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 장르' 중세 공성전, 워헤이븐의 대중화 전략 통할까?
2023.08.28 10:49게임메카 류종화 기자
비교적 최근 정립된 세부 장르 중 하나로, 중세 공성전이라는 분류가 있다. 주로 갑옷과 냉병기 기반으로 처절하고 사실적인 전투를 구현했으며, 성이나 지역 등을 점령하거나 파괴하는 측과 지키는 측으로 나뉘어 PvP 혹은 RvR 전투를 벌이는 장르다. 하프 라이프 2 모드 '에이지 오브 시벌리'를 통해 인기를 끌기 시작해 시벌리: 이디블 워페어, 모드하우, 시벌리 2 등 다양한 독립형 게임들이 나오며 신흥 장르로서 자리매김 했다.
이들이 정립한 기존 중세 공성전 장르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다. ▲대전격투게임을 연상시키는 심리전 위주 근접전 공방 ▲TPS나 FPS식 조준과 무빙 ▲전략 시뮬레이션이나 부대 단위 전투에서 보여지는 전략과 전술이다. 쉽게 대전격투와 슈팅, 전략 게임의 요소라고 칭하겠다. 초창기 중세 공성전 게임은 이들의 비율을 약 4 대 3 대 3 정도로 맞췄고, 이는 모드하우나 시벌리 2에서도 이어졌다.
여기서 문제는 셋 다 결코 진입장벽이 낮지 않은 요소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대전격투적 요소와 슈팅 요소의 경우 초보와 숙련자의 격차가 매우 큰 데다, 둘 중 하나라도 익숙하지 않다면 게임을 배우기에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기에 사실적인 근접 전투를 추구하느라 전반적인 움직임 속도가 묵직하고 비교적 느린 편이었다. 결국 시벌리와 모드하우 등 초기 중세 공성전 게임들은 저 요소들을 모두 좋아하는 교집합 유저거나, 혹은 '중세 떼쟁'에 로망을 품은 소수 유저들만이 깊게 즐기는 고인물 장르 취급을 받았다.
이후 등장한 중세 공성전 장르 게임들은 위 요소들의 비율을 조절함으로써 게임의 개성을 나타냈다. 시벌리 이후 등장한 포 아너는 대전격투 비중을 높이고 전략 비중을 확 낮췄다. 컨커러스 블레이드의 경우 전략의 비율을 높이고 대전격투 비중을 낮췄다. 가장 최신작인 워랜더의 경우 슈팅과 전략 비중을 높였다. 결국 중세 공성전이라는 장르의 발전은 위 세 요소의 조합이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그 결과는 중세 공성전이라기 보다는 제 3의 무언가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포 아너는 대전격투를 메인에 내세우고 있으며, 컨커러스 블레이드는 AOS와 같은 전략 장르로 분류된다.
여기서 조금 다른 방법으로 장르적 발전을 꾀한 워헤이븐이 9월 21일 앞서 해보기로 출격한다. 수 차례의 테스트와 피드백을 거쳐, 기존 요소들의 칵테일이 아닌 새로운 요소를 도입해 중세 공성전 2.0에 도전하는 모습이다.
국산 게임 중 최초로 중세 공성전 장르에 도전한 워헤이븐은 마비노기 영웅전 개발자로 유명한 이은석의 야심작이다. 프로젝트 HP라는 이름으로 처음 공개됐을 때만 해도 킬스트릭을 통한 영웅 변신 시스템을 제외하면 기본 플레이는 앞서 언급한 초창기 중세 공성전 게임들과 거의 완벽히 똑같았다. 그 말인즉슨 기존 게임들의 약점까지도 그대로 가져왔다는 얘기다. 실제로 테스트 당시 대전격투와 슈팅, 전략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모두 좋아하는 사람들은 금방 적응해 즐겁게 뛰놀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려워하고 정신없어 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후 두 차례 테스트를 거쳐 워헤이븐이라는 정식 명칭을 달면서 게임은 꽤 많이 부분이 바뀌었다. 그 과정을 지켜본 입장에서 평하자면, 해당 장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개발진과 이은석 디렉터의 고민이 절로 느껴졌다. 그 중 하나가 대전격투-슈팅-전략으로 대표되던 기본 플레이의 혁신이다.
먼저 공방에 있어 슈팅과 대전격투적 요소를 확 낮췄다. 슈팅의 경우 마우스 조작의 중요도를 소폭 줄이고, 원거리 클래스인 궁수를 없앤다는 특단의 조치를 가했다. 대전격투에서는 스테미너 관리 시스템을 과감히 없앴고, 공격 방향이나 타이밍을 보고 방어나 반격 회피를 하는 공방 시스템을 근본부터 뜯어고쳤다. 그 빈 자리에 마비노기 영웅전 등에서 얻은 노하우를 반영한 액션 RPG 시스템을 추가했다. 단축키를 통해 범위나 타겟팅형 스킬을 쓰고, 기술 사용 타이밍과 쿨타임이 핵심 요소로 작용하고, 무빙과 위치 장악의 중요성이 강조된 전투 말이다.
기존 중세 공성전 장르들을 즐겨 오던 '고인물' 기자는, 워헤이븐에 적용된 액션 RPG 시스템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상당히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내가 좋아했던 하드코어 시스템들이 상당히 삭제됐고, 너무 가벼운 액션으로 대체됐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나만 꿀잼인) 궁수 클래스가 삭제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기자는 굉장히 보수적인 중세 공성전 선비의 입장에서 '으~디 근본없는 요소를 끌고 와서 행패냐!' 라는 심정이었다. 플레이트 갑옷을 입고 수 미터씩 점프하는 모습에서는 '아이고~ 현실성 다 말아먹네!' 라는 한숨이 나왔고, 휘두르던 무기가 벽에 충돌해 막히는 등의 사실적 시스템이 삭제된 장면에서는 '대체 왜 너프를!'이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다만, 게임을 좀 더 플레이하며 주변 사람들이 반응을 보니 익숙한 시스템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이 확실히 보였다. 게임성이 라이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정통 중세 공성전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깊이를 추구한 것이 드러난다. 어느 정도는 3인칭 탑뷰 AOS와도 비슷하고, 액션 MMORPG의 결투장 느낌도 난다. 그 과정에서 타격감을 강화하기 위해 조금 비현실적 액션들이 늘어난 점은 아쉽지만, 중세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닌 데다 조선풍이나 현대전 같은 갑옷들도 들어간 게임이니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다.
과거의 프로젝트 HP가 대전격투와 슈팅, 전략전술의 비율이 1 대 1 대 1 정도였다면, 지금의 워헤이븐은 대전격투 0.5, 액션RPG 3.5, 슈팅 2, 전략전술 4로 이루어졌다. 전략전술의 비중이 꽤 올랐는데, 분대 단위 협동과 지점 플레이를 강화하고 공식 시스템화 한 점은 확실히 눈여겨 볼 만하다. 최근 몇 년새 디스코드 등을 통한 음성채팅이 급격히 대중화 됐기에, 이러한 경향도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로 인해 개인적 역량이 꽤 크게 작용했던 기존 중세 공성전 게임보다 좀 더 전술과 전략 비중이 늘어나고 컨트롤적 진입장벽이 낮아졌다는 차이가 느껴진다.
HP 첫 공개 시점부터 앞서 해보기를 준비 중인 지금까지, 장르적 발전을 위한 시도들이 계속해서 눈에 보이고 있다. 초반 모습을 보고 일부는 ’시벌리에 변신 첨가한 게임‘ 정도로 평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군가에겐 익숙해서 재밌고, 누군가에겐 낯설어서 불편할 수 있는 현재의 모습은 분명 장르적 깊이와 대중성을 놓고 고민한 결과물이다. 얼핏 진입장벽을 낮춰 모험 대신 안정을 찾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워헤이븐이 걸어가는 길 자체가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진짜 모험이기도 하다.
과연 워헤이븐은 고인물 장르였던 중세 공성전을 대중화 시킬 수 있을까? 이것이 국내와 해외 등지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9월 21일로 예정돼 있는 앞서 해보기에서 확인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