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행] 외계인을 막기 위해 괴물이 된 인간, 엑스컴
2017.09.07 20:15 게임메카 이새벽 기자
▲ '엑스컴'에서는 인간도 외계인을 해부한다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저서 ‘선악을 넘어서’에서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사악한 것을 너무도 증오하다 보면 그 자신도 사악해질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딱 맞는 게임이 있다.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 침략자를 물리치는 턴 기반 전략게임 ‘엑스컴’ 시리즈다.
‘엑스컴’은 인간을 납치해 생체실험을 일삼는 외계인 침략자에 맞선 특수부대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말만 들으면 정의롭게만 느껴지는 특수부대다. 그런데 직접 플레이를 해보면 이들이 하는 짓은 거의 외계인 뺨치는 수준이다. 인간도 외계인을 생포해서 고문, 해부, 생체실험 하는 것은 기본이고, 나중에는 아예 외계인 기술을 모방해 비인도적 무기를 제작하기까지 한다. 로봇 병기에 태우기 위해 멀쩡한 아군 팔다리를 절단시킬 정도다.
이처럼 ‘엑스컴’은 외계인 침략자에 맞서 인류 지킨다는 숭고한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그 실상은 상당히 섬뜩하다. 외계인과의 싸움이 너무 길고 처절했기 때문일까? ‘엑스컴’의 인간들은 공포영화 속 미치광이들이 할 법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벌인다. 그들 자신이 외계인이라도 된 듯 말이다.
외계와의 전쟁, 인간을 바꿔놓다
▲ 외계인에게 피의 복수를 선사하는 게임 '엑스컴: UFO 디펜스'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엑스컴 시리즈는 1994년 출시된 첫 번째 작품 ‘엑스컴: UFO 디펜스(X-COM: UFO Defense; 유럽 출시명 UFO: Enemy Unknown)’부터 무서운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용은 이러하다. 1999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은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납치해 끔찍한 생체실험을 벌인다. 처음에 납치는 은밀히 진행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노골적으로 자행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한 도시전체를 대상으로 한 전면적인 공습까지 벌였다.
외계인의 침공 목적은 ‘지구 식민지화’였다. 외계인 침략군단은 여러 종족으로 구성됐는데, 그 중 일부는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예를 들어 ‘섹토이드’라는 외계인은 “인간과 섹토이드의 잡종을 만들기 위해 인간을 납치, 유전물질을 추출한다”는 설정이 있었다. 유전자를 결합해 더욱 뛰어난 종족으로 거듭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은 인간 여성에게 인간과 외계인의 혼종 태아를 착상시키는 실험까지 진행했다.
▲ 외계인 침략자들의 비열해 보이는 모습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이렇게 사람이 떼로 납치 당하는데 가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으므로, 각국 정상은 외계인에 맞서기 위한 합동 ‘외계 전투 부대(extraterrestrial combat unit)’, 약칭 ‘엑스컴’을 창단한다. 게임은 ‘엑스컴’ 사령관인 플레이어가 지구 전역을 무대로 부대를 지휘, 외계인과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엑스컴’이 외계인들에 맞서는 방법이 아주 볼 만하다. 바로 외계인 기술을 배워 외계인을 상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외계인이 인간을 납치해 실험하는 것처럼 ‘엑스컴’도 외계인을 붙잡아 온갖 실험을 벌인다. 외계 무기 분해를 통한 기술분석은 기본이다. 외계인을 고문실에 넣고 심문하거나, 실험대 위에서 해부해 신체구조를 파악하기까지 한다. ‘엑스컴’은 결국 이러한 방식으로 외계기술을 습득하고 외계무기를 양산해 침략자들을 쫓아낸다.
▲ 인간을 해부하는 '플로터' 외계인 (상), 인간에게 해부 당한 '섹토이드' 외계인 (하)
(사진출처: UFOpaedia)
게임 마지막에 드러난 이야기에 따르면, 사실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들은 나름 절박한 상황이었다. 모성인 화성의 자연이 메말라 살 수 없게 되자 지구로 이주를 감행했던 것이다. 인간과 유전자를 결합하고 싶어했던 이유도 실은 지구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거대한 뇌 모습의 외계인 수장은 자비를 구걸하며 지구에서 함께 살자는 화해의 제스처를 건넸지만, ‘엑스컴’ 지휘관은 외계기술로 제작한 플라즈마 라이플을 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엑스컴: UFO 디펜스’는 외계인이 그렇게 멸절 당하고 인류는 역으로 화성에 진출해서 식민지를 세우는 것으로 끝난다. 화성은 척박해 살기는 힘들지만, 지구에 없는 광물 ‘엘레리움(Elerium)’이 매장되어 있었다. 이 ‘엘레리움’을 탐낸 인류가 화성까지 가 식민지를 세운 것이다. 외계인의 지구 침공 목적이 식민지 건설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결말까지 인간과 외계인은 서로 비슷한 행보를 보여준 셈이다.
▲ 외계인 수장이 자비를 구걸하는 문구 (상), 말을 끊고 총을 갈겨버리는 '엑스컴' (하)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두 번째 작품인 ‘엑스컴: 심해에서 온 공포(X-COM: Terror from the Deep)’도 전작과 비슷한 거의 내용이었다. 다만 이 작품은 전통적인 외계인 침공 대신 ‘크툴루 신화’에서 여러 모티프를 따왔다. 여기서는 중생대에 지구에 불시착해 심해에 잠들어있던 외계인들이 깨어난다. 이들은 멕시코 만 깊숙한 곳에 떨어진 거대 우주선 ‘티레스(T’Leth)’ 안에 아직 동면상태로 대기 중인 지도자, ‘위대한 꿈꾸는 자(Great Dreamer)’를 깨워 지구를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여기서도 외계인은 사람을 납치해 실험하는 데 상당히 열중인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을 바탕으로 신체기관 일부를 외계인 것으로 대체한 혼종 ‘딥 원’을 만드는가 하면, 기계에 인간 뇌를 이식한 ‘바이오드론’ 같은 사이보그를 만들기도 한다.
이에 인류는 다시 한 번 ‘엑스컴’을 모아 해저 외계인들과 맞선다. 이번에도 ‘엑스컴’은 외계인을 심문하고 해부해 외계기술을 익히고, ‘위대한 꿈꾸는 자’가 깨어나기 전에 ‘티레스’를 폭파시키는 데 성공한다. 또 한 번 외계기술로 외계인로 물리친 것이다.
▲ '위대한 꿈꾸는 자'의 관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이처럼 ‘엑스컴’ 시리즈 첫 두 작품은 외계인의 선제침략으로 시작하지만, 게임 후반으로 갈수록 인간과 외계인이 거의 차이가 없어지게 된다. 인간과 외계인이 서로를 심문하고, 해부하며, 땅을 빼앗아 식민지로 삼는다. 사실상 하는 짓이 비슷하다.
그래도 첫 두 작품은 외계인의 기술과 땅을 빼앗는 정도로 그친다. 여기까지는 ‘엑스컴’ 외에도 많은 게임에서 볼 수 있는 설정이다. 그런데 세 번째 작품인 ‘엑스컴: 아포칼립스(X-COM: Apocalypse)’는 한 발 더 나아갔다. 여기서부터는 인간의 ‘외계인화’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진다.
‘외계인화’한 인류를 보여준 ‘엑스컴: 아포칼립스’
▲ 미래적인 분위기를 지향했던 '엑스컴: 아포칼립스' (사진출처: UFOpaedia)
‘엑스컴: 아포칼립스’는 두 번에 걸친 외계인 침략으로 변해버린 미래의 지구를 무대로 한다. 이 작품의 특징은 바로 ‘외계인화’한 인류문명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엑스컴: 아포칼립스’의 인류는 이미 외계기술을 무기뿐 아니라 일상에까지 완전히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외계인 피가 섞인 돌연변이와 함께 살기도 한다. 전작의 ‘외계기술 모방’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인간의 외계인화’을 보여준 셈이다.
게임은 두 번째 외계인 침공 이후 반 세기 만에 발생한 세 번째 침공을 다룬다. 그런데 세 번째 침공은 앞선 두 번의 침공과는 큰 차이가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침공은 그래도 같은 우주에 사는 외계종족의 침략이었다. 반면, 세 번째 침공은 완전히 다른 우주에서 외계종족의 침략이다. 이들은 갑자기 지구에 차원관문을 열고 나타나 공습을 개시했고, ‘섹토이드’ 같은 기존 외계인까지 납치해 가축으로 사용했다.
이번에도 ‘엑스컴’ 사령관 역할인 플레이어는 새로운 외계인의 침략에 맞서 ‘메가 프라이머스’ 모든 시민을 단결시켜야 한다. 그렇기에 이 게임에서는 외계인과의 전투뿐 아니라 도시 내 여러 조직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며, 때로는 시민단체의 요청으로 복잡한 사회문제에 개입해야 할 때도 있다. 재미있는 점은 그 과정에서 외계기술을 받아들인 미래사회의 면면이 굉장히 흥미롭게 묘사된다는 것이다.
▲ 새로운 외계인의 침략을 당하는 '메가 프라이머스'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티레스’가 파괴된 여파로 지구의 자연은 심각하게 오염됐다. 이미 대부분의 인류는 지구를 떠나 화성에 정착했고, 지구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돔으로 만들어진 대도시 ‘메가 프라이머스(Mega-Primus)’에서 살아간다. 이 시기 지구 인류사회는 ‘섹토이드’ 피가 섞인 혼종 ‘하이브리드’가 시민으로 인정받고, 외계기술을 바탕으로 인공지능과 반중력 자동차를 개발하는 등, 전작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미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하이브리드’다. 이들은 전작에서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실험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의 후손이다. ‘하이브리드’는 얼핏 봐도 일반적인 인간과 구분되는 큰 눈, 튀어나온 이마 등 ‘섹토이드’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작중 ‘하이브리드’는 ‘돌연변이 연합(Mutant Alliance)’라는 시민단체를 이루고 인권신장 및 ‘섹토이드’ 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것으로 나온다. 외계인이라면 일단 쏘고 보던 전작에서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다.
▲ 전작의 비열한 적 '섹토이드' 혼종과도 손잡아야 한다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일반인이 일상에 외계문명을 받아들인 모습도 흥미롭게 묘사된다. 예를 들어 전작에서 외계인의 ‘사이오닉’을 모방하기 위해 개발했던 기술은 정신마약인 ‘사이클론(Psiclone)’으로 변질돼 빈민가 곳곳에서 사용된다. 또한 최종병기에만 사용되던 ‘호버(Hover)’는 민간 자가용에 도입돼, 어디서나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엑스컴: 아포칼립스’는 외계기술을 받아들여 비약적으로 변모한 미래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외계기술이 미래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보니 일부 인간들은 아예 ‘우수한 외계종족을 신으로 섬겨야 한다’는 믿음까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진 집단이 바로 ‘시리우스 사교(Cult of Sirius)’다. 이들은 인류는 스스로 성장할 수 없고, 오직 외계종족의 인도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시리우스 사교’가 ‘엑스컴’에게 수시로 테러를 벌이는 점이다. ‘엑스컴’이 신들의 도래를 막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 외계인을 신을 숭배하는 광신도 테러리스트 집단 '시리우스 사교'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초기 ‘엑스컴’ 3부작은 침략자 외계인에 맞선 인류의 결사항전을 다루었지만, 그 이면을 보면 늘 인간이 외계인을 모방하는 요소가 존재했다. ‘엑스컴: 아포칼립스’는 이러한 특징을 한층 부각시켜 보여준 작품이었다. 외계인과 싸우다 어느새 외계인처럼 변해버린 인간을 그린 셈이다. 이 게임에 묘사된 미래사회는 어느 정도 외계기술에 경도된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렇기에 ‘시리우스 사교’ 같은 조직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엑스컴: 아포칼립스’는 전작들에 비해 미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세계관도 크게 바뀌었지만, 게임 자체도 턴 기반인 전작들과 달리 실시간 방식을 지원하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롭긴 했지만 팬들의 입맛을 충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스컴’ 프랜차이즈는 전투기 게임 ‘엑스컴: 인터셉터(X-COM: Interceptor)와 FPS ‘엑스컴: 엔포서(X-COM: Enforcer)’를 내놓으며 새로운 방향성을 추구했지만, 쓰디쓴 실패를 맛봐야 했다.
리부트로 한층 더 막 나가기 시작한 ‘엑스컴’ 대원들
▲ 리부트로 돌아온 '엑스컴' 시리즈 (사진출처: UFOpaedia)
‘엑스컴’ 정식 프랜차이즈는 2001년 ‘엑스컴: 엔포서’를 마지막으로 동결됐다. 하지만 그 후로도 ‘엑스컴’의 인기는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충성도 높은 팬들이 자체적으로 개량 모드를 만들며 명맥을 이어간 것이다. 이러한 인기 탓에 ‘엑스컴’의 정신적 후계자를 자처하는 게임도 많았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엑스컴’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대부분 큰 관심을 받았다. ‘레이저 스쿼드(Laser Squad)’, ‘UFO: 외계인들(UFO: Extraterrestrials)’, ‘제노넛(Xenonauts)’ 등이 그 대표들이다.
이러한 인기 때문이었을까? ‘엑스컴’은 동결 11년 만인 2012년에 극적으로 부활하는 데 성공했다. 판권을 인수한 2K 게임즈 산하 파이락시스 게임즈 스튜디오에서 리부트 ‘엑스컴’을 제작한 것이다. 리부트 첫 작품은 전작 이름을 변용한 ‘엑스컴: 에너미 언노운’이었다. 이 게임은 전작들의 장점을 잘 계승하면서도 높은 완성도를 선보여, 메타크리틱 8.9를 기록했다. 오랜 세월 잠들어있던 유명 프랜차이즈를 훌륭하게 부활시킨 셈이었다.
▲ 리부트 시리즈의 외계인 수장 종족 '에테리얼' (사진출처 UFOpaedia)
리부트 시리즈는 원작보다 한층 더 처절한 인간과 외계인의 싸움을 보여줬다. 여기에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한 목적도 더욱 무시무시한 이야기로 변경됐다. 전작 외계인들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지구의 식민지화’였던 반면, 리부트 시리즈에서는 ‘인간’ 자체가 목적이 것이다.
리부트 시리즈에서 외계인은 ‘에테리얼(Ethereal)’이라는 막강한 ‘사이오닉’을 지닌 고대 종족에게 인도된다. 그런데 사실 ‘에테리얼’은 종족 전체가 사멸의 길을 걷고 있다. 모든 ‘에테리얼’이 치명적인 근육수축을 겪고 있어서, 언젠가 모두 불구가 될 운명인 것이다. 때문에 ‘에테리얼’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의 정신을 옮겨 담을 수 있는 육신을 찾아 우주를 떠돌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족은 ‘에테리얼’의 막강한 정신을 담기에는 너무 결함이 많았다.
그렇게 ‘에테리얼’이 멸종 직전에 달했을 때 기적적으로 찾아낸 종족이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은 ‘에테리얼’이 원하는 수준의 신체적 강건함, 지성, 그리고 ‘사이오닉’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에테리얼’은 지금까지 우주를 떠돌며 수집한 노예종족을 총동원, 지구 침략에 나선다.
▲ 인간을 기반으로 한 '에테리얼'의 새로운 육신, '아바타'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이러한 이야기는 게임 후반부에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엑스컴: 에너미 언노운’ 최종전은 위험한 실험에 자원해 ‘사이오닉’을 최대한으로 개발한 초인병사인 ‘자원자’가 ‘에테리얼’ 지휘선에 침투, 그들과 대적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때 ‘에테리얼’들은 습격 당하는 와중에도 매우 만족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토록 우주를 헤매며 찾던 잠재성의 종족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에테리얼’들은 인간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이후 ‘엑스컴 2(XCOM 2)’에서 ‘에테리얼’은 아예 지구를 정복해버린다. 이들은 인간의 유전물질을 추출해 외계인 유전자와 합성한 혼종 ‘어드밴트’를 만드는가 하면, 인간 육신을 ‘에테리얼’ 정신에 맞춰 개조한 ‘아바타’를 제작한다. ‘엑스컴 2’에서 ‘에테리얼’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자기 종족 전체의 정신을 ‘아바타’에 옮겨 담는 ‘아바타 프로젝트’다. 이 계획이 성공하면 인간이 외계인의 손아귀에서 해방될 가능성은 사라지고, 자동적으로 게임 오버를 당하게 된다.
이렇듯 외계인의 목적은 ‘인간과 결합하여 새로운 종족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 입장에서는 유전물질을 추출 당하고 죽지 않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리부트 시리즈의 ‘엑스컴’은 정말 외계인 못지 않게 잔인한 수단까지 쓰며 싸운다. 예를 들어서 확장팩 ‘엑스컴: 에너미 위딘’ 유닛 ‘MEC’은 병사 팔다리를 자르고 로봇에 탑승시킨 병종인데, 이는 외계인 무기인 ‘멕토이드(Mectoid)’를 모방한 것이다. ‘MEC’에 태우겠다고 멀쩡한 사람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것은 온전한 인간이라기 보다는 외계인이 할 짓에 더 가까워 보인다.
▲ 'MEC'(좌측)과 '멕토이드'(우측)가 맞붙는 모습 (사진출처: UFOpaedia)
▲ 'MEC'에 탑승하기 위해 사지를 절단하고 기계 수족을 단 병사 (사진출처: UFOpaedia)
‘엑스컴 2(XCOM 2)’와 확장팩 ‘엑스컴 2: 선택 받은 자들의 전쟁(XCOM 2: War of the Chosen)’에 가면 인간의 극단적인 행보는 더욱 두드러진다. 이미 지구가 외계인에게 정복 당해서 처절해진 모양이다. 이 때부터는 ‘적에 맞서기 위해 적의 무기를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적과 비슷한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한다.
그 극단적인 예가 바로 ‘엑스컴 2: 선택 받은 자들의 전쟁’에 등장하는 ‘템플라(Templar)’ 병종이다. ‘템플라’는 극한까지 ‘사이오닉’을 개발해 육체와 정신에 변이가 시작된 이들이다. 덕분에 이들은 적의 정신을 불태우고, 폭풍을 일으키며, 적의 플라즈마 사격을 튕겨내기도 한다. 그러나 ‘템플라’ 육신은 피부 아래서부터 보랏빛 촉수가 올라오는 등 괴물처럼 변모되어가고 있다. 외계인의 힘을 얻기 위해 스스로 외계인을 닮아가는 길을 택한 셈이다.
▲ '엑스컴 2: 선택 받은 자들의 전쟁' 홍보 영상에 등장한 '템플라' (사진제공: 2K)
그런가 하면 외계인과 싸우다 외계인에게 매료되어버린 인간도 있다. ‘엑스컴: 에너미 언노운’의 주요 등장인물인 ‘발렌 박사’다. ‘발렌 박사’는 외계인 생체실험에 탐닉하는 ‘엑스컴’ 연구원으로, 나중에는 아예 외계인 태아로 새로운 외계종족을 만들어서 ‘에테리얼’에 맞설 계획까지 세운다. ‘엑스컴 2’ DLC ‘외계인 사냥꾼(Alien Hunter)’에 나온 ‘외계인 지배자’의 정체가 바로 ‘발렌 박사’가 만든 프로토타입 강화 외계인이다.
이처럼 리부트 시리즈는 ‘인간처럼 되고 싶은 외계인’, 그리고 ‘외계인에 맞서기 위해 외계인처럼 변해가는 인간’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바로 ‘엑스컴 2’ 최종전이다. 여기서 플레이어인 ‘사령관’은 외계인에게서 탈취한 ‘아바타’에 직접 정신을 업로드, ‘에테리얼’이 조종하는 적 ‘아바타’에 맞서 직접 전투를 벌인다. 인간과 외계인이, 인간과 외계인의 유전자를 합성해 만든 똑같은 생체병기로 싸운 것이다.
‘외계인에게 외계인 같은 짓을 할 수 있는 게임’
▲ '엑스컴: 언노운 에너미'에서 '섹토이드' 외계인에게 뇌파 고문을 가하는 장면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
사실, 이처럼 인간이 외계인과 동화되는 이야기가 비단 ‘엑스컴’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영화 ‘아바타’, ‘디스트릭트 9’, ‘스카이라인’ 등 여러 영화가 비슷한 줄거리를 다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엑스컴’ 세계관이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엑스컴’ 만큼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과 외계인의 동화를 그린 게임은 많지 않다. 인간이 외계인을 고문하고 해부하며, 이를 바탕으로 적을 모방해 괴물이 되는 게임은 단연 ‘엑스컴’이 그 시초라 할 만하다. 외계인 포획, 시체 수습, 생체연구 등 ‘엑스컴’의 특징적인 게임 방식은 이러한 광기 어린 분위기를 한층 더 짙게 느껴지게 해준다.
‘엑스컴’ 세계관에서 인류의 극단적인 행보는 앞으로 더 심해질 예정이다. ‘엑스컴 2’는 시리즈 최초로 지구가 외계인에게 정복 당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분노에 가득 찬 저항군의 악에 받친 싸움을 보여줬다. 또 최근 발매된 확장팩 ‘엑스컴 2: 선택 받은 자들의 전쟁’에서는 외계인들과의 끝없는 투쟁으로 과격해진 특수부대 ‘리퍼’, ‘사이오닉’에 심취한 나머지 변이가 시작된 ‘템플라’, 외계인과 피가 섞인 ‘스커미셔’ 등, 한층 더 과격한 색채의 유닛들이 추가됐다.
이러한 흐름으로 볼 때, 아마 ‘엑스컴’ 세계의 인류는 외계인 침략자에 맞서 계속 괴물이 되어갈 듯하다. 그것도 자신들의 적인 외계인과 매우 닮은 괴물 말이다.
▲ '엑스컴 2: 선택 받은 자들의 전쟁'에 등장한 인간과 외계인의 혼종 '스커미셔'
(사진출처: 게임 영상 갈무리)