배운 둘은 암흑계의 거부로 성장한 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개최하는 무투대회 ‘KOF’에 참가한다는 이야기다.
이렇듯 아랑전설은 전세계 무투가들이 모여 최강자를 가린다는 단순한 내용의 스트리트 파이터에 비해 보다 완성도 있는 플롯과 캐릭터를 내세웠다. 아랑전설은 그 외에도 같은 스테이지 내에서도 라운드가 지날 때마다 시간의 흐름을 반영해 날씨가 바뀌는 등, 연출을 통한 내러티브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랑전설이 출시되기도 전에 그늘이 드리웠다. 1991년 3월, 캡콤이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발매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 2는 특유의 콤보 연계 요소를 강화했는데, 이로서 대전 모드에서 어떻게 상대의 연계기 흐름을 끊으면서 내 연계기로 상대를 제압할 것인가 하는 수싸움에 깊이가 배가됐다. 덕분에 스트리트 파이터 2는 대전 격투 게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극찬과 함께 아케이드 게임 시장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문제는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선풍적인 인기가 수많은 아류를 파생시켰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는 1991년 11월 발매된 아랑전설도 당시엔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모방한 게임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인터뷰 중 니시야마 타카시는 스트리트 파이터를 만든 원조 개발자들의 아랑전설이 짝퉁으로 언급됐던 상황에 아쉬움을 성토하기도 했다. 스트리트 파이터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차별화를 시도한 정신적 후속작임에도, 표절이라는 욕을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랑전설은 표절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완성도 높은 게임성과 고유한 스토리, 매력적인 캐릭터를 앞세워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일본 아케이드 산업 잡지 ‘게임 머신’ 1992년 1월호에 실린 자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랑전설은 1991년 세 번째로 많이 팔린 아케이드 유닛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초 출시된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너무 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아랑전설 역시 굉장한 호응을 얻은 셈이다. 이에 SNK는 이듬해인 1992년 또 다른 대전격투 게임을 내놓았는데, 이 게임이 바로 용호의 권이다.
용호의 권은 아랑전설보다 더 밀도 있는 스토리라인과 개성 있는 캐릭터를 내세웠다. SNK의 이러한 행보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이었다. 그 시기 일본에서는 게임 내에서는 기본적인 배경과 캐릭터만 보여주고, 이후 게임이 상업적 성공을 거두면 만화 잡지나 애니메이션 등을 통한 미디어믹스로 스토리를 보완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런데 니시야마 타카시와 마츠모토 히로시는 게임 내에서 완결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는 철학이 있었고, 이를 용호의 권에 그대로 반영했다.
용호의 권은 특수부대 출신 마피아 두목 미스터 빅이 무술의 달인 타쿠마 사카자키를 휘하로 영입하기 위해 그 딸인 유리 사카자키를 납치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에 타쿠마의 아들이자 유리의 오빠 료 사카자키, 그리고 유리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도장 제자 로버트 가르시아가 유리를 구하기 위해 활약한다는 것이 주된 줄거리다. 앞선 스트리트 파이터나 아랑전설과 달리 격투 대회라는 소재가 빠지고, 캐릭터 사이 관계가 부각된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연출 또한 강화됐는데,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전투가 진행될수록 캐릭터들이 부상을 입고 옷이 찢어지는 요소였다. 특히 킹 같은 캐릭터는 얼핏 남자처럼 보이지만 전투에서 패배할 시 옷이 찢어지며 흉부가 노출돼 여성임이 드러나는, 지금 기준으로도 충격적인 연출을 자랑했다. 이러한 특징 외에도 용호의 권은 필살기 사용에 기력 게이지가 필요하고, 이를 도발로 깎아 상대를 방해하는 등 독특한 요소로 뭇 게이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SNK가 출시한 아랑전설과 용호의 권은 이러한 스토리텔링 말고도 독특한 접점이 있었다. 바로 설정 일부를 공유한다는 것이었다. 두 게임은 모두 미국 플로리다에 위치한 가상의 도시 사우스 타운을 무대로 하며, 시대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 사이에도 조금씩의 접점이 있다. 예를 들어 아랑전설 악당 기스 하워드와 용호의 권 악당 미스터 빅은 도시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라는 등이다.
아랑전설과 용호의 권은 둘 다 나름의 인기를 끌며 각자의 시리즈를 이어 나갔다. 이 두 시리즈는 시간이 지날수록 스토리가 점점 깊게 엮어들었다. 1993년 출시된 아랑전설 스페셜에는 용호의 권 주인공인 료 사카자키가 게스트 참전했으나, 1994년 출시된 용호의 권 2에서는 아랑전설의 보스인 기스 하워드가 젊은 모습으로 등장하며 완벽한 세계관 합치를 이룬다. 이렇듯 두 시리즈의 크로스오버는 당시 많은 게이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런 기류를 읽은 SNK는 급기야 크로스오버를 전면에 내세운 게임을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임이 훗날 아랑전설과 용호의 권보다 큰 인기를 끌며 최종적으로는 두 시리즈를 흡수하기까지 하는 KOF였다.
단순 크로스오버로 시작한 KOF, 독자적인 시리즈로 일어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 KOF의 기획은 아랑전설과 용호의 권에 등장한 역대 캐릭터를 총집합한 올스타전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훗날 출시되는 스트리트 파이터X철권, 마블vs캡콤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두 게임의 세계관적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처음엔 특별한 스토리 없는 단순한 축제성 기획이었으나, 마냥 축제 분위기로만 흘러가진 않았다. 그래도 KOF라는 별도의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만큼, 이 게임만의 고유한 시스템과 캐릭터 등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렇게 1994년 발매된 시리즈 첫 게임 KOF 94는 아랑전설에서도 언급된 적 있는 대규모 격투대회 ‘KOF’가 또 다시 개최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주최자는 기스 하워드가 아니었다. 이번 주최자는 R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이는 용호의 권이나 아랑전설 중 어느 한 쪽 보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면 게임의 무게가 기울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R의 정체는 루갈 번스타인으로, 그는 세계를 주름잡는 무기상이자 권법가였다. 루갈은 자신에게 패배한 격투 선수를 산 채로 동상으로 만드는 악취미가 있었는데, 이번 KOF 대회는 새로운 수집품을 모으기 위해 개최한 것이었다. 즉 우승자를 개인적으로 싸워 쓰러뜨린 다음, 그 몸을 거푸집에 넣고 황동을 부어 동상으로 만들겠다는 이야기였다. 게임에서는 이 사실을 알게 된 우승자 팀이 그에 맞서고, 패배한 루갈은 분노해 항공모함 자폭 버튼을 눌러 폭사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KOF 94는 줄거리 자체는 다소 단순했지만, SNK 게임 인기 캐릭터들이 한 데 모여 자웅을 겨룬다는 내용, 그리고 쿠사나기 쿄와 루간 번스타인 등 개성 있는 신규 캐릭터들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SNK는 이듬해 KOF 고유 캐릭터와 스토리를 보강한 후속작 KOF 95를 내놓았다. 다소 단순했던 플롯의 KOF 시리즈의 자체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참고로 이 때부터 원작이라 할 수 있는 아랑전설과 용호의 권 캐릭터들은 주력 스토리에서 거의 빠지고, 참가 자체에 의의를 두는 일개 조연으로 자리잡는다.
KOF 95와 KOF 96, 그리고 KOF 97에 이르는 세 개의 게임은 ‘오로치 사가’라는 하나의 내용으로 묶인다. 핵심은 지구 그 자체의 의지 일부가 의인화된 존재 오로치다. 오로치는 과거 인간이 자연의 균형을 파괴한 데 불만을 품고 인간을 벌하고자 자신의 힘을 일부 하사한 대행자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특별한 힘을 지닌 세 일족에 의해 쓰러졌고 오로치 자신도 세상에 간섭할 수 없도록 봉인 당했다.
그러나 오로치의 대행자는 환생을 거듭하는 불멸자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바람이나 대지 등 자연의 힘을 다룰 수 있었다. 현대에 환생한 오로치 대행자들의 수장 게니츠는 젊은 시절 루갈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루갈을 꺾은 뒤 보통 인간이 오로치의 힘을 얻으면 어떻게 되는지 실험할 목적으로 약간의 힘을 그에게 주었다. 이 떄부터 루갈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으며, 항공모함과 함께 자폭했던 KOF 94 엔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후 루갈은 신체 일부를 기계로 개조해 오메가 루갈로 거듭나고, 복수를 위해 KOF 95를 개최한다.
KOF 95 최종 결전에서 루갈은 오로치의 힘을 모두 해방해 싸우지만, 그는 선택받은 자가 아닌 일개 인간에 불과했기에 오로치의 힘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결국 루갈은 전투 중 폭주한 오로치의 힘에 의해 분해돼 완전히 사망하고 만다. 그렇지만, 흑막인 게니츠를 비롯한 나머지 무리는 착실히 오로치 해방을 준비했다.
KOF 95에서는 시리즈 대표 캐릭터 중 하나이자 주인공 쿠사나기 쿄의 라이벌인 야가미 이오리가 처음 등장하기도 했다. 쿄와 이오리는 각각 고대에 오로치를 봉인한 두 가문의 후예지만, 이오리의 선조는 오로치 추종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오로치를 돕는다는 선택을 내렸다. 그 탓에 두 가문은 철천지 원수가 됐고, 이오리 역시 딱히 오로치를 좋아하진 않지만 쿄에 대한 분노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어서 KOF 96에서는 본격적으로 오로치 추종자 일족의 수장인 게니츠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로치를 봉인한 세 번째 가문인 카구야 측이 게니츠에게 습격을 당해 계승자가 살해되자, 그 동생인 카구야 치즈루가 게니츠를 쓰러뜨리고 오로치 봉인을 막을 전사를 찾기 위해서 KOF를 개최했다는 것이 대략적인 줄거리다. 게임 끝에는 오로치 봉인에 방해가 될 우승자 팀을 제거하기 위해 게니츠가 등장하지만, 그 역시 우승자 팀에게 쓰러진다.
KOF 97에서는 드디어 최종 보스인 오로치가 현세에 등장한다. 나머지 오로치 추종자들이 암약한 끝에 대회 중 모인 투쟁심을 에너지 삼아 오로치가 깨어나고, 추종자 중 하나인 크리스의 몸에 빙의해 강림한 것이다. 여기에 오로치와 계약을 맺은 가문의 후예 야가미 이오리가 폭주해 미치는 등 충격적인 연출이 다수 존재해, 세 개의 게임에 걸친 시리즈를 완결짓는 최종장다운 위용을 뽐냈다. 그러나 결국 오로치는 쿠사나기 쿄, 야가미 이오리, 카구야 치즈루에 의해 쓰러지고, 재봉인된다.
오로치의 재봉인으로 KOF의 큰 스토리 줄기는 완결됐지만, 당시 KOF의 인기는 최고조였다. 스트리트 파이터는 물론, 당대 출시된 모든 대전격투 게임 중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SNK도 이 시리즈를 묻어둘 생각이 없었다. 1998년에는 드림 매치라는 이름의 특별한 스토리가 없는 올스타전 게임이 발매됐지만, 그 이듬해인 1999년부터는 새로운 스토리를 전개했다. 소위 네스츠 3부작으로 불리는 이 시리즈에서는 새 악역으로 매드 사이언티스트 결사단체가 등장한다.
네스츠는 인체개조와 복제인간 기술을 개발한 비밀조직으로, 우수한 생물병기를 제작해 세계정복을 꿈꾸는 미치광이 집단이다. 이들은 KOF 97 당시 쿠사나기 쿄가 오로치를 쓰러뜨릴 때 사용했던 초자연적인 불꽃의 힘에 관심을 갖고 쿄를 납치했으며, 그 힘을 추출해 다수의 복제인간과 클론들에게 부여했다. 이후 네스츠는 전투 데이터를 축적하기 위해 쿄의 클론과 그 힘을 받은 개조인간들을 대회에 보냈다. 심지어 주인공도 바뀌었는데, 쿄의 힘이 이식된 개조인간 실험체 K’였다.
네스츠 삼부작은 이처럼 독특한 설정을 내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썩 매끄러운 전개를 보여주진 못했다. 네오지오가 아케이드 시장에서 차츰 도태되고, 용호의 권 외전 등 신규 타이틀도 부진한 성과를 기록함에 따라 1998년부터 큰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 영향이 1999년부터 발매된 네스츠 삼부작에도 반영된 탓이었다. 그 탓에 이 시리즈는 독특한 소재에 비해 악당들의 동기와 목표가 차츰 불분명해졌고, 시나리오 완성도도 팬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끝났다.
요약하면 네스츠 삼부작은 네스츠의 수장 이그니스가 조직을 이용해 KOF 전투 데이터를 축적한 최강의 실험체를 확보한 후, 그 몸에 자기 의식을 옮겨 최강의 존재가 된다는 목적을 가지고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그가 저지른 세계구급 테러를 생각하면 다소 유치한 목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주인공인 K’는 이그니스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결국 이그니스는 K’와 동료 실험체들에게 패배했다는 치욕에 위성기지를 지구에 충돌시키는 자폭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실패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사실 네스츠 삼부작 마지막 게임인 KOF 2001은 정상적으로 출시되지도 못했다. KOF 2000 출시 후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미리 독립시킨 자회사와 협력업체인 국내 게임사 이오리스를 통해 간신히 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회사 도산과 부족한 개발 인원, 빠듯한 개발 기간, 이오리스의 입김 등으로 인해 원래 계획에서 많은 변경이 가해졌다. 최종 보스 이그니스의 잘생긴 외모 역시 이오리스 측의 집요한 요청에 의해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SNK는 SNK 플레이모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둔 자회사를 통해 SNK가 가지고 있던 지식재산권들을 회수하고, 분리시켰던 다른 자회사와 스튜디오를 하나씩 흡수해 간신히 재기에 성공했다. 다만 이 시기에도 KOF 만큼은 꾸준히 매해 출시되며 간판 시리즈의 자리를 지켰다.
1년 발매주기 전통을 깬 애쉬 삼부작, 그리고 새로운 스토리
SNK 도산과 재기라는 불안정한 시기 완결된 네스츠 삼부작 이후, SNK 플레이모어는 오로치 삼부작 때와 마찬가지로 지난 삼부작을 기념하는 드림매치 외전을 2002년 발매했다. 네스츠의 뒤를 잇는 다음 이야기는 그 이듬해인 2003년부터 시작됐는데, 이때부터 KOF 시리즈의 발매주기에 변화가 생겼다. 기존에는 매해 연도별 네이밍을 붙이며 새로운 게임이 나왔지만, 1년에 신작을 하나씩 내려니 매번 빠듯한 개발 기간과 완성도 부족에 시달려 왔다. 이에, 새로운 삼부작부터는 넉넉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다음 게임을 내기 시작했으며, KOF 2003 이후에는 연도별 네이밍을 버렸다.
2003년 시작된 새로운 시리즈는 일명 ‘애쉬 3부작’으로 불린다. 이는 새 주인공 애쉬 크림슨의 이름을 딴 것이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오로치와 동격인 신적 존재를 섬기는 무리가 시간이동을 통해 나타나 인간 문명의 역사를 바꾸고자 하고, 이를 특별한 가문의 후예인 주인공 애쉬가 막는다는 줄거리다. 다만 애쉬가 주인공 답지 않게 비열하고 의뭉스러운 태도로 일관하는 데다, 전작 주인공인 쿄와 이오리, 치즈루의 힘을 빼앗기 위해 움직인다는 점은 독특하게 다가왔다.
앞서 언급했듯 애쉬는 본래 오로치처럼 지구의 의지가 의인화된, 그러나 인간에게는 적대적인 존재인 ‘지구의사’를 막을 사명을 지닌 가문의 후예다. 그러나 정작 그 선조는 이제는 잊힌 또 다른 지구의사 한 명을 따르는 사도였다. 그들이 섬긴 지구의사는 이미 오래 전 하수인을 모두 잃고 힘을 빼앗겼지만, 시공을 다루는 힘을 지닌 몇몇 추종자가 대규모 천체활동이 벌어질 때 시간의 문을 열고 미래로 넘어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치의 힘을 빼앗아 주인에게 바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시간을 건너온 지구의사 추종자들의 우두머리 사이키는 자기 후손인 애쉬를 협박해 복종하게 만든다. 이후 사이키는 애쉬를 움직여 오로치의 봉인을 깰 도구와 힘을 모으고, 오로치의 봉인이 풀리면 그 힘을 빼앗아 시간의 문 너머에 있는 주인에게 바칠 계획을 세운다. 주인이 회복되면 이들은 과거로 돌아가 인간 문명을 파괴해 역사를 바꿀 생각이었다. 애쉬는 힘에 굴복해 어쩔 수 없이 사이키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은 자신만의 계획을 숨기고 있었다.
우선 KOF 2003과 후속작인 KOF XI에서 애쉬는 조상의 뜻대로 전작 주요 캐릭터인 야가미 이오리, 카구야 치즈루가 지닌 유물과 힘을 하나씩 빼앗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애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당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의 진의는 2011년에 출시된 KOF XIII(KOF XII는 스토리 없는 드림매치였다)에서 비로소 드러났는데, 사실 그는 처음부터 사이키를 배신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지구의사 추종자들의 정보를 외부로 유출시키는 동시에, 사이키가 시간의 문을 여는 의식을 방해할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시간의 문을 여는 의식을 방해하는 데 성공했고, 조상인 사이키가 의식을 막으러 온 다른 이들과 싸우는 틈을 타 그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사이키의 의식이 후손이자 살해자인 애쉬에게 깃들게 되고, 결국 사이키는 애쉬의 몸을 빼앗아 지금까지 모은 유물과 오로치의 힘까지 사용하는 막강한 존재로 거듭나고 말았다. 이에 다른 인물들이 애쉬의 몸을 조종하는 사이키와 싸우는 사이, 애쉬의 정신은 가까스로 몸의 통제권을 되찾고 시간의 틈새로 뛰어들어 자신을 지워버린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소멸이었다.
애쉬가 사이키와 함께 시간의 틈새에서 소멸함에 따라 역사는 두 사람의 존재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수정돼 버렸다. 둘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둘의 행적과 기록 또한 모두 삭제됐다. 이처럼 KOF XIII은 애쉬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기억 못하는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는, 충격적일 정도로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끝났다.
어쨌거나 이렇게 KOF 세 번째 삼부작이 끝나고, 팬들은 다음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 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동안은 신작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다음 게임인 KOF XIV는 5년이나 지난 2016년에 출시됐는데, 전반적 스토리는 괴짜 거부 격투가 안토노프가 순수한 목적으로 KOF를 개최하고, 여러 선수들이 저마다의 목적으로 참가한다는 단순한 내용으로 진행됐다. 밀도 있는 플롯은 없어졌고, 캐릭터 개개의 신변잡기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KOF XIV의 마지막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겨져 있었다. 주최자인 안토노프도 예상하지 못한 것인데, 선수들의 강한 투쟁심에 이끌려 초자연적 존재가 난입한 것이다. 그 주인공은 전작의 사이키가 만들어낸 시간왜곡 결과 생겨난 원혼들의 덩어리 ‘버스’였다. 버스 자체는 선수들의 대응에 큰 문제없이 쓰러졌으나, 문제는 버스가 파괴되며 수많은 원혼들이 방출돼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것이다. 즉, 전작에서 죽었던 인물들이 돌아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이로서 KOF XIV는 역대 시리즈에서 죽거나 봉인돼 퇴장한 캐릭터들이 다수 돌아올 가능성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그 자체로 밀도 있는 스토리는 없었지만, 이후 나올 게임들에서 퇴장했던 기존 인기 캐릭터를 정식 등장시킬 수 있는 판이 깔렸다. 갑자기 원혼 덩어리가 나타나 죽었던 캐릭터들을 되돌린 이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KOF XV에 대한 정보가 더 공개되어야 알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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