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슨에 데이브가 있다면, 웹젠엔 '르모어'가 있다
2023.11.06 09:23 게임메카 김인호 기자
지난 10월 31일, 인디게임 개발사 블랙앵커 스튜디오에서 만든 르모어: 인페스티드 킹덤(REMORE: INFESTED KINGDOM, 이하 르모어)이 스팀과 에픽스토어에 앞서 해보기로 출시됐다. 장르는 턴제 전략 RPG로, 플레이어는 가상의 중세 땅에서 벌어진 재앙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인 기사와 이방인, 대장장이 등을 조작하며 정해진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 한다.
특히 르모어는 콘텐츠와 게임성이 독특하다는 평가와 함께 지난 2021년 글로벌 인디게임 제작 경진대회(GIGDC)에서 제작 부문 금상을 수상했다. 웹젠은 이런 르모어의 가능성을 보고 지난 3월 퍼블리싱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호불호가 갈리는 턴제 RPG 시장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 르모어가 과연 어떤 게임인지, 블랙앵커 스튜디오 정극민 대표와 이야기를 나눠봤다.
Q. 지난 2020년 부산 인디커넥트 페스티벌(BIC)에서 최초 공개한 이후 3년 만에 앞서 해보기로 출시했다. 소감은?
최선을 다하긴 했지만 첫 시험을 받는 입장이다 보니 많이 긴장된다. 지금은 가능한 한 마음을 비우고 앞서 해보기 취지에 맞게 플레이어 피드백을 주의 깊게 듣고 난 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반영하자라는 목표만 생각하고 있다.
Q. 르모어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직접적인 계기는 어떤 게임을 개발할까 고민하던 와중 2019년에 ‘좀비사이드(Zombicide)’라는 보드게임을 접한 것이 시작이었다. 보통의 턴제 게임들과 달리 정말 끝없이 쏟아지는 좀비들과 소수 생존자들의 대치라는 비대칭성에서 오는 재미, 소음이나 시야 같은 메커니즘을 활용해 여러 가지를 고민해야 하는 요소 등이 신선하다고 느껴졌다.
이후 좀비사이드의 '흑사병'이라는 중세 버전 확장팩을 접하면서 이런 게임을 꼭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마침 팀이 ‘배틀 브라더스(Battle Brothers)’ 같은 중세 배경 게임들을 즐기고 있기도 했고,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처럼 역사 배경의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중세 냉병기로 싸우는 콘셉트가 매력적이라고 느껴졌다. 이런 중세와 턴제 요소들을 잘 살리면 기존 작품들과 다른 강점을 가진 게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개발에 착수했다.
Q. 좀비사이드 외에도 영감을 받은 게임들이 있을까?
플레이어들이 직접 사용하는 무기나 액티브 스킬은 앞서 언급한 ‘배틀 브라더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세 냉병기 전투의 맛을 가장 잘 살린 턴제 게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캐릭터 스킬셋은 배틀 브라더스 같은 형태가 아닌, 엑스컴(X-COM) 시리즈 병과 별 특전 트리에 가까운 방향으로 구성했다.이외에도 적들의 시야에 걸렸을 때 상대가 즉시 반응하는 시스템은 ‘인비저블 주식회사(Invisible Inc)’에서, 적을 밀고 당기는 방식의 전장 조작 요소는 ‘인투 더 브리치(Into the Breach)’에서 영향을 받았다. 더 열거하자면 끝이 없으니, 최대한 넓은 시야에서 유사 장르 게임의 장점들을 잘 엮으려 노력했다고 봐주시면 될 것 같다.
Q. 그렇다면 르모어만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중세 아포칼립스 상황에 던져진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고, 이를 위해 3가지 요소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첫 번째는 맵을 직접 탐사하고 운영하는 부분이다. 유사 장르 게임들이 보통 전투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르모어는 가려진 맵을 직접 수색해가며 음식이나 무기, 제작 재료 등을 파밍하는 시간이 많다. 이 과정에서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미리 유리한 위치를 찾아 놓거나, 아예 전투를 회피하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테이지를 공략할 수 있다.두 번째는 위협을 체감하는 부분이다. 조작 캐릭터는 3명이지만, 적은 첫 스테이지부터 4~5명 가량 몰려든다. 또한 플레이어 턴임에도 불구하고 달라 붙는 점이나, HP와 공격력이 상당히 강력한 점에서 아포칼립스 세계관다운 위협을 느낄 수 있다.마지막 세 번째는 다양하고 강력한 해결 수단이다. 앞서 말한 위협만 있으면 게임으로서 가치가 없으니, 자신의 턴에 여러 번 공격을 가할 수 있는 행동력과 자유로운 무기 교체 시스템 등을 통해 성취감 있는 극복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Q. 전략 RPG에서 따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까?
아무래도 '전략’과 ‘전술’ 요소가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추상적인 단어들인데, 크게 3가지를 통해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내가 상대할 적과 해결 수단이 명확한 강점과 약점을 지녀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양한 선택지 제공과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 세 번째는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르모어에서는 자폭 특성을 지닌 ‘블리스터’라는 변종이나 자유롭게 사용 가능한 14종 이상 무기, 고유 특성 등을 통해 전략·전술 요소를 담았다.
Q. 캐릭터 디자인 과정에서는 어떤 부분들을 주로 신경 썼는지?
르모어는 캐릭터 스프라이트 크기가 32x32 픽셀 사이즈로 굉장히 작은 편이다. 이에 해당 규격 하에서도 '편력기사', '민병대' 같은 캐릭터의 서사적 특징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또한 캐릭터가 모든 무기를 장착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해 움직이거나 공격할 때 애니메이션이 어색하지 않도록 주의했고, 피격 시 혹은 빈사 상태에 빠졌을 때는 캐릭터 표정이 바뀌어 플레이어가 전투에 보다 몰입할 수 있도록 설정했다.특히 적인 '변종'의 경우 인간과 곤충이 결합된 크리쳐라는 소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다양한 레퍼런스를 탐색했다. 사망하면 소화액이 쏟아지는 부분이나 움직임이 날렵하고 공격을 받으면 도망간다는 특징들이 배경과 잘 어우러지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Q. 3개 난이도로 구성됐는데, 어떤 방법으로 난이도를 조절했는지?
먼저 게임의 난이도가 높은 것은 의도된 부분이다. ‘어려워서 힘들다’보다는 ‘시시하다’라고 느껴지는 것이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나에게 주어진 수단을 잘 살펴보면 충분히 해결할 수단이 있는 상황을 만들고, 이런 상황을 극복했을 때 느껴지는 성취감을 게임의 핵심으로 봤다.이에 개발 과정에서도 난이도 자체를 직접 낮추는 것 보다는, 우리가 준비한 해결 수단을 플레이어가 왜 활용하지 못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봤다. 시작 무기 배치를 바꾼 것이나, 가이드의 추가 등은 이런 이유에서 적용된 변경사항이다. 이외에도 게임이 어렵다고 느껴지게 만드는 불필요한 요소들은 최대한 제거하거나 수정했다.앞서 해보기 버전 비공개 테스트에서는 가장 낮은 난이도 '복수'가 약 4시간, 기본 난이도 '고행'이 약 5시간 30분 정도에 최종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높은 난이도 '절망'의 경우 고행에서 게임을 익힌 분들은 대체로 비슷한 시간이 걸렸지만, 첫 회차 플레이로 선택한 분들은 거의 8~10시간 이상 걸렸다.
Q. 지난 6월 스팀 넥스트 페스트에도 참가했었다. 얻은 성과나 개선된 부분이 있다면 설명 부탁드린다
다행히도 반응이 좋아서 행사 당시 RPG 카테고리에서 접속자 수 8위를 기록하는 등 성과를 얻었다. 위시리스트(찜하기) 숫자도 큰 폭으로 늘었고, 디스코드 채널에서도 게임에 대한 질문과 피드백이 활발하게 오가는 등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이때 앞서 해보기 출시를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그리고 얻은 피드백을 통해 편의성 부분에 많은 개선사항을 적용했다. 먼저 잦은 무기 교체가 재미있긴 하지만 자주 인벤토리를 열어야 해 불편하다는 피드백이 있어 무기 교체 퀵슬롯 UI를 추가했다. 또한 '갈고리'나 '방어벽' 같은 도구를 보다 쉽고 자주 활용할 수 있도록 사용 횟수를 대폭 늘리거나, 스테이지가 끝난 뒤 자동으로 충전되는 '충전형 도구'로 교체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특정 플레이가 강제된다고 느끼지 않도록 ‘추적 스폰’, ‘돌멩이’ 등 별도 시스템을 추가했다.
Q. 단독 출시하지 않고 퍼블리셔와 협업한 이유가 궁금하다
사실 자금 때문에 이미 2021년 정도부터 단독 개발로 출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와중 '스컬(Skul)' 같은 작품의 성공으로 스팀 플랫폼 타깃의 인디게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BIC나 GIGDC 등을 통해 많은 퍼블리셔 분들께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웹젠은 대표님께서 직접 만나자고 말씀을 주신 유일한 퍼블리셔였으며, 국내뿐 아닌 해외 게이머를 대상으로도 ‘재미’가 본질인 PC·콘솔게임을 서비스하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느껴 협업하게 됐다.
Q. 개발이나 BM 구조에서 웹젠이 관여한 부분은 없었나?
개발 부분에서는 100%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오히려 계약 이후에도 한 번 더 방향성을 크게 틀면서 목표했던 일정에서 거의 1년 가까이 미뤄졌는데, 이 부분도 흔쾌히 이해해줬다. BM에 대해서는 애초에 스팀 출시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방향성이 다를 일이 없었고, 플랫폼 확장이나 가격 결정 등 사업적인 영역에 대해서도 개발팀 의견을 많이 묻고 정보를 공유해주고 있다.
Q. PC로만 출시했는데 추후 모바일 등 플랫폼 확장 계획도 있는지?
저희가 익숙하기도 하고, 하드코어 성격의 인디게임들은 보통 스팀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먼저 PC로 출시했다. 장기적으로는 게임패드와 스팀덱 호환을 지원하면서 스위치 버전을 출시하거나, 아이패드 혹은 모바일 페이드 앱(Paid App)으로도 확장할 계획이다. 물론 당장은 스팀에서 콘텐츠 자체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주력할 생각이다.
Q. 마지막으로 르모어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린다
'비포 더 던'으로 최초 공개했던 시절부터 기대와 응원을 보내 주셨던 분들께 깊은 감사와 함께,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시게 만든 것에 대한 사과 말씀을 드린다. 또한 스팀 넥스트 페스트에서 과분한 칭찬과 세부적인 피드백으로 큰 도움을 주셨던 분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오랜 시간 동안 개발한 만큼 적어도 ‘플레이어로서 스스로 즐기고 싶은 게임을 만들자’라는 목표에 부끄럽지 않은 콘텐츠를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턴제 전술 장르 마니아 분들은 물론이고, 유사 게임 경험이 많지 않더라도 도전적인 난이도에 거부감이 없다면 쉽게 맛보기 힘든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르모어 앞서 해보기 출시에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완성도 높은 정식 버전으로 다시 한번 찾아 뵐 것을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