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쥬라기원시전, 공룡에 판타지는 무리수였다
2018.02.01 18:16 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 독특한 설정으로 주목 받았지만,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쥬라기원시전'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최근 '듀랑고'와 '몬스터 헌터 월드'로 새삼 공룡 게임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런데 이 게임들에 나오는 공룡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실제 고증에 맞춘 공룡이 아니라,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한 가상의 공룡이라는 점이다.
사실 대중적 취향으로 볼 때 공룡이 얼마나 사실적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드래곤이 어떻게 불을 뿜을 수 있는지에 대한 해부학적 구조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적듯, 게임 속 공룡 고증에 의미를 두는 사람도 솔직히 많지는 않다. 대중이 공룡에 원하는 모습은 거대한 크기, 파충류적 외모, 냉혹함과 흉포함을 갖춘, 길들여지지 않는 본성을 지닌 원시괴물이다. 이를 테면 '고질라'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판타지에 치우치는 것도 곤란하다. 자칫 공룡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96년 발매되어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국산 RTS '쥬라기원시전'이다. 이 게임은 초창기에는 공룡 판타지라는 소재를 흥미롭게 다루어 컬트적 인기를 구가했지만, 이내 무리한 판타지 요소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이름만 '쥬라기'일 뿐 실제로는 드래곤과 유니콘이 나오는 흔한 판타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룡 섬에 떨어진 원시인들의 생존과 사투 그린 '쥬라기원시전'
▲ '쥬라기원시전' 스크린샷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1996년 발매된 프랜차이즈 첫 작품 '쥬라기원시전'은 RTS와 RPG를 결합한 시스템도 독특했지만, 설정 면에서도 상당히 주목을 받은 게임이었다. '공룡세계로 간 원시인 부족의 사투'라는 특이한 소재를 다루었던 것이다.
'쥬라기원시전'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빙하기 이전 지구는 끔찍한 자연재해에 휩싸였다. 지진, 번개, 화산폭발 등이 대륙을 휩쓸고, 바다에는 해일과 폭풍이 일었다. 그러던 중 바다에서 한 섬이 나타났고, 몹시도 기묘한 세포분열과 진화 과정을 통해 생명이 탄생했다. 이렇게 나타난 생명은 중생대에 멸종된 공룡이었다.
그러는 사이 대륙에서는 원시인 부족들이 자연재해를 피해 필사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 중 일부는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났는데, 이들이 바로 공룡이 사는 섬에 도착한 여덟 부족이다. 이들은 새로이 찾아낸 섬에 사냥감과 식수가 풍족하며 자연재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했다. 이렇게 섬에 정착한 원시인들은 공룡이 산다는 의미에서 섬 이름을 '쥬라기 섬'이라고 명명한다.
▲ '쥬라기원시전'의 여덟 부족, 대영박물관 유물에서 사진 찍어온 마크가 돋보인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사실 '쥬라기원시전'은 실제로 존재하는 지구를 무대로 했음에도 다소 납득하기 힘든 황당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진지하고 사실적인 설정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차원이동 정도로 받아들이면 듯하다. 어쨌거나 '쥬라기원시전'의 줄거리는 이렇게 여덟 원시인 부족이 환상의 '쥬라기 섬'에 당도하며 시작된다.
섬에 도착한 여덟 부족은 처음에는 별다른 분쟁 없이 각자 터전을 꾸리고 살아간다. 일부 부족은 공룡을 포획해 사육하기도 하고, 어떤 부족은 익룡을 길들여 사냥 매처럼 쓰기도 했다. 심지어 몇 부족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섬에 도착한 후 돌연변이를 일으켜 마법을 쓸 수 있는 종족으로 진화하기도 했다. 이 중 치유마법을 쓸 수 있는 미모의 여성 돌연변이는 '엘프'라 부르며, 파괴적인 마법을 쓰는 악마 같은 모습의 돌연변이는 '워록'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섬에 적응하고 나름대로 세를 확장해나가던 부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대립하게 된다. '쥬라기 섬'은 지옥으로 묘사되는 대륙에 비하면 낙원 같은 곳이었지만, 섬이라는 공간적 한계상 감당할 수 있는 인구 수가 제한되어 있었다. 이에 머릿수를 늘리던 여덟 종족이 서로 섬의 자원을 독차지하고자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게임은 여덟 부족이 처절한 싸움을 벌여 최후의 한 부족만 남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 원시인 부족들은 섬의 자원을 독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게 된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처럼 '쥬라기원시전'은 원시인들이 미지의 섬을 탐험하고 정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게임이었다. 여기서 공룡은 '쥬라기 섬'의 신비하고 위험한 원시 야생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활용됐다. 딱히 고증이 된 것도 아니고, 알고 보면 판타지 색채가 다분했지만,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공룡과 판타지가 적당한 조화를 이룬 이색적인 원시세계가 의외로 잘 묘사됐던 것이다.
이러한 '쥬라기원시전'의 독특한 설정은 게임 자체의 재미와 잘 어우러지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개발사인 트릭소프트는 '쥬라기원시전'만의 특색 있는 분위기를 계속 이끌어가지 못했다. 후속작으로 나온 '쥬라기원시전 2'는 판타지 요소를 과잉 확대했고, 그 결과 전작의 장점이었던 원시 분위기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유니콘, 데몬, 합체공룡까지... 판타지 과잉으로 치달은 '쥬라기원시전 2'
▲ 공룡은 뒷전이고 천사와 비행선이 등장하는 '쥬라기원시전 2'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공룡과 마법이 공존하는 원시 판타지를 무대로 다룬 '쥬라기원시전'이 생각보다 큰 인기를 끌자, 제작사인 트릭소프트는 1998년 '쥬라기원시전 2' 개발 소식을 발표했다. 당시 '쥬라기원시전 2'는 어마어마한 관심을 끌었다. 전작이 다룬 원시인과 공룡이라는 소재가 워낙 독특했기에, 자연스레 후속작품인 '쥬라기원시전 2'에도 시선이 집중된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와 달리, 2001년 발매된 '쥬라기원시전 2'는 전작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공룡이나 원시시대와는 상관 없는 드래곤, 유니콘, 데몬 등이 전면에 등장한 데다, 전작의 핵심 소재였던 공룡과 원시인의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나마 중요하게 등장하는 공룡들은 아예 이족보행 공룡인간들뿐이라 사실상 공룡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물론 전작 '쥬라기원시전'도 그다지 사실적인 설정의 게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원시인이 원시인 같은 모습으로 나오기는 했다. 판타지 요소가 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털가죽을 걸친 채 간석기로 사냥을 하는 등 대체로 우리가 상상하는 원시인 모습 그대로였다. 원시시대에 벌어지는 원시인과 공룡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 철제 무기로 무장한 '나이트', 원시인과는 거리가 있어보이는 모습이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그러나 '쥬라기원시전 2'에 등장한 원시인은 더 이상 원시인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진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말만 원시인이지, 실제 나오는 걸 보면 강철 투구를 쓴 '나이트', 하늘을 나는 글라이더인 '스쿼드론', 심지어 화약무기인 대포 '스카이 블래스터'까지 나온다. 이미 여기서 원시인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전작과 달리 '쥬라기원시전 2'에는 대놓고 판타지인 종족이 갑자기 셋이나 추가됐다. 우선 전작의 돌연변이 초능력 원시인이던 엘프가 아예 독자 종족으로 분화했다. 여기에 뜬금 없이 사탄의 하수인인 데몬 종족과, 이들이 공룡에 저주를 걸어 만든 괴물 티라노스 종족까지 추가된 것이다.
▲ 마법도 쓰고 날개도 달린 '앤젤 엘프', 어딜 봐도 원시인은 아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쥬라기원시전 2'의 엘프 종족은 원시인이나 공룡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돌연변이 원시인이라는 설정은 어디 갔는지, 갑자기 자연의 정령들이 육체를 갖춘 종족이라고 설정이 바뀐 것이다. 예를 들어서 '블루 엘프'는 대지의 요정, '레인저'는 물의 요정이라는 식이다. 게다가 뜬금 없이 어디선가 동맹 종족으로 유니콘, 드래곤, 피닉스 등 환상 속 괴물들까지 끌고 왔다.
데몬 종족은 한술 더 떴다. 기원부터 사탄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사탄이 원시인 사냥꾼 '데카'와 계약을 맺어 사악한 힘을 하사했고, 데몬 종족은 '데카'가 그 힘을 이용해 소환하거나 만들어낸 괴물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설정이 이렇다 보니 데몬 종족은 언데드 '스켈레톤', 반인반수의 마귀 '켈파', 마귀 '데빌' 등 하나 같이 원시인이나 고생물과는 동떨어진 존재들이다.
▲ 도저히 공룡으로 인정할 수 없는 비주얼의 티라노 종족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티라노 종족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다. 이들은 데몬의 저주로 이족보행 괴물이 된 공룡들로, 사실 공룡이라기 보다는 판타지 속 도마뱀인간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들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합체가 가능해서, 여러 마리의 공룡인간이 합체하여 '뮤턴트'라는 마수가 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티라노 종족도 대체 공룡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지 알 수 없어진다.
'쥬라기원시전 2'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사실 세상에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은 모두 사탄의 하수인 '데카'의 소행이며, 이를 보다 못한 원시 신은 '쥬라기 섬'이라는 도피처를 창조했다. 전작 설정과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어쨌거나 '쥬라기원시전' 스토리 이후 모종의 사건을 통해 '데카'가 '쥬라기 섬'에도 발을 딛게 되며, 이 섬까지 혼돈과 죽음으로 가득 채우고자 한다.
또한 '데카'는 자신을 도울 전투노예 종족으로 티라노 종족을 창조한다. 그러나 티라노 종족의 지도자 '아서'는 자신들의 이용가치가 다하면 '데카'에게 버림 받을 것을 깨닫고 도주해 독자적인 진영으로 거듭난다. 이후 원시인, 엘프, 티라노 종족은 '데카'에 맞서는 동시에, 서로 '쥬라기 섬'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게 된다.
▲ '쥬라기적 리얼리즘'과 '환타지 세계관'을 무리하게 통합시켰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이렇듯 '쥬라기원시전 2'는 이들 네 종족의 생존을 건 사투를 내용으로 했다. 공룡이 안 나오는 건 아니지만 중요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정말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신이나 마법 같은 판타지 요소다. 주요 스토리만 봐도 날개 달린 '앤젤 엘프'인 '젤리거'가 데몬 종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보호 마법진을 친다거나, 사탄과 계약한 캐릭터들이 타락한다는 등, 대놓고 하이 판타지스러운 전개로 흘러간다. 전작의 '공룡이 사는 원시세계를 탐험하고 정복하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쥬라기원시전 2'는 발매 당시 게임성으로도 논란이 많았다. 독창적인 요소를 여럿 도입한 전작과 달리 전반적인 게임성은 '스타크래프트'의 모방에 가까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게다가 '쥬라기원시전 2'가 출시된 이듬해인 2002년에는 '워크래프트 3'라는 막강한 적수가 나타나기까지 했다. 거기에 그나마 유일한 차별화 포인트로 남아있던 설정마저 진부한 판타지로 퇴색했다 보니, 안타깝게도 발매 전 큰 기대를 끌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소리 소문 없이 묻힐 수밖에 없었다.
국내 최초 게임 원작 애니메이션 '쥬라기원시전', 비극적인 최후로 끝나다
▲ '쥬라기원시전' 애니메이션 등장 캐릭터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쥬라기원시전 2'는 2002년 스탠드얼론 확장팩 '더 랭커'를 발매하고 e스포츠 대회 유치에도 적극 도전하는 등 나름대로 계속 분투했다. 그러나 개발비 35억을 들여 3년 이상 제작한 것에 비하면 실적은 부진했다. 도저히 '쥬라기원시전'이라는 프랜차이즈를 계속 이어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권을 갖고 있던 배급사 위자드소프트는 '쥬라기원시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프랜차이즈 확장을 위해 국내 최초의 게임 IP 기반 애니메이션, '쥬라기원시전'을 제작한 것이다. 위자드소프트는 이를 통해 '쥬라기원시전'이라는 프랜차이즈가 더욱 널리 전파되길 기대했던 듯하다. 하지만 '쥬라기원시전' 애니메이션화는 기대와 달리 참담한 최후를 맞았다.
애니메이션 '쥬라기원시전'은 제작비만 총 25억 원이 투입됐으며, 국내 방영 전부터 미국과 유럽 수출을 준비하는 등, 상당히 규모 있게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사실 이 애니메이션은 원작 게임과 사실상 아무 상관도 없었다. 무대가 되는 장소부터 '쥬라기 섬'이 아닌 '곤두와'라는 처음 언급되는 대륙이었고, 내용도 흑마술에 걸린 엘프 종족을 구하기 위해 엘프 공주 '니우'가 모험을 떠난다는 코믹 모험담이었다. 원작에서 따온 것은 일부 인물이나 부족의 이름 정도가 전부였다.
▲ MBC 만화마당에 남아있는 '쥬라기원시전' 줄거리 (사진출처: MBC 공식 홈페이지)
애니메이션 '쥬라기원시전'은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총 13편을 방영한 후 종영됐다. 후속작은 개발되지 않았다. 국내 최초 게임 원작 애니메이션이라는 야심 찬 시도였지만, 실제 반향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해외에서의 반응은 확인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위자드소프트는 계속된 부진으로 대표이사가 몇 번이나 바뀌다, 2004년 대표였던 임모씨가 22억 원을 횡령하고 추가로 32억을 불법대출 받은 사실이 드러나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됐다. 이후 위자드소프트는 몰락의 길을 걷다 2005년 광통신업체 레텍커뮤니케이션스에 합병되며 게임업계를 완전히 떠나고 말았다. 위자드소프트가 일체의 권리를 갖고 있던 '쥬라기원시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공룡'이라는 정체성 잃어버린 게임의 최후
▲ '쥬라기원시전 2'의 공룡인간 3단 합체 유닛 '뮤턴트'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쥬라기원시전'의 비극적인 최후에는 물론 여러 요인이 있다. 기대와 달리 '스타크래프트'를 모방하기만 한 구태의연한 게임 시스템, 엉성한 종족간 밸런스, '워크래프트 3'와 겹친 불운한 출시일 등 따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원인 중 하나가 애매모호해진 세계관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프랜차이즈 첫 작품인 '쥬라기원시전'에서 가장 각광받았던 요소는 '공룡'과 '원시인'으로 대표되는 날 것 그대로의 원시 감수성이었다. 길들여지지 않은 태초의 세계에 대한 낭만이 이 게임의 매력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쥬라기원시전 2'와 '더 랭커'는 세계관의 근간을 이루는 '공룡'과 '원시인'을 등한시했다. 그 날 것의 묘미는 버리고,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던 '판타지'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에 따라 본래의 세계관 정체성을 잃고 방향성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독특함과 참신함으로 큰 기대를 받았던 '쥬라기원시전'의 범속한 최후는, 확고한 방향성 없는 IP 개발이 맞는 결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