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言] 유럽 역사 읽는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
2024.10.19 10:00 게임메카 김형종 기자
지난 8월 열린 부산인디게임페스티벌(이하 BIC)에서 다소 독특한 게임을 만났다. 이름은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The Fire Nobody Started)’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역사를 포인트 앤 클릭으로 플레이하며, 대사를 통해 감상하는 게임이다.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대사와 개성 있는 일러스트가 인상적이었다.
이후 itch.io에 수록된 체험판을 플레이해 본 뒤, BIC에는 없었던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스테이지에서 많이 감명했다. 전쟁 속 무너진 인간성을 독특한 아트와 절제된 대사로 묘사했고, 이전 스테이지와도 연결되어 있어 놀랐다. 이에 국내에서는 흔하지 않은 형태의 게임에 궁금증이 일었고, 이 작품을 개발한 아로코트 김민혜 개발자(이하 김 개발자)와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기차에 올라 서양 역사를 체험하는 어드벤처게임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는 기차에 올라 칸을 이동하며 승객들의 이야기를 듣는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 게임이다. 기차는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과 ‘산업 혁명’의 기술 발전을 상징한다. 김 개발자는 ‘세계사와 기차라는 테마가 잘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해 활용했다”라며, “플레이어의 목적지는 1번 칸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시작하며 만나는 칸 영국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자 계층을 상징하는 인물들과 함께 한다. 다음 칸으로 안내하는 핵심 캐릭터는 붉은 색으로 강조되며, 포인트 앤 클릭으로 필요한 물건을 전달하는 퍼즐을 푼 후에 대화 가능하다. 주변 인물과는 꼭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지만, 이야기를 통해 시대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게임은 서양, 특히 영국 역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차 첫 칸은 산업혁명 태동기를 다루며, 이후에는 식민지 개척 후기와 빅토리아 시대, 모더니즘 시대,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칸을 넘어갈수록 더 미래로 이동하며, 캐릭터와 배경 화풍과 대사도 시대에 맞춰 변화한다. 이야기와 그림을 중심으로 역사를 읽어나가는 느낌이다.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 그 제목에 담긴 의미
김 개발자는 사실상 홀로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를 개발 중이다. 본래 소설이나 이야기를 읽는 것을 좋아했고, 특히 국내 SF 소설에 관심이 많았다. 아울러 초등학교 때부터 글을 쓰고 싶어했고, 이후 ‘마녀의 집’이나 ‘이브’와 같은 소위 ‘쯔꾸르게임’을 플레이하며 게임 기획도 꿈꿨다. 그간 여러 게임을 구상했고, 실제로 개발된 첫 게임이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다.
게임 이름은 빌리 조엘의 노래 ‘위 디든트 스타티드 더 파이어’에서 따왔다. 이 노래는 현대 세계사를 간단한 단어를 나열해 묘사했고, 그 과정에서 ‘불을 지핀 사람’과 ‘불에 맞서 싸운 사람’을 나눠 시대적 책임과 투쟁을 표현했다. 김 개발자는 게임 제작에 많은 도움을 준 친구가 기획을 보며 이 노래를 떠올려 알려준 것에 영감을 받아 게임 이름을 지었다.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도 변화하지 않는 시대적 사건(불꽃)과, 이 흐름에 맞서는 투쟁과 변화를 동시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 김 개발자는 “전쟁은 계속되고, 인류가 안고 있는 불길도 꺼지지 않고 지속된다”라며, “변화하지 않는 불꽃, 그리고 그 불꽃과 맞서는 사람들을 게임으로 다루고 싶었다”고 전했다.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를 통해 궁극적으로 전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질문'이다. 김 개발자는 “코로나 19나 지속되는 전쟁으로 세상에 대한 부조리함이 보였고, 개인이 삶을 헌신해도 이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라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라며, “게임을 통해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고, 각자 삶에서 얻은 해답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역사도 미술도 철학도
삶에 대한 고민에서 탄생한 게임인 만큼, 짧은 대사에 여러 역사와 철학에 대한 요소를 담았다. 초기 산업혁명 시대는 영화 ‘모던 타임즈’가 떠오르는 대사들이 다수 등장한다. 쉴 때도 기계음이 반복되거나, 기계가 도입되어 직업을 잃었다는 인물 등이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다음 기차칸에서는 상류층이 하류층을 비난하거나, 금광 채굴을 선조들의 땅이라는 이유로 방해하는 원주민에 대한 한탄이 이어지며 자본주의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게임은 전반적으로 서양 역사와 철학 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어야 이해하기 쉽도록 구성됐다. 김 개발자는 “자신의 주관과 가치관을 확립했거나, 확립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게임”이라며, “다소 어려울 수는 있지만, 게임 속 정보를 탐구하는 것 역시 재미의 일부다”라고 전했다. 이에 어린아이에게는 추천하지 않으며, 해설서나 설명을 따로 만들 계획도 없다고 덧붙였다.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적인 소양이 있을수록 게임에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첫 기차칸 ‘성냥팔이 소녀’는, 당시 영국의 비참한 아동노동과 성냥 공장에서 일하다 백린 중독으로 얼굴이 무너진 소녀들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알았을 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또 일부 대사는 아일랜드 민요, 추모시 ‘플랜더스 들판에는’, 미국 원주민 타탕카 이요타케(시팅 불)의 연설 등 여러 작품을 오마주했다.
기차칸에 등장하는 캐릭터 디자인도 당대에 유행했던 예술사조나 상징물에 따라 변화한다. 우선 캐릭터 얼굴은 시대상과 대사를 상징하는 사물로 표현된다.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 사제는 십자가, 군인은 기관총으로 묘사되는 식이다. 이어서 빅토리아 시대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풍을 따라 황금빛이 넘치며, 모더니즘 시대는 입체주의(큐비즘) 등을 적극 활용했다. 이를 통해 당대 시대를 보여줌과 동시에, 지적 충족감도 전달한다.
여러 어려움을 이겨내고 완성에 가까워졌다
김 개발자는 게임을 혼자 개발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다행히 주변에 게임 개발을 적극 도와준 1인의 친구가 있었지만, 구상부터 완성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게임 개발을 전문적으로 배운 게 아니기에 여러 부분에서 난항에 부딪쳤다.
원하는 대로 게임을 개발하는 부분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게임 초기 구상은 퍼즐 장르였고, 시대에 맞는 보드게임을 중심으로 기획했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시대에는 귀족적인 체스를, 대공황 시대는 보드게임 '스크래블'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실력에 한계를 느껴 포기했고, 그 흔적은 빅토리아 시대 플레이에 일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전반적인 아트를 그려내는 것이었다. 1인 개발인데다 예술 전공자가 아니었던 만큼, 각종 예술사조에 대한 사전지식부터 공부해야 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찾으면서 간신히 각종 캐릭터와 배경을 그릴 수 있었다. 김 개발자는 이런 오랜 노력을 토대로 캐릭터 대부분을 직접 그려 완성했다는 부분에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더 파이어 노바디 스타티드는 현재 엔드 스크롤 및 번역과 폴리싱(다듬기) 작업을 진행 중이다. 오는 11월 중순을 목표로 개발 중이며, 유럽 역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만큼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러시아어도 지원할 예정이다. 만약 게임이 인기를 얻는다면 모바일 버전도 고려하고 있다.
김 개발자는 “특히 대사를 신경써 개발한 만큼 텍스트를 열심히 읽어주시길 바란다”라며, “한국에서 주류 게임으로 보기는 어렵고 주제도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재미있게 플레이해주시면 좋겠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