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기반의 '원소스멀티유즈', 블리자드에게 배워라!
2016.06.10 10:09 게임메카 김영훈 기자
“아, 뭔가 더 없을까?” 매력적인 게임이나 잘 쓰여진 책, 멋들어진 영화를 즐긴 후에는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한다. 세계관과 캐릭터에 깊이 몰입한 나머지 꿈에서 깨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유사한 콘텐츠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가장 흔한 답은 역시 후속작이겠지만 전혀 다른 매체에서 만족을 얻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 소스 멀티 유즈(OSMU)’가 잘 먹혀 드는 이유다.
하나의 콘텐츠를 게임, 소설,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로 확대 재생산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구상이다. 가령 어떠한 게임이 인기가 있다면 주요 캐릭터를 활용한 상품이나 OSMU 콘텐츠를 통해 매출 증대와 신규 유저 유입을 동시에 꾀할 수 있다. 넥슨에서 판매 중인 ‘메이플스토리’ 학용품, 엔씨소프트 ‘리니지’ 마법인형 피규어, 선데이토즈 ‘애니팡’ 단편 애니메이션 등이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국내 게임업계의 ‘미디어믹스’는 아직 걸음마 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 규모는 10조에 가까울 정도로 성장했지만 다른 문화 산업과 연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나마 일찍부터 OSMU에 관심을 보인 넥슨이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상품 제작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직은 한국 게임업계를 대표할만한 캐릭터도, 이를 활용한 ‘미디어 믹스’도 미진한 실정이다.
▲ 국내 게임업계 대표적인 OSMU 사례
좌측부터 '메이플스토리' 퍼즐, '리니지' 피규어, '애니팡' 애니메이션
그렇다면 과연 게임을 활용한 OSMU가 실제로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최근 신작 ‘오버워치’와 영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으로 뭇 게이머의 이목을 사로잡은 블리자드는 훌륭한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년간 쌓아온 노하우 덕분에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그리고 이제는 ‘오버워치’에 대한 2차 창작물을 조율하고 관리하는데 능수능란하다.
게임을 중심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창조하고, 다른 매체로 전이시키는 것은 블리자드의 오랜 장기 중 하나다. 블리자드는 게임 시나리오가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던 90년대 중반에 이미 책 한 권 분량의 배경설정을 첨부할 정도로 ‘썰 풀기’에 도가 텄다. 게임 제작을 위해 마련된 방대한 이야기들은 향후 공식 소설과 설정집을 엮어내기 위한 자양분이 됐다.
블리자드는 게임 원작 소설 출간에 그치지 않고 CG 영상에도 투자를 이어갔다. 그 결과 기술적으로 뛰어날 뿐만 아니라, 뚜렷한 서사 구조를 지닌 시네마틱 영상이 탄생했다.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없지만, 젊은 게이머들을 노린 그래픽 노블도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활발한 ‘미디어 믹스’로 게임 세계관과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다시금 OSMU를 활성화시키는 선순환 구조라 할 수 있다.
▲ 게임에서 소설과 그래픽 노블, 나아가 영화로 확장된 '워크래프트'
오는 9일(목) 국내 개봉하는 판타지 영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은 블리자드가 추구하는 OSMU의 궁극적 결과물이다. 94년 자그마한 PC게임에서 출발한 ‘워크래프트’가 22년만에 1억6,000만 달러(한화 1,852억 원) 짜리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변모했다. 블리자드가 지난 20년간 OSMU를 통해 ‘워크래프트’ IP의 가치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가 단적으로 보여진다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은 앞서 개봉한 유럽, 남미 28개국 가운데 26개국에서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에 등극했으며, 중국에서는 예매로만 840만 달러 가량 수익을 올리는 등 순조롭게 출발했다. 국내와 북미 예매율도 나쁘지 않아 현재로서는 흥행 전망이 매우 밝다. 장기적인 추이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워크래프트’ IP의 저력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블리자드는 게임 원작 영화를 내놓는데 그치지 않고, 게임 원작 영화 원작 소설에까지 손을 뻗었다. 국내에도 지난 17일 출간된 공식 소설 ‘워크래프트: 듀로탄’은 영화 속 오크 주인공 ‘듀로탄’의 과거사를 그리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않지만, 읽고 나면 영화를 한층 더 즐길 수 있다. 개봉에 앞서 영화를 기다리는 이들이나, 개봉 후 영화 속 이야기를 조금 더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 모두에게 유용한 ‘미디어 믹스’ 사례다.
▲ 기다림의 목마름을 해소하거나, 영화의 여운을 더하기에 유용한 소설 '듀로탄'
물론 게임을 활용한 OSMU가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생산된 콘텐츠 가운데 어느 하나만 잘못되어도 도미노처럼 IP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고, 분산된 내용이 되려 유저들의 진입 장벽으로 작용할 소지도 있다. 블리자드가 지난 20년간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각종 설정 오류도 대부분 ‘미디어 믹스’ 과정에서 탄생했다. 즉, 매력적인 가능성만큼이나 위험성도 큰 셈이다.
국내 게임업계는 나름의 긴 역사와 규모에 비해 세계적으로 알려진 캐릭터가 존재치 않는다. 후속작이 잘 나오지 않는 온라인게임이 시장의 주류이다 보니 ‘슈퍼마리오’나 ‘록맨’처럼 시리즈 전개를 통한 인기 캐릭터 탄생도 요원하다. 그렇다면 게임 외적인 ‘미디어 믹스’야말로 캐릭터에 깊이를 부여하고 IP의 가치를 드높일 대안이 아닐까?
블리자드는 시네마틱 영상과 그래픽 노블을 통해 싱글 캠페인도 없는 온라인 PvP게임 캐릭터 전원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도록 했고, 20년 전 출시된 게임을 가지고 거대한 판타지 영화를 찍었다. 이러한 성공을 그저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국내에도 재능 있는 창작자가 무수히 많다. 부디 게임업계를 필두로 소설, 애니메이션, 영화 등 문화산업 전반이 함께 나아갈 수 있길 바라 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