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성우가 어떤 배역을 맡는지는 게이머들의 관심사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유명 성우가 맡는 배역은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캐릭터일 확률이 높고, 전작에서 열연한 성우가 신작에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경우 전작 캐릭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일부 게임 제작진들은 게이머들의 이런 예측을 아주 맛깔나게 이용해 뒤통수를 때린다
※ [순정남]은 매주 이색적인 테마를 선정하고, 이에 맞는 게임이나 캐릭터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사람의 오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시각이겠지만, 그 다음을 고르라면 단연 청각이 아닐까 싶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기분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고, 같은 상황에서 배경음만 달라져도 순식간에 공포와 코미디로 장르가 바뀐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주얼적 요소만큼 중요한 것이 음향이며, 성우의 목소리 연기는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렇기에 어떤 성우가 어떤 배역을 맡는지는 게이머들의 관심사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유명 성우가 맡는 배역은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캐릭터일 확률이 높고, 전작에서 열연한 성우가 신작에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경우 전작 캐릭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데, 일부 게임 제작진들은 게이머들의 이런 예측을 아주 맛깔나게 이용해 뒤통수를 때린다. 성우 배치를 두고 벌어지는 게이머와의 심리전, 이른바 '성우 트릭'이다. 오늘은 성우 목소리로 게이머들을 낚은 사례들을 한 곳에 모아봤다.
*기사 특성 상 단간론파 시리즈, 영웅전설 시작의 궤적,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 메탈기어 솔리드 5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시길 바랍니다.
TOP 5. 단간론파 1&2, 나에기 마코토와 코마에다 나기토
2010년작 '단간론파 - 희망의 학원과 절망의 고교생 -'은 등장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자연히 '슈퍼 단간론파 2 - 안녕히 절망학원 -'는 출시 전부터 게이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그 중 가장 놀라웠던 캐릭터가 바로 코마에다 나기토였다. 전작 주인공인 나에기 마코토와 동일한 특성인 '초고교급 행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름은 배열을 바꾸면 '나에기 마코토다'가 되는 애너그램이었다. 여기에 코마에다 나기토의 성우는 전작 나에기 마코토와 똑같은 오가타 메구미. 이에 팬들은 "나에기가 흑화해서 돌아왔구나!"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전작 등장인물 중 한 명이 꽤나 파격적 변신을 거쳐 2편에도 등장했기에, 나에기 역시 이런 식으로 돌아온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한 오판이었다. 코마에다는 나에기의 타락 버전이 아니라, 희망에 미쳐버린 전혀 별개의 광기 어린 인물이었다. 일부러 동일 성우까지 기용해 가며 플레이어가 전작 주인공에게 가졌던 무한한 신뢰를 코마에다에게 전이시킨 뒤, 그 신뢰가 산산조각 나는 과정을 통해 절망의 깊이를 더한 것이다. 성우의 목소리를 서사적 암호로 활용해 플레이어의 인지적 방어선을 무너뜨린, 아주 교활하고도 탁월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 얼핏 닮은 듯 안 닮은 것 같은 캐릭터 디자인도 의도한 듯하다 (사진출처: 단간론파 공식 홈페이지)
TOP 4. 궤적 시리즈 - 가면의 기사 C의 정체
니혼 팔콤의 영웅전설 궤적 시리즈는 성우 덕후들이 눈을 부라리고 달려드는 게임으로 유명하다. 특히 '시작의 궤적'에서 등장한 가면 쓴 리더 'C'의 정체를 두고 제작진과 팬들 사이의 치열한 심리전이 벌어졌다. 발표 당시 'C'의 성우는 감춰진 상태였으나, 팬들은 'C'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작의 주요 악역인 루퍼스 알바레아의 성우 오키아유 료타로임을 알아챘다. 하지만 여기서 트릭이 발생한다. 루퍼스는 이미 다른 곳에서 멀쩡히 적 진영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레이어들은 혼란에 빠졌다. '성우가 같으니 루퍼스의 가족인가?' '그냥 평범한 성우 돌려막기인가?'라며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진실은 더 골 때렸다. 알고보니 적 진영의 루퍼스가 가짜였고, 우리가 조종하던 가면 기사 'C'가 참회하고 돌아온 진짜 루퍼스였던 것이다. 제작진은 '유명 성우의 목소리는 곧 캐릭터의 정체'라는 게이머들의 메타적 지식을 역이용해, 뻔히 보이는 단서를 던져주고도 정답을 의심하게 만드는 고난도 낚시를 선보였다.
▲ 2중으로 함정을 판 궤적 성우 트릭 (사진출처: 스팀 공식 페이지 영상 갈무리)
TOP 3.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 - 유리엘 셉팀 7세
서구권 게임에서 유명 배우의 이름값을 가장 화끈하고도 허망하게 소비한 사례를 꼽으라면 단연 엘더스크롤 4: 오블리비언을 꼽을 수 있겠다. 게임을 시작하면 제국 황제의 장중한 내레이션이 흐르는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무려 '스타트렉'의 피카드 함장이자 '엑스맨'의 대머리 교수 '프로페서 X'로 유명한 패트릭 스튜어트다. 이런 거물이 게임 성우로 등장하면, 황제 캐릭터에 대한 기대는 '떡상'할 수밖에 없다. 단순한 배경 지도자에서 한 층 나아가, 게임 내내 나를 이끌어줄 든든한 멘토가 되리라는 기대를 하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하지만 베데스다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비가 없었다. 패트릭 스튜어트의 명연기와 함께 튜토리얼을 진행한 지 고작 20분 만에, 황제는 암살자의 칼날에 쓰러져 허망하게 퇴장한다. 초반 몰입도를 위해 제작비를 쏟아부어 대배우를 기용하고는 곧바로 죽여버림으로써, 제국이 처한 위기 상황을 플레이어의 뇌리에 박아버린 것이다. 어마어마한 출연료를 받았을 것이 분명한 황제의 허망하고 빠른 최후에 게이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교수님, 아니 황제님... 벌써 가시면 어떡합니까 (사진출처: 인게임 영상 갈무리, IMDB)
TOP 2. 메탈기어 솔리드 V: 더 팬텀 페인, 스네이크
코지마 히데오 역시 성우 교체라는 외부적 논란을 게임 내러티브로 승화시키는 변태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시리즈의 상징과도 같았던 빅 보스 미국판 성우 데이비드 헤이터 대신 할리우드 배우 키퍼 서덜랜드를 기용했을 때, 서구권 팬들은 "코지마가 드디어 헐리우드 병에 걸려 근본을 버렸다"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 모든 비난조차 코지마의 거대한 설계 중 일부였다는 사실을 당시엔 아무도 몰랐다.
그런 논란 속에서 게임을 끝까지 플레이한 팬들은, 게임 내내 함께한 '베놈 스네이크'가 사실은 진짜 빅 보스가 아니라, 그의 기억을 이식받은 메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진짜 빅 보스는 게임 속 어딘가에서 원래의 목소리(혹은 다른 목소리)로 존재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목소리가 달라져서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팬들의 불만을 '진짜 스네이크가 아니니까 당연하지'라며 받아친 셈이다. 여기에 '이제부턴 네가 빅 보스다'라며 플레이어에게 건네는 한 마디는, 게이머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코지마식 '팬텀' 트릭의 정점이었다.
▲ 팬들이 내뱉은 불만조차 복선으로 깔아버린 코지마의 치밀함 (사진출처: 메탈 기어 위키)
TOP 1. 단간론파 V3, 아카마츠 카에데
웬만해선 한 기사 내에 같은 시리즈를 두 번 넣지 않는데, 단간론파는 성우 트릭을 너무나도 즐겨 쓰고 잘 써먹은 게임인지라 예외적으로 한 번 더 언급해야겠다. 그것도 무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성우 트릭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게임계에서는 '성우의 이름값이 곧 생존권'이라는 불문율이 있다. 스타 성우를 기용할수록 게임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그만큼 오래 살아남는 캐릭터라는 것이다. '단간론파 V3'는 발매 전부터 시리즈 최초의 여성 주인공인 아카마츠 카에데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특히 성우로 당시 일본 최고의 스타이자 겨울왕국 안나 역 성우까지 맡았던 칸다 사야카를 기용해, 성우 이름값을 통한 영구 생존권을 부여하는 듯 했다.
그러나, 1장이 끝나기도 전에 게이머들의 기대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주인공인 줄 알았던 카에데가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처형당하고, 주인공 자리는 옆에 있던 남학생 사이하라 슈이치로 교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제작진은 스타 성우의 기용을 일종의 '서사적 방패'로 활용해 플레이어를 안심시킨 뒤, 그 방패를 박살 내며 더 큰 충격을 선사했다. 자본주의 논리마저 트릭으로 써먹는 이 시리즈의 악랄함에 박수를 보낸다.
▲ 주인공을 일찍 죽일 때 스타 성우를 쓰는 것만큼 확실한 통수는 없다 (사진출처: 단간론파 V3 PS 스토어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