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9작품 나온 영웅전설 궤적 시리즈, 끝은 멀었다
2020.09.04 14:54 게임메카 이새벽
지난 8월 24일, 팔콤 간판 시리즈인 영웅전설 최신작 ‘시작의 궤적’이 발매됐다. 전통이 느껴지는 안정된 전투 시스템과 적절한 난이도, 아이템 및 서브 스토리를 챙길 수 있는 반복 플레이 요소 등으로 발매 초부터 화제가 되고 있지만, 사실 이 게임의 가장 큰 장점으로 언급되는 요소는 스토리텔링이다. 기존 시리즈에 등장한 50명에 달하는 캐릭터가 총출동해, 전작에서 나왔던 모든 사건들이 연결되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스토리를 밀도 있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존 팬 외에는 별다른 화제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새로 영웅전설 시리즈를 시작하려는 게이머 입장에서는 클라이맥스라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진입장벽으로 다가온다. 그도 그럴 것이, 궤적 시리즈만 해도 역사가 16년이고 나온 타이틀만 아홉 개다. 그 동안 쌓인 캐릭터와 스토리를 모두 알아야 신작 내용을 따라갈 수 있기에 입문자 입장에선 꽤나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이에 이번 주는 영웅전설, 그 중에서도 최근 신작이 출시된 궤적 시리즈의 계보와 줄거리를 정리해보았다. 지면 상 상세한 내용까지 일일이 다룰 수는 없지만, 신작 ‘시작의 궤적’을 접하기에 앞서 어떤 내용들이 진행되었는지 가닥을 잡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장대한 스토리로 시작한 건 아니다, 뿌리는 드래곤 슬레이어
궤적 시리즈는 1984년부터 시작된 영웅전설의 하위 브랜드다. 영웅전설 시리즈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중간에 주요 개발자는 물론 게임 특색도 몇 번에 걸쳐 크게 바뀌었다. 그 탓에 팔콤은 영웅전설을 스토리에 따라 몇 개의 하위 브랜드로 나누었는데, 1~2편을 ‘이셀하사 편’, 3~5편을 ‘가가브 트릴로지’,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 ‘궤적 시리즈’다.
오늘 다룰 메인 주제는 궤적 시리즈 역사지만, 그 계보를 이해하기 위해 모태가 되는 영웅전설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짚고 가자. 영웅전설은 현재 팔콤을 떠난 프로그래머이자 프로듀서 키야 요시오가 기획했다. 본래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던 그는 취미로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다 팔콤에 입사해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라는 일군의 게임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영웅전설이었다.
일본 초창기 ARPG 중 하나로 꼽히는 드래곤 슬레이어는 아케이드 스타일의 쉽고 경쾌한 조작감을 살린 게임이었다. 줄거리는 어느 날 나타나 왕의 왕관을 약탈한 드래곤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발탁된 전사가 모험을 떠난다는 단순한 내용으로, 게임 내용도 통상의 던전크롤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다만 이 게임은 실시간 진행 및 조작성 등 기존의 턴 기반 RPG와 차별화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고, 동시기 발매된 RPG ‘하이드라인’과 더불어 후대 일본 RPG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꼽힌다.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자 고무된 팔콤은 본격적으로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를 개발하게 되는데, 그렇게 나온 게임이 바로 그 유명한 ‘재너두’다. 재너두는 줄거리 측면에선 전작 드래곤 슬레이어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전작의 악당보다 강한 ‘킹 드래곤’이 나타나 왕국의 유물인 네 개의 왕관을 약탈하고, 이를 위해 한 용사가 던전에 파견돼 험난한 모험 끝에 임무를 완수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전작 드래곤 슬레이어보다 볼륨과 자유도를 증대한 재너두는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2005년 팔콤 발표에 따르면 재너두는 발매된 해인 1985년 일본에서 4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당시 일본에 PC가 널리 보급되지도, RPG가 유행하지도 않았던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고무적인 성과였다. 또한 1987년 만화책과 영상물로도 출시되는 등 미디어믹스로 더욱 이름값을 높였다.
드래곤 슬레이어와 제나두의 성공으로 팔콤은 키야 요시오가 기획하는 일군의 RPG 시리즈를 계속 지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임들이 1986년 ‘로맨시아’, 1987년 ‘드래슬레 패밀리’, ‘소서리안’, 그리고 1989년 영웅전설이다. 이 게임들은 시스템이나 줄거리에 있어서는 서로 큰 접점이 없지만, 일단은 같은 프로듀서가 기획했고 동일한 세계관을 무대로 삼는다는 점에서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하나의 시리즈로 묶이곤 했다.
이후로도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는 전략게임 ‘로드 모나크’ 등 전작들과 별 관계가 없는 실험적인 시스템의 게임을 몇 냈으나, 1994년 출시된 ARPG ‘바람의 전설 재너두’를 마지막으로 키야 요시오가 팔콤을 퇴하사며 실질적으로 시리즈 종결 수순을 밟았다. 공식적으로는 1995년 출시된 ‘바람의 전설 재너두 2’가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 마지막 게임이지만, 이 게임은 키야 요시오가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듯 영웅전설의 뿌리인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는 키야 요시오가 제작했을 뿐 매번 시스템과 스토리가 크게 차이 난다는 기묘한 특징이 있었다. 여하튼 이처럼 시대를 풍미한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는 키야 요시오의 퇴사와 함께 막을 내렸지만, 이미 그 시점에 팔콤은 드래곤 슬레이어에서 갈라진 새로운 시리즈를 간판 브랜드로 밀고 있었다. 바로 드래곤 슬레이어 여섯 번째 게임인 영웅전설을 독립시켜 독자적인 시리즈로 만든 것이다.
단독 시리즈로 독립은 했는데… 뭐 종류가 이렇게 많아?
이렇듯 같은 시리즈면서도 매번 출시되는 게임마다 시스템과 스토리가 달랐던 드래곤 슬레이어의 일부로 시작했기 때문일까? 영웅전설은 같은 시리즈 내에 여러 독립된 세계관과 스토리라인이 있고, 심지어 게임 시스템도 달랐다. 앞서 언급했듯 영웅전설 시리즈는 이셀하사, 가가브 트릴로지, 궤적 시리즈까지 총 세 개 하위 시리즈로 갈린다. 각 시리즈는 줄거리는 물론 세계관조차 서로 이어지지 않는 사실상 별개의 내용이다.
첫 번째 ‘영웅전설 이셀하사는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에서 시작했던 게임으로, 후속작 영웅전설 2와 함께 신규 시리즈로 독립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북미에서는 영웅전설 1, 2편을 아예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로 구분하기도 한다. 뒤늦게 신규 시리즈로 묶였을 뿐이지, 1편의 경우 발매 당시에는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 중에서도 영웅전설은 꽤나 차별화되는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횡스크롤이나 슈팅 등 아케이드 게임 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다른 작품들에 비해 보다 전통적인 RPG 구성을 갖췄고,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의 공통점이었다 할 수 있는 실시간 진행이 아닌 ‘드래곤 퀘스트’ 식 턴 기반 전투와 드라마에 중점을 둔 스토리 기반 진행을 채택한 것 등이다.
특이하게도 영웅전설 스토리는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마이트 앤 매직’과 ‘울티마’와 유사한 스토리를 채택했다. 세상에 이변이 일어나고 괴물들이 나타나지만, 사실 이는 과거 멸망한 과학 문명의 유산이 작동해서 벌어진 사태였다는 것이다. 인간 멸종을 꾀하는 악신 ‘아그니쟈’를 쓰러뜨리는 데 필요한 ‘빛의 검’이 실은 배터리로 작동하는 광선검이고, 이 검을 찾는 ‘수정탑’이 실은 옛 아쿠아리움 폐허인 등 자잘한 포스트-포스트 아포칼립스(멸망 이후 과거 문명이 잊힌 시대를 다룬 장르) 요소도 많았다.
‘판타지인 줄 알았는데 실은 SF였던’ 스토리는 당시 일본에서 꽤 신선했고, 이는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팔콤은 1992년 세계관과 스토리를 이은 영웅전설 2를 발매하면서, 아예 영웅전설을 드래곤 슬레이어와 독립된 별개 시리즈로 브랜드화 했다. 여기까지가 이셀하사 시리즈다.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가 그랬듯, 영웅전설 시리즈도 세계관과 스토리를 장기적으로 이어가지는 않았다. 영웅전설 2를 끝으로 이셀하사 시리즈는 막을 내렸고, 팔콤은 영웅전설 시리즈의 색깔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새 하위 브랜드를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1994년 출시된 ‘영웅전설 3: 하얀마녀’로 시작되는 가가브 트릴로지의 시작이었다.
1994년 출시된 영웅전설 3: 하얀마녀로 시작된 가가브 트릴로지는 이셀하사 시리즈와 세계관과 스토리가 전혀 이어지지 않는 별개 작품이었다. 절대로 건널 수 없는 거대한 협곡 ‘가가브’와 산맥으로 분단된 대륙을 배경으로 했는데, 분단된 땅은 각각 티라스일, 엘 필딘, 벨트루나로 각각 3, 4, 5편의 무대가 된다. 가가브가 생겨난 이유, 세 개로 분할된 땅, 서로를 잊고 지내는 세 개 문명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뤄지는데, 이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요한 소재다. 각 게임은 서로 연결했을 때 약간의 접점이 보이고 다른 작품에서 알 수 없었던 내막이 드러나긴 하지만, 스토리는 분단돼 있다.
가가브 트릴로지의 핵심 소재는 운율을 통해 현실을 바꾸는 힘을 지닌 ‘공명마법’을 사용하던 고대인들이 불러온 재앙이다. 공명마법은 사용자의 의지를 반영해 힘을 발휘하지만, 동시에 사용자가 품은 부정적인 감정도 무의식 중에 반영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방출된 부의 힘은 점점 공명하여 뭉치기 시작했고, 이내 물리적인 덩어리가 돼 세상에 재앙을 불러왔다. 그 여파를 무서워한 고대인들은 마법 사용을 금했지만, 몰래 사용되는 마법까지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고대인은 마법적 장치로 부의 덩어리를 이계로 보냈다. 마치 방사능 폐기물을 외계에 방출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부의 덩어리를 이계로 보낼 때 발생한 물리적 반발로 세상에 거대한 상흔이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가가브’였다. 이후 고대인은 세 개의 부족으로 나뉘었고, 과거를 잊은 채 살아가게 됐다. 한편, 이계로 보낸 부의 덩어리를 감시하도록 보낸 고대인 일파는 이계에 정착해 살며 여전히 그 영향에 노출돼 있었고, 이를 피하고자 부의 덩어리를 다시 본래 세계로 보낼 음모를 꾸민다.
사실 이 부의 덩어리가 폭발해 세상을 파멸시킬 위기는 가가브 트릴로지 첫 번째 작품인 영웅전설 3: 하얀마녀에서 이미 해결됐다. 운명적으로 선택된 존재인 ‘하얀마녀’가 자신의 순수한 영혼을 희생하여 부의 기운을 상쇄하는 방법으로 가가브의 세계와 이계 둘 다 구해냈기 때문이다. 다만 게임 내에서는 이러한 배경 설정이 전부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후 발매된 ‘영웅전설 4: 주홍물방울’과 ‘영웅전설 5: 바다의 함가’에 이르러서야 모든 설정이 공개되고 연결되는 형식이었다.
가가브 세계관은 완성도 높고 흡입적인 전개로 많은 팬을 만들었으나, 애초에 ‘셋’이라는 숫자를 테마로 만들어진 이상 모든 소재를 풀어내고도 계속 시리즈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가가브 트릴로지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모든 내막과 주제의식이 드러난 영웅전설 5: 바다의 함가와, 스토리를 다듬고 정리해서 출시한 리메이크 버전 신영웅전설로 완결됐다.
그렇게 두 번째 하부 시리즈인 가가브 트릴로지도 끝맺은 팔콤은 새로운 영웅전설 하부 시리즈가 필요해졌다. 그렇게 2004년 나온 것이 바로 ‘영웅전설 6: 하늘의 궤적’이었다.
이번에는 오래 가네? 16년째 장수 중인 영웅전설 궤적 시리즈
영웅전설 6: 하늘의 궤적은 첫인상부터 전작들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셀하사와 가가브는 별개 세계관이긴 하지만 겉보기에는 중세풍 소드 앤 소서리 판타지를 추구했다. 반면, 영웅전설 6: 하늘의 궤적은 기술적으로 매우 진보한 근대풍 판타지 세계관을 내세웠다. 기차나 비행기가 등장하는 건 기본이고, 엘리베이터나 원거리 통신기기까지 나오니, 전작 팬들 입장에서는 이 낯선 분위기에 쉽게 적응 못하겠다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영웅전설 6: 하늘의 궤적 배경이 되는 제므리아 대륙은 본래 여신으로부터 일곱 개의 마법 유물을 하사 받은 고대 제므리아 문명이 자리했던 곳이다. 이들은 일곱 유물에 따라 일곱 분파로 분할됐고, 각자 맡은 유물을 사용해 세상을 통치했다. 하지만 과거 어느 시점, 일곱 분파는 서로의 유물을 사용하여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세상에 재앙이 일어나 고대 문명은 쇠퇴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한 과학자가 일부 유물의 원리를 파악해 양산에 성공하며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본래의 유물들이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양산된 장비인 ‘도력기’는 한정된 기능만 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력기는 민간에 널리 보급돼 게임 내에서는 이미 현대나 별반 차이 없는 생활이 가능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군사적인 방면으로도 ‘도력기술’이 응용돼, 전투기나 로봇, 무제한 발사가 가능한 ‘도력식 총기’까지 만들어졌다. 특히 군사용 프로토타입 무기 중에는 레이저로 무장한 스텔스 비행선도 등장해 SF 분위기까지 느껴질 정도다.
분위기가 확 바뀐 만큼 스토리라인도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기존 영웅전설 시리즈도 포스트-포스트 아포칼립스 등 흔치 않은 설정을 자주 채택하긴 했지만, 영웅전설 6: 하늘의 궤적은 오컬트 비밀결사가 숨겨진 고대 유물을 손에 넣기 위해 공작과 첩보를 벌이고 주인공이 의도치 않게 사건에 휘말려 그 음모를 저지하게 된다는 펄프 첩보물에 가까운 내용을 다뤘다.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는 양 역시 두 게임으로 나뉘어 출시될 정도로 방대했다.
영웅전설 6: 하늘의 궤적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여신이 하사한 고대 유물을 노리는 비밀결사 우로보로스는, 이계에 숨겨진 고대 유물 ‘오리올’을 확보하기 위해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리벨 왕국과 에레보니아 제국을 이간질한다. 두 국가의 국지전과 첩보전을 이용하여 혼란을 조장하는 데 성공한 우로보로스는 왕국이 옛날부터 지켜온 유물을 탈취해 의식을 치르고, 그 과정에서 주인공 에스텔의 남자친구인 요슈아가 실은 기억조작으로 과거를 잃은 우로보로스 첩자였음이 드러난다.
이렇듯 충격적인 반전과 함께 영웅전설 6: 하늘의 궤적은 스토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이후 부분은 그로부터 2년 뒤인 2006년 출시된 ‘영웅전설 6: 하늘의 궤적 SC(Second Chapter)’에서 이어졌다. 여기서 우로보로스는 의식을 통해 아공간에 봉인돼 있던 고대문명의 공중요새를 불러내고, 그곳 내부로 침투해 여신이 하사한 유물 ‘오리올’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다.
오리올을 얻기 위해 모든 음모를 계획한 우로보로스의 파견간부는 주인공 일행에 의해 제거되고, 그가 세뇌했던 ‘요슈아’도 자유를 찾아 결국 주인공과 이어지는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다만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사망했고, 유물 오리올 또한 주인공 일행이 모르는 사이 우로보로스 요원에 의해 회수된다. 결국 우로보로스 입장에서는 인명손실은 발생했지만 본래 목적이던 유물 확보에는 성공한 셈이다.
이후 영웅전설은 정식 넘버링이 아닌 2010년 출시된 ‘제로의 궤적’과 2011년 출시된 ‘벽의 궤적’으로 이어진다. ‘궤적’이라는 이름을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이 두 게임도 영웅전설 6와 같은 세계관을 무대로 진행된다. 비밀스러운 계략과 공작으로 여신이 하사한 고대 유물 복제품을 확보할 예정이던 우로보로스가 경찰청 특수부대 주인공 일행의 개입으로 방해를 받고, 이를 되찾기 위해 대립하게 되는 양상의 스토리가 이어진 것이다.
다만, 제로의 궤적과 벽의 궤적은 스토리상 미진한 부분을 남겼다. 결말에서 드러나는 바에 따르면 사실 우로보로스는 인공 유물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실은 게임 상 무대이자 제국 내 자치구인 도시 ‘크로스벨’에 혼란을 불러오기 위해서 인공 유물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우로보로스가 그러한 혼란을 일으켜야 했던 이유는 후속작인 ‘영웅전설: 섬의 궤적’에서야 드러났다. 자체적으로는 스토리 완결성을 갖추지 않고, 다음 작품까지 플레이해야 전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구조는 여전했다.
2013년 출시된 섬의 궤적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넘버링이 붙지 않고 ‘궤적’의 이름만 사용하여 작명됐다. 이 게임은 전작 벽의 궤적 시점 직후 다른 지역인 에레보니아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었으며, 여기서 우로보로스가 전작에서 벌인 사건의 의도가 드러난다. 이 게임 역시 하나의 타이틀로 끝나지 않고 2018년 출시되는 ‘영웅전설: 섬의 궤적 4’에 이르기까지 도합 네 개의 연작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스토리가 ‘벽의 궤적’과도 직결돼 쉽게 따라가기 버겁다는 문제가 있었다.
올해 출시된 ‘영웅전설: 시작의 궤적’은 아예 세 명의 주인공이 바뀌어 가며, 다른 장소에서 같은 시간 벌어지는 사건들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크로스 스토리 시스템을 사용했다. 홍보 차원에서도 지금까지 시리즈에서 등장한 캐릭터를 50인 이상 등장시키고, 각 캐릭터별로 개인 시나리오까지 도입했다. 사실 이쯤 되면 시리즈 입문자는 도저히 스토리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최소 아홉 개의 전작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이어지는 스토리이니 말이다.
이렇듯 영웅전설 궤적 시리즈는 근현대적 기술이 활용되는 독특한 판타지 세계관, 전작에 비해 훨씬 밀도 있고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를 장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동시에 스토리가 너무 긴 호흡으로 여러 게임에 걸쳐 진행된 점은 약점이다. 처음부터 시리즈를 플레이 해 온 게이머가 아니라면 스토리 중간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같은 게임을 여러 파트로 분할해 판매하는 특성 상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긴 호흡의 밀도 있는 스토리 내세운 영웅전설 궤적 시리즈, 강점인가 약점인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본디 영웅전설 시리즈는 드래곤 슬레이어 시절부터 짧은 호흡으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판타지 모험 게임이었다. 1, 2편은 던전 크롤링 성격의 간결한 스토리를 택했고, 분위기를 쇄신한 가가브 트릴로지 역시 각각의 게임이 독립적인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대신 전작들은 자체 완결성을 지닌 만큼 세계관과 스토리라인이 자주 바뀌었으며, 이와 같은 전통은 그 뿌리인 드래곤 슬레이어 시리즈도 공유하는 특징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영웅전설 궤적 시리즈는 다소 이질적이다. 스토리가 끊기지 않고 16년 동안 9개 게임에 걸쳐 이어지고 있는 데다, 워낙 스토리상 연계가 깊어서 전작들을 안 해보면 신작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인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좋게 보면 그만큼 몰입해서 즐길 여지가 늘어난 셈이나, 신규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입문하기 힘든 장벽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더 놀라운 점은, 이번에 나온 ‘시작의 궤적’이 궤적 시리즈의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팔콤 측 설명에 따르면 이 게임은 시리즈 완결을 향해 나아가는 다리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즉 클라이맥스로 치달으면서 더욱 이전 게임과의 스토리적 연결성이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오래 즐길 수 있으니 좋아해야 할 지, 아니면 진입장벽이 더 높아진다는 점에 당황해야 할 지… 감상은 플레이어의 몫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