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위쳐' 상품에는 한 가지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사실 '위쳐' 프랜차이즈는 하나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원작 소설에 기반한 설정과, 거기서 파생된 게임 설정이 별개로 존재한다. 똑같이 '위쳐'라는 상표를 달고 있어도, 소설과 게임 중 무엇을 바탕으로 하는지에 따라 그 내용이 크게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에서 제작하는 '위쳐' 드라마는 소설을 원작으로 삼으며 게임 줄거리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위쳐’ 프랜차이즈는 왜 두 개로 갈라진 걸까? 그리고 두 설정 사이에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드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상세히 알려지지는 않은 ‘위쳐’ 세계관, 그 간단한 역사를 알아보자.
시작은 초라했다,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시작한 '비에즈민'
지금이야 '위쳐'가 전세계적 수준의 명작으로 인정 받지만 그 시작은 오늘날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한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은 폴란드의 한 아마추어 판타지 작가가 실험적으로 써본 단편 판타지 소설에 불과했던 것이다.
'위쳐' 원작자 안제이 사프콥스키는 본래 소설가가 아니었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외국 무역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프콥스키는 젊은 시절부터 무역보다는 판타지 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그 시절 그는 업무상 매해 몬트리올 모피 박람회에 참석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박람회장보다 먼저 서점에 들러 신간 판타지 소설부터 찾았을 정도였다.
이처럼 무역보다 판타지 소설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보니 직장 생활도 오래 할 수 없었다. 끝내 무역에 흥미를 붙일 수 없었던 사프콥스키는 30대 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안정된 회사를 떠났다. 대신 사프콥스키가 시작한 일은 프리랜서 번역가였다. 그는 잦은 출장 덕에 여러 언어를 할 줄 알았고, 이를 활용해 해외 소설을 폴란드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기로 한 것이다.
▲ 아직도 간행 중인 '판타스티카' (사진출처: '판타스티카' 공식 홈페이지)
번역가로 전업한 사프콥스키는 당시 폴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SF 판타지 잡지였던 '판타스티카'와 계약을 맺고 활동했다. 그가 한 일은 주로 영미권 소설을 번역해 잡지에 싣는 일이었다. 그런데 여러 작가의 소설을 번역하던 사프콥스키에게 차츰 새로운 욕망이 싹텄다. 남의 소설을 번역하는 것을 넘어, 아예 자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가 계약을 맺고 있던 '판타스티카'도 그 즈음 공모전을 개최하기 시작했다. 사프콥스키는 이를 계기로 용기를 내 30쪽 분량의 짧은 소설을 하나 집필했다. 이 소설이 바로 '위쳐' 원작이 되는 '비에즈민(Wiedźmin)'이었다. '비에즈민'은 폴란드 민속설화와 동화를 뒤섞은 이야기를 하드보일드한 문체로 풀어낸 작품으로, 폴란드에는 없던 특색의 작품이었다.
당시만 해도 사프콥스키는 이 짧은 소설이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지 알지 못했다. 유로게이머와 인터뷰 중 그는 자신이 공모전에 입상 할 줄은 꿈에도 몰랐고, 오히려 얼마나 심한 비판을 받을까 노심초사했다고 회고했다. 작가 자신조차 '비에즈민'의 가치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발표된 '비에즈민' 내용은 이러했다. 괴물사냥꾼 '게롤트'는 '폴테스트' 왕의 호출을 받는다. 왕성 비지마에 도착한 그는 왕에게서 기이한 의뢰를 받는데, 밤마다 출몰하는 괴물 '스트리가'를 막되 죽이지는 말라는 것이다. 이 황당한 이야기에 '게롤트'는 왕과 신하들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곧 복잡한 사연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사실 괴물의 정체는 왕의 딸, 그것도 근친상간으로 낳은 딸이었다. '폴테스트' 왕은 왕자 시절에 여동생인 공주와 사랑을 나누어 딸을 갖게 됐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왕자와 공주를 크게 흉 보며 저주했고, 그 탓인지 공주는 출산 중 딸과 함께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주 속에 잉태된 딸이 요괴가 되어 일어나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 비극적으로 잃은 딸이기 때문일까? '폴테스트' 왕은 괴물이 된 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 괴물을 죽이는 대신 사람으로 되돌릴 방법을 수소문했고, 결국 '스트리가'가 수탉이 세 번 울 때까지 관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저주에서 해방돼 사람으로 돌아온다는 전설을 들었다. 그때부터 왕은 '스트리가'를 밤새도록 붙잡아둘 사람을 계속해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 게임 '위쳐'에 동영상으로 연출된 '스트리가' 공주와의 싸움 (영상출처: Merrick Simms 유튜브 채널)
마지막에 '게롤트'는 괴물의 특징을 이용한 미끼, 비약, 주술, 은제 무기 등을 활용해 '스트리가'를 잠시 쫓아낸다. 그 후 '게롤트'는 괴물의 관에 자신이 들어가, 문짝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이야기는 '게롤트' 때문에 관으로 돌아가지 못한 '스트리가'는 난동을 부리다 아침 햇살을 맞고 저주가 풀리고, 작지만 사나운 일곱 살 꼬마로 변하며 끝난다.
이 짧은 이야기는 동유럽 '스트리고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소재와 더불어, 사랑과 집착 등 인간사의 미묘한 부분을 조명한 서사로 극찬을 받았다. 제 3회 '판타스티카' 공모전에서 입상한 사프콥스키는 이 여세를 몰아 괴물사냥꾼 '게롤트' 이야기를 다룬 단편을 몇 개 더 집필했고, 이 이야기는 모두 큰 인기를 끌어 두 권의 단편집으로 출간됐다.
하지만 여기까지만 해도 '비에즈민'은 특이한 단편모음집에 불과했다. 구체적인 세계관도 명시된 적 없었고, 각각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연관되기는 해도 기본적으로는 옴니버스에 가까웠다. 이에 작품 활동에 욕심이 있던 사프콥스키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다듬어 장편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는데, 그렇게 완성된 것이 바로 오늘날 '위쳐'의 바탕이 되는 세계관이었다.
▲ '비에즈민' 세계관으로 쓰인 8권의 소설 (사진출처: reddit)
장편으로 다시 쓰인 '비에즈민', 폴란드 국민 판타지 소설 되다
▲ 여러 세계가 일시적으로 연결된 '천구들의 결합' (사진출처: 게임 내 영상 갈무리)
사프콥스키가 완성한 '비에즈민' 세계관은 조금 투박하게 비유하면 '난민들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여러 종족들이 원치 않는 사고로 모여 살게 된 장소로,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차별이 만연한, 일종의 다크 판타지다.
'비에즈민' 세계는 본디 노움과 드워프 같은 땅딸막하고 굳센 종족들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후 시공을 여행하는 힘을 지닌 엘프가 나타나 식민지를 세웠고, 노움과 드워프를 비롯한 토착종족은 산간지역으로 도망가 살게 됐다. 이후 이 세계는 오랫동안 안정된 정세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소설과 게임 시점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이 세계에는 거대한 초자연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것이 게임에서도 중요하게 언급되는 '천구들의 결합'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본래대로라면 서로 다른 시공에 존재해야 할 세계들이 일시적으로 연결됐고, 수많은 이계의 생물들이 '비에즈민'으로 흘러 들었다. 그리고 이 시기 이주해온 종족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간이다.
▲ 인간도 '천구들의 결합' 당시 이주해온 종족 중 하나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비에즈민'에서 인간은 본디 다른 세계에 살던 종족이다. 이들은 마법이 없는 세계에서 나타났고, 금새 토착종족과 괴물들의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 정착하고 태어난 아이들 중 일부는 선천적으로 마법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고, 이들이 첫 세대 마법사로 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시적인 주술로 괴물을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강화인간 '비에즈민'이다. '비에즈민'은 주술과 약초, 시술을 통해 인공적으로 강화한 변이체 전사로, 어린 시절부터 오직 괴물을 사냥하는 법만 배우며 키워진다. 모든 신체개조가 끝난 '비에즈민'은 기본적으로 괴물에 버금가는 힘과 속도를 지니는 것은 물론 간단한 전투용 주술도 사용할 수 있다. 그야말로 전투기계인 셈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에즈민'을 꼭 필요로 하는 동시에 미워한다. 자신들 대신 괴물과 싸워준다는 점에서는 없어서 안될 존재지만, 여러 면에서 인간보다 괴물에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 '비에즈민'은 고양이 눈동자를 지니고 있고, 전원이 불임인 등, 차별의 명분이 될 만한 특징이 많다. '비에즈민'은 마술사를 뜻하는 폴란드어 '비에즈막(wiedźmak)'를 조금 바꿔 만든 단어인데, 그 유래처럼 의혹과 멸시를 받는 셈이다.
주인공 '게롤트'도 '비에즈민'이다. 소설은 '게롤트'가 의뢰를 받고 괴물을 사냥하는 중 겪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에 초점을 맞추었다. 앞서 언급한 '폴테스트' 왕 이야기는 딸의 저주를 풀기 위해 여러 사람을 희생시키는 아버지를 보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과거에 억울하게 학대 받은 여성이 복수를 위해 대량학살을 꾀하거나,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저주를 걸어 곁에 두고 싶어했던 뱀파이어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대부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양가적 내용이다.
사프콥스키는 이렇게 완성된 세계관과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집필했다. 이 연작이 바로 훗날 '더 위쳐 사가'로 불리는 시리즈다. 여기서 '게롤트'는 모종의 인연으로 한 왕국의 왕위계승권을 지닌 공주이자 고대 엘프의 피가 섞인 아이 '시릴라'(시리)를 구하게 된다. 처음에 '게롤트'는 '시릴라'가 단지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인 문제로 쫓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시릴라'는 진정한 문제는 계승권이 아닌 신비한 혈통에 있었다.
사실 '시릴라'의 먼 선조 중에는 시공지배의 힘을 지닌 고위 엘프인 '라라 도렌'이 있었다. '라라 도렌'의 가문은 대대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수는 무척 적었다. 그렇기에 이 가문은 왕족과 혼인해 뛰어난 힘을 지닌 통치자들을 배출해야 했다. 하지만 '라라 도렌'은 엘프의 왕 '오베론' 대신 인간과 혼인했고, 그 막대한 힘도 인간의 핏줄을 타고 흐르게 된 것이다. 이에 엘프들은 물론 마법사들도 '시릴라'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리게 된다.
결국 소설에서 '게롤트'와 '시릴라'는 자신을 이용해 막대한 힘을 얻고자 한 마법사 '빌지포츠'를 제거하고, 엘프 정예부대 '와일드 헌트' 추적도 뿌리친다. 이후 '게롤트'는 마법사 연인 '예니퍼'와 함께 어느 마을에 정착하나, 비인간 종족을 학살하는 폭동에 휘말린 끝에 어느 폭도에게 급소를 찔린다. '예니퍼'도 '게롤트'를 살리기 위해 지나치게 회복마법을 사용하다 반작용으로 사망한다.
▲ 게임 '궨트'에도 등장한 악당 마법사 '빌지포츠' (사진출처: '궨트' 공식 홈페이지)
이에 '시릴라'는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해 다른 세계로 보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보내진 장소가 바로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카멜롯이다. 카멜롯이 발하는 영생의 힘으로 '게롤트'와 '예니퍼'는 부활하여 둘만의 삶을 살게 되고, 이야기는 '시릴라'가 '갤러해드'와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비에즈민'은 동유럽 민속에서 차용해온 독특한 모티프, 그리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선악이 불분명한 인간적인 스토리텔링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비에즈민'은 프리랜서 번역가였던 사프콥스키를 일약 폴란드 최고 작가로 만들어준 것은 물론, 판타지 소설을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던 당시 동구권 풍토까지 크게 바꾸어놓았다.
이렇듯 사프콥스키의 '비에즈민'은 원작부터 큰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다. 이에 폴란드에서는 예전부터 트랜스미디어 시도가 있었다. 1993년에는 '비에즈민' 만화가 나왔고, 2001년과 2002년에는 영화와 드라마가 제작됐다. 그런가 하면 체코어, 헝가리어, 슬로바키아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도 됐으니, 이미 동구권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소설이었던 셈이다.
▲ 폴란드에서는 1990년대에 이미 만화로도 여러 번 출간됐다 (사진출처: ebay)
그러던 2002년, 사프콥스키는 '비에즈민'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소규모 개발업체의 연락을 받았다. 이에 그는 늘 있던 IP 계약이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계약에 응했다. 하지만 이 일은 훗날 사프콥스키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가 됐다. 계약서에 서명할 당시만 해도 사프콥스키는 이들이 만든 게임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그 그림자가 원작 명성을 덮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원작 뛰어넘은 CD 프로젝트 레드의 '위쳐', 청출어람이 문제 되다
▲ '비에즈민'을 원작으로 한 최초의 게임, '위쳐'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사프콥스키를 찾아 '비에즈민'을 게임으로 만들고 싶다고 요청한 개발업체는 바로 CD 프로젝트 레드였다. 폴란드 게임 배급사 CD 프로젝트가 자체 게임 개발을 위해 2002년 설립한 회사로, CEO와 개발진 모두 '비에즈민' 팬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비에즈민' 게임을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반면에 사프콥스키는 게임에 대해 애정이 없는 사람이었다. 계약을 맺을 때 그는 이미 54세였고, 게임은 애들이나 하는 수준 낮은 오락이라는 인식까지 있었다. 다만 팬이라며 찾아온 CD 프로젝트 레드를 박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실 계약 당시 CD 프로젝트 레드는 사프콥스키에게 로열티를 제안했지만, 사프콥스키는 게임이 돈을 벌어봐야 얼마나 받겠냐며 일시금을 요구했다. 후일 사프콥스키는 인터뷰에서 '상당히 많은 돈을 받아 놀랐다'고 했는데, 그 액수가 얼마인지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이 계약으로 '비에즈민'의 세계관, 인물, 줄거리를 활용해 게임을 만드는 것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야기를 써도 좋다고 승인했다.
'비에즈민' 게임을 만들 권리를 얻은 CD 프로젝트 레드는 즉시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들은 곧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CD 프로젝트 레드는 이 게임을 폴란드 내수용이 아닌 전세계를 바라보는 작품으로 기획했고, 해외에서 폴란드어 제목인 '비에즈민'은 너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었다. 해외에서 쉽게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제목이 필요했던 것이다.
▲ '비에즈민' 영화 '더 헥서', CD 프로젝트 레드 이전에 '위쳐'라는 말은 쓰이지 않았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당시 영미권에서 '비에즈민'은 문자 그대로 '주술사'라는 의미의 더 헥서('The Hexer)'로 번역되고 있었다. 그 외에 일부 번역가는 ‘소서러(Sorcerer)’, 혹은 '스펠메이커(Spellmaker)'라고 번역하기도 했지만, 이것들은 모두 CD 프로젝트 레드에게는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고민 끝에 CD 프로젝트 레드는 이 게임에 아예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는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게 붙여진 이름이 바로 ‘위쳐(The Witcher)’였다. 일부는 주술사(witcher)와 사냥꾼(hunter)을 합친 조어라 하지만, 사실 ‘위쳐’가 정확히 어떻게 붙여진 이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게임은 원작 소설의 끝부분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시작했다. 주인공 '게롤트'는 카멜롯에서 부상을 회복하고 깨어나지만, 과거의 기억은 대부분 잃은 상태고 여인 '예니퍼'도 찾을 수 없었다. ‘위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기억을 되찾기 위한 모험에 나선 ‘게롤트’의 이야기를 담았다.
‘위쳐’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게롤트’가 깨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쳐’들의 요새 ‘케어 모헨’은 일단의 광신도들에게 습격을 받는다. 이때 사람을 ‘위쳐’로 개조하는 방법을 기록한 문서가 도난 당하고, 주인공 ‘게롤트’는 이 문서를 회수하기 위해서 ‘테메리아 왕국’ 일대를 여행하게 된다. 이야기의 끝에서 ‘게롤트’는 모든 사건의 주범이 ‘시릴라’와 유사한 시공이동의 힘을 지닌 ‘작크 드 알데스버그’라는 기사단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작크 드 알데스버그’는 ‘시릴라’처럼 고대 엘프의 피를 이은 인물이었다. 그는 선천적으로 지닌 시공의 힘으로 머지 않은 미래에 이 세계에 초자연적인 빙하기가 닥칠 것을 알았고, 그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위쳐’야 말로 빙하기에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인류라고 믿었고, 개조법을 응용해 인류를 진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게롤트’에게 패해 쓰러지고, 그 영혼은 ‘와일드 헌트의 왕’이라는 불가사의한 존재가 나타나 잡아간다.
▲ '위쳐' 줄거리를 요약한 CD 프로젝트 레드 영상 (영상출처: '위쳐' 공식 유튜브 채널)
첫 작품인 ‘위쳐’는 출시 당시 크게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아쉬운 최적화와 잦은 버그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게임 내에서 주인공 ‘게롤트’가 여성 등장인물과 관계를 가질 때마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나체 일러스트 카드도 비판의 대상이 됐다. 성관계 연출과 나체 일러스트를 보상을 제공하는 게임이라는 오명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위쳐’의 깊은 몰입을 주는 상호작용적 서사는 나름대로 주목을 받았다. 모험 중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에 따라 상이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결말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끈 것이다. ‘비에즈민’ 특유의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며, 어떠한 선택을 해도 희생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씁쓸한 이야기 전개도 많은 성인 게이머를 매혹시켰다.
▲ '게롤트'는 이제는 적이 된 옛 동료 '레토'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린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위쳐 2: 왕들의 암살자’는 ‘게롤트’가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게롤트’는 왕국들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는 혼란 속에서, 자신이 ‘와일드 헌트’라는 다른 세계의 엘프들에게 쫓기고 있었던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들은 모종의 이유로 ‘시릴라’를 쫓고 있었으며, 그 수단으로 ‘게롤트’와 ‘예니퍼’를 찾아내 붙잡았던 것이다.
2011년에 출시된 후속작 ‘위쳐 2: 왕들의 암살자’는 전작의 단점을 상당부분 보완한 작품이었다. 불편한 조작방식이 개선됐고, 그래픽은 향상됐으며, 이야기의 깊이와 선택지도 풍부해졌다. 또한 전작에서 다소 불미스러운 화제가 됐던 나체 카드 수집 요소는 제거됐다. 덕분에 ‘위쳐 2: 왕들의 암살자’는 메타크리틱스 기준 88점이라는 높은 점수와 함께 세간의 인정을 받았다. 심지어 폴란드 총리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문 당시 ‘위쳐 2’ 한정판을 외교 선물로 줬을 정도였다.
▲ '위쳐 3: 와일드 헌트'에서는 드디어 소설 속 중심인물 '시릴라'가 등장했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위쳐 3: 와일드 헌터’는 시리즈 대단원의 막을 내린 작품이었다. 여기서는 드디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인물 ‘시릴라’가 등장하고, 그를 쫓던 ‘와일드 헌트’의 실체와 목적이 드러났다. 원작 소설에서처럼 엘프들은 ‘시릴라’를 포획해 뛰어난 힘을 지닌 차세대 엘프들을 낳게 할 작정이었다.
다만 그 이유는 원작과 조금 다르다. 원작에서는 ‘라라 도렌’이 엘프 왕 대신 인간과 혼인한 탓에, 엘프 고대 혈통이 단절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게임에서는 초자연적인 빙하기인 ‘백색 서리’가 문제로 떠올랐다. 엘프들의 중심 문명은 곧 ‘백색 서리’에 의해 얼어붙어 멸망할 위기인데, 그 전에 문명 전체가 다른 세계로 대량으로 이주하기 위해서는 고대 혈통이 꼭 필요했다. ‘시릴라’는 이 계획에서 대규모 공간이동 관문을 여는 도구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게임의 결말은 지금까지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를 '백색 서리'와 '와일드 헌트'의 위험에서 구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인물들이 희생되는지, 그 후 왕국들 사이의 질서는 어떻게 재편성되는지 등은 크게 차이 난다. 다만, 여기서는 직접 플레이 하는 재미를 남겨두기 위해 상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겠다.
▲ 엘프들의 수도 세계 '아엔 엘르' 에서 온 추적대 '와일드 헌트'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CD 프로젝트가 지금까지의 노하우를 집약해 만든 ‘위쳐 3: 와일드 헌트’는 시리즈 ‘완전체’라 할 수 있었다. 2015년 발매된 이 작품은 그 해 최다 GOTY 수상작으로 꼽힌 것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1,000만 장 이상 판매되는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위쳐 3: 와일드 헌트’의 성공은 폴란드에서 국가적으로 떠받들어질 정도였다. 주인공 ‘게롤트’를 모델로 한 우표가 나오는가 하면, CD 프로젝트 레드는 차기작 ‘사이버펑크 2077’ 제작에 정부에게 한화 83억 원 가량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위쳐’라는 포트폴리오 덕분인 셈이었다.
폴란드 소규모 신생 개발업체였던 CD 프로젝트 레드는 ‘위쳐’로 일약 국가 대표기업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위쳐’가 이 정도까지 성공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원작자 사프콥스키도, CD 프로젝트 레드도 말이다. 뒤늦게 이권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임이 원작 인기 훼손했다? 분노한 원작자, 세계관 놓고 CD 프로젝트 레드와 신경전
▲ 게임 일러스트로 장식된 원작 소설, '위쳐' 소설이라 쓰인 부분도 눈에 띈다 (사진출처: 아마존)
‘위쳐 3: 와일드 헌트’ 성공은 다양한 부가 상품의 개발로 이어졌다. 동시에 원작 ‘비에즈민’도 동구권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재조명됐다. 기존에 번역되지 않았던 나라들도 앞다투어 이 소설을 번역 출간하고 싶다고 요청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많은 해외 출판사가 원작 소설 ‘비에즈민’을 마치 게임 ‘위쳐’에서 파생된 작품인 것처럼 광고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어 및 한국어 판본은 ‘비에즈민’을 ‘위쳐’로 번역했다. 이전에 원작자가 영어 번역시 ‘위쳐’ 대신 ‘헥서’라는 이름을 선호했음을 감안하면, 게임에 맞춰 원작 이름을 바꾼 셈이다. 그런가 하면 일부 판본은 아예 게임 일러스트를 소설책 표지로 삼기도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게임 소설로 인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에 사프콥스키는 공식석상에서 자주 노한 모습을 보였다. 2016년 폴란드 SF 판타지 소설 행사 폴콘에서 그는 게임 ‘위쳐’가 얻은 명성은 모두 CD 프로젝트 레드에게 돌아가야 한다면서도, 게임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게임 원작 소설이라고 착각해 질 낮게 보고 사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위쳐’가 결코 원작의 후속작일 수 없으며, 게임 내용은 엄밀히 따지면 비공식적 2차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한 언급을 자주 하기도 했다. 세계관의 정사(正史)는 오직 원작자인 자신만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2017년에는 유로게이머와 인터뷰 중 “내가 만든 이야기와 등장인물이 게임 흥행을 도왔다”며, 게임이 자기 명성을 빌어 성공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 2016년 폴콘에서 게임 '위쳐'에 불만을 토로한 사프콥스키 (사진출처: 폴콘 유튜브 채널 영상 갈무리)
사프콥스키의 불만은 '위쳐' 세계관은 자기 창작물인데 마치 CD 프로젝트 레드 소유물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사프콥스키의 불만과는 별개로, CD 프로젝트 레드는 그들대로 ‘위쳐’ 명성이 자신들에게서 기인했다고 보는 듯하다.
실제로 CD 프로젝트 레드는 ‘위쳐’ 세계관을 자사 핵심 프랜차이즈로 개발하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4년에는 거대 보드게임업체 판타지 플라이트와 계약하여 디지털 보드게임 ‘더 위쳐 어드벤쳐’를 제작하는가 하면, 유명 만화 회사인 다크 홀스 코믹스와 함께 그래픽 노블 및 피규어를 제작하기도 했다. '위쳐' 프랜차이즈를 여러 방면으로 확대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 CD 프로젝트 레드와 다크 홀스 코믹스가 제작한 '위쳐' 그래픽 노블 (사진출처: 다크 홀스 코믹스 공식 홈페이지)
여기에 자극 받은 것일까? 2017년에는 사프콥스키도 행동에 나섰다. 우선 그는 완결됐던 소설을 계속 이어서 쓰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원작 ‘위쳐 사가’에서 이어지는 소설을 추가로 쓰면 소설과 게임은 내용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게임은 소설 6권인 ‘호수의 여인’에서 이어지는 내용인데, 게임 ‘위쳐’와 다른 내용의 7권이 나오면 줄거리가 엇갈리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사프콥스키는 넷플릭스와 계약을 맺고 ‘위쳐’ 드라마 제작에도 나섰다. 이 드라마는 게임이 아닌 원작 소설 바탕에, 사프콥스키 본인이 직접 시나리오 및 연출 자문 역할로 제작진에 합류하여 만들어진다. 소설과 게임의 차이, 그리고 사프콥스키가 CD 프로젝트 레드에게 보이는 반감으로 미루어볼 때, 이 드라마는 어느 정도 게임을 부정하는 내용이 될 수도 있다.
▲ 소설 집필 재개, 원작 기반 드라마까지, 강수를 두고 있는 사프콥스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CD 프로젝트 레드도 이에 지지 않고 있다. 작년에는 ‘사이버펑크 2077’ 관련 인터뷰 시 “게롤트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위쳐 세계관으로 다른 작품을 만들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게다가 최근 CD 프로젝트 레드 한국 전담 팀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위쳐’를 소재로 한 오프라인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CD 프로젝트 레드가 ‘위쳐’ 세계관을 활용한 사업을 앞으로도 계속 활발히 할 것임을 짐작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미국에서 CD 프로젝트 레드의 ‘위쳐’ 상표권 영역이 확대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첫 번째 작품 ‘위쳐’가 막 개발을 시작했던 2002년만 해도 CD 프로젝트 레드의 ‘위쳐’ 상표권은 컴퓨터 및 비디오게임 영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위쳐 2: 왕들의 암살자’가 출시된 후인 2012년부터 만화책, 스티커, 피규어, 의류 등으로 확장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17년에는 장신구, 가방, 지갑, 보드게임, 수집품으로 확장됐다.
이렇듯 원작자 사프콥스키와 CD 프로젝트 레드 사이의 ‘위쳐’ 세계관을 둔 신경전은 계속 진행 중이며, 앞으로 더욱 과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당사자들 사이에 법적인 분쟁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추후 ‘위쳐’ 세계관을 활용해 만든 작품 사이에 카니발라이즈가 발생할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