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게임광고] 라그나로크 이전에 ‘라그나레크’가 있었다
2019.09.23 18:35 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한국 게임의 성숙기였던 1990년대를 기억하십니까? 잡지에 나온 광고만 봐도 설렜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 '게임챔프'와 'PC챔프', 'PC 파워진', '넷파워' 등으로 여러분과 함께 했던 게임메카가 당시 게임광고를 재조명하는 [90년대 게임광고] 코너를 연재합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90년대 게임 광고의 세계로, 지금 함께 떠나 보시죠
국내에서 ‘라그나로크’ 하면 흔히들 그라비티 MMORPG를 떠올립니다. 이 단어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세계 종말의 날 ‘신들의 숙명’을 뜻하죠. 일반적으로 영문 알파벳 표기를 따라 라그나로크(Ragnarok) 라고 부르지만, 표기법이나 기록에 따라 Ragnarǫk, Ragnarøkkr, Ragnarök 등 다양한 철자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에 따라 한국어 표기도 라그나뢰크, 라그나레크 등 다양하게 불려 왔지만 이명진 원작 만화와 그를 바탕으로 한 MMORPG의 흥행 이후 ‘라그나로크’가 일반적 표기로 쓰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게 옳은 발음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 전까지만 해도 저 많은 표기 중 무엇을 고르느냐가 꽤나 중대 문제였고, 그 결과 다른 철자의 라그나로크 게임도 나온 적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소개할 PC게임 ‘라그나레크’가 그 주인공입니다. 비록 당시에도 별로 빛을 못 보고 훗날에도 라그나로크의 그림자에 묻혀 자취를 감춘 게임이지만, 이 자리를 통해 그 게임을 추억해보도록 합시다.
제우미디어 게임챔프 1995년 11월호에 게재된 ‘라그나레크’ 광고입니다. 영문 철자를 보면 Ragnarøkkr 라고 쓰여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 표기는 아이슬란드 역사학자 스노리 스툴루손이 ‘신 에다’를 집필할 때 잘못 표기한 것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뜻도 ‘신들의 황혼’으로 달라져 버렸는데, 이 표기도 나름대로 널리 퍼진데다 뜻도 왠지 멋져서 꽤나 자주 쓰이는 표현입니다. 한국어로 하면 라그나’뢰’크 정도가 되겠죠. 이 게임은 ‘라그나레크’ 라고 한국어 제목을 정했는데, 이는 후술할 개발사 측의 사정도 어느 정도 반영된 이름입니다.
제작사를 보면 글로디아 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꽤 많은 작품을 냈던 일본 개발사로, ‘바이블 마스터’나 ‘에메랄드 드래곤’, ‘베인 드림’ 시리즈 등이 유명했죠. 이 작품 역시 1994년 PC98로 나온 게임으로, 국내에는 1년 후에 소개됐습니다. 아무래도 일본 개발사다 보니 발음 문제상 게임 제목을 ‘라그나레크’로 정했죠. 참고로 글로디아는 1995년 해체됐지만, ‘에메랄드 드래곤’과 ‘바이블 마스터’, ‘베인 드림’ 등에 참여했던 작곡가 사토 텐페이는 이후에도 ‘라 퓌셀’이나 ‘마계전기 디스가이아’, ‘마녀와 백기병’ 시리즈를 통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광고를 보면 일단 SRPG 장르라는 것이 소개되고, ‘최첨단 전술시스템’, ‘마우스 지원’, ‘방대한 스케일의 스테이지’, 클래스 체인지에 의해 성장하는 130 종류의 전사들, 밤낮 변화와 기상조건 등 다양한 시스템이 소개됩니다. 90년대 중반은 SRPG 장르가 한창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기에, 지금 봐도 이상하지 않을 시스템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는 모습입니다. 게임 배경은 북유럽 신화를 배경으로, 성지 ‘잉그랫실’을 중심으로 한 여섯 왕국에서 펼쳐지는 대량살상 ‘핀배톨’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 것 같습니다.
2달 후인 게임챔프 1996년 1월호 잡지에도 ‘라그나레크’ 광고가 실렸습니다. 기본적인 게임 설명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새로운 스크린샷과 함께 동작환경이 쓰여 있네요. 386 이상의 CPU는 제쳐두더라도, 메모리 ‘2MB’ 이상, 필수조건으로 VGA 카드/마우스 등을 보면 그새 PC 환경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도스 시절 게임이기에 운영체제도 따로 요구사항이 없네요.
오른쪽 아래에는 게임 관련 문의처가 쓰여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SNS나 블로그/홈페이지 주소가 쓰여있어야 할 곳에 080 으로 시작하는 착신자 요금부담 전화 클로버서비스가 적혀 있는가 하면, 하이텔과 천리안에서 접속할 수 있는 고객센터 주소도 들어 있습니다. GO DAOU 인 것을 보니 유통사인 다우기술 주소 같군요. 모르는 분들을 위해 살짝 설명드리면, 대략 PC통신에서 사용 가능한 홈페이지 주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 게임은 당시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유명했지만, 9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SRPG 게임이 나옴에 따라 ‘라그나레크’ 라는 이름은 차츰 잊혀져 갔습니다. 설상가상 개발사인 그라디아가 문을 닫으며 후속작도 나오지 않았고, 2001년 그라비티에서 공개테스트를 시작한 ‘라그나로크 온라인’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비슷한 이름인 이 게임은 더욱 외면받았죠. 이번 기회에 이 비운의 게임을 추억하며 한 번쯤 ‘라그나레크’라는 이름을 되새겨 주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